일시 : 2025년 6월 27일(금) 19:30

장소 : 경동교회

프로그램 및 연주

  1) 송은주 (하프시코드)

     - 스카를라티, 키보드 소나타 C장조 Kk.420

  2) 강주호 (하프시코드)

     - 스카를라티, 키보드 소나타 D단조 Kk.213

     - 스카를라티, 키보드 소나타 D장조 Kk.443

  3) 조남수 (하프시코드)

     - 스카를라티, 키보드 소나타 F장조 Kk.437

     - 스카를라티, 키보드 소나타 F장조 Kk.438

  4) 이경희 (하프시코드)

     - 리게티, 헝가리풍 파사칼리아 (1978)

     - 리게티, 헝가리안 록 (샤콘느) (1978)

  5) 우지안 (포르테피아노)

     - 스카를라티, 키보드 소나타 E장조 Kk.380

     - 스카를라티, 키보드 소나타 A장조 Kk.533

  6) 황문희 (하프시코드)

     - 스카를라티, 키보드 소나타 A단조 Kk.149

     - 스카를라티, 키보드 소나타 A장조 Kk.39

  7) 하연우 (하프시코드)

     - 스카를라티, 키보드 소나타 D단조 Kk.9

     - 리게티, 연속체(Continuum) (1968)

  8) 윤철희 (포르테피아노)

     - 스카를라티, 키보드 소나타 C장조 Kk.132

     - 스카를라티, 키보드 소나타 F장조 Kk.17

     - 스카를라티, 키보드 소나타 D단조 Kk.141

  9) 강은수 (하프시코드), 송은주 (포르테피아노)

     - 라모, 무언극(La Pantomime)

     - 라모, 이방인(Les Sauvages)


* 세줄평

실연으로 처음 듣는 하프시코드와 포르테피아노 사운드다. 두 번 놀랐는데, 하프시코드 소리는 예상보다 작아서 포르테피아노 소리는 의외로 풍성해서이다. 아기자기한 맛은 하프시코드가 낫지만 포르테피아노가 더 친숙하게 다가온다. 우지안과 윤철희 연주가 기억에 남는 까닭이다. 두 악기의 특성은 마지막 라모의 곡 이중주에서 두드러진다. 리게티의 작품은 그저 신기할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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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네딕도 전기 - 그레고리오 대종 교부문헌총서 11
그레고리오 교황 지음 / 분도출판사 / 199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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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막의 안토니우스>와 마찬가지로 페트라르카의 저작집을 읽다가 문득 호기심이 생긴 인물이 이 책의 저자인 그레고리오 대종, 즉 대교황 그레고리오 1세다. 평생 은수자로 살아가길 바랐으나 불가피하게 교황이 된 인물이다. 서양음악의 원류인 그레고리오 성가의 주인공과 동일인임을 이전에는 미처 알지 못하였다.

 

그레고리오 대종은 <대화집>이라는 네 권의 저서를 남기고 이탈리아의 종교 성인과 그들의 일화를 두루 소개하고 있는데, 이 중에서 가장 심혈을 기울여 소개한 사람이 바로 베네딕도[베네딕토, 베네딕투스]이다. 솔직히 베네딕도가 누구인지 몰랐는데, 베네딕트 수도회는 들어본 기억이 있다.

 

아타나시우스로 인해 이집트의 안토니우스가 기독교 세계에서 유명해졌듯이, 그레고리오 대종의 저작은 이탈리아 산속의 일개 수사에게 불후의 명성을 갖게끔 하였다. 비록 표제는 전기라고 되어 있지만, 엄밀한 의미에서 전기는 아니다. 베네딕도의 출생과 죽음을 다루지만 대부분의 내용은 그가 수사로서 겪는 영적 시련과 깨달음을 통해 기적을 행하는 사례 모음집이다.

 

<대화집>의 전체 구조에서 이미 살펴보았듯이, 그레고리오는 성 베네딕도를 부각시키기 위해 다른 성인들을 들러리로 세우는 형식을 취한 것은 이탈리아의 성 베네딕도를 이집트의 성 안토니우스나 갈리아의 성 마르띠누스와 필적할 인물, 아니 그 이상의 인물로 소개하려는 의도를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P.77, 해제)

 

장문의 해제를 제외하면 180면 남짓한 본문인데, 본문은 라틴어 원문과 우리말 번역문의 대역 구조로 이루어진다. 분량으로도 수록 내용으로도 읽기에 부담될 수준은 아니다. 저자 그레고리오와 수사 베드로 간의 대화 형태로 진행된다.

 

저자가 강조하는 점은 수사로서 베네딕도의 불멸의 모범성과 위대성이다. 그는 이미 수비아꼬 시기에 각종 시련을 극복하고 영적으로 완성되어 있었다. 이전에도 이적을 행하였지만 그를 질시하는 다른 수사들을 피하여 몬떼까시노에 정착한 이후 기록은 방대한 이적의 기록이다. 때로는 저자가 베네딕도를 너무 신성시할 정도로 띄우는 게 아닐까 의구심이 들 정도다. 그에 따르면 베네딕도는 제자에게 물 위를 달릴 수 있도록 하였다. 사탄과의 잇따른 대결은 가뿐히 제압할 정도며 예언의 능력마저 갖추게 되었다. 사도들의 소관이라고 손사래 치던 죽은 이를 살리는 이적마저 이루어냄으로써 베드로와 같은 사도와 동격으로 추앙한다. 35장에 이르면 거의 천상의 경지에 도달하고 있을 정도다.

 

하느님 안으로 이끌려 올라간 그분은 하느님 이하의 모든 것을 (아무) 어려움 없이 볼 수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그분 눈에 비춰졌던 외적 빛 안에는 영혼의 내적 빛이 있었다. (P.231, 35)

 

그레고리오가 유독 베네딕도를 높이 평가하는 사유는 무엇일까? 이탈리아에도 위대한 성인이 있음을 보여주고자 한 의도가 전부는 아니라고 본다. 거의 동시대 인물로서 훗날 베네딕도 수도회가 크게 발전하였음을 내다봐서도 아니리라. 그레고리오 대종이 교황에 재위하던 시기는 이탈리아에서 일대 혼란기였다. 서로마 제국의 멸망 이후 동로마 제국이 한때 이탈리아를 수복하였으나 다시 세력을 잃고 이탈리아반도는 주인 없는 땅으로 여러 게르만족이 횡행하여 법과 사회 질서가 무너지고 있었다. 그레고리오는 윤리적, 종교적 질서를 회복하기 위해 대중의 눈높이에 맞는 전범을 내세우고 싶었던 게 아니었을까. 게다가 베네딕도가 몬떼까시노에 세운 수도원은 로마 신전의 자취에 자리 잡았으니 이교도 선교의 상징적 사건이기도 하다. 그레고리오는 현실을 인정하고 게르만족을 포교 대상으로 삼는 정책을 폈는데, 그들에게 멀리 있는 그리스도와 사도들보다 베네딕도가 훨씬 현실적으로 소구하는 사례이기도 하다.

 

저자의 집필 목적이 어떠하고, 기독교인이 베네딕도를 어떤 존재로 존경하는지와 상관없이 나와 같이 비신도들에게도 흥미로운 인물이다. 일단 그의 무수한 이적은 흥미로운 일화, 즉 옛날이야기로 생각하면 된다. 중요한 건 그가 육신적, 정신적 유혹을 물리치고 치열한 수도를 거쳐 차근차근 완덕을 향해 나아가고 마침내 도달하였다는 점이다. 우리가 사는 현대 사회는 풍요로운 물질로 넘쳐 나고 있기에 오히려 정신적으로 빈곤하고 타락할 위험이 크다. 베네딕도의 삶에서 어떤 교훈이라도 발견할 수 있다면 자체로서 큰 보람이 아니겠는가.

 

베네딕도는 <규칙>이라는 책을 유일하게 남기고 있다. 이는 수도원과 수사들이 올바른 수도 생활을 위해 지켜야 할 규칙들을 제시하고 있는데, 이를 따르는 수도원들의 연합체가 베네딕트 수도회라고 한다. 단순히 규칙서라면 내게는 관심 밖일 터인데, 그레고리오는 여기서 솔깃한 발언을 하고 있다. 조만간 이 규칙서도 대강이나마 훑어봐야겠다.

 

만일 누가 그분의 생활방식을 더 자세히 알고자 하면, 그분이 제정한 규칙서 안에서 지도하신 그분의 모든 행적을 찾아볼 수 있다. 실상 성인께서는 당신이 사신 것과는 다른 어떤 것도 도무지 가르칠 수 없는 분이셨기 때문이다. (P.233. 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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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막의 안토니우스
알렉산드리아의 아타나시우스 지음, 허성석 옮김 / 분도출판사 / 201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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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트라르카의 일련의 저작을 읽는 가운데, 사막에서 홀로 고독한 수행을 하는 인물들에 관한 내용이 더 궁금해졌다. 이 책의 주인공인 안토니우스는 들어보지 못하였지만, 저자인 아타나시우스는 세계사에서 언급되었던 인물이다. 언제나 아리우스와 대비되는 존재로서.

 

수도원 같은 단체생활이 아니라 홀로 외딴곳에서 숨어 지내며 수행을 하는 사람을 기독교에서는 은수자라고 부르나 보다. 어쨌든 안토니우스, 3세기 후반에서 4세기 전반을 거쳐 백세 이상의 삶을 누렸던 그는 수도승의 시조, 은수자의 사부로 평가받는다. 이 말은 안토니우스 이전에 사막 또는 산속에서 홀로 수도하는 관습이 없었다는 뜻이리라.

 

여기서 드는 궁금증. 왜 안토니우스는 기존처럼 집에서, 마을에서, 마을 근처에서 수행하면 되는데 굳이 인적이 드문 곳을 골랐을까. 이것은 그의 수행이 금욕수행이기 때문이리라. 그는 육체적 욕구를 극도의 최소한으로 충족시키며, 일체의 정욕을 억제하고자 한다. 육체가 풍요로워지면 마음이 느슨해지고, 정욕을 쫓다 보면 신심이 흩어질 것은 자명한 이치다. 안토니우스는 애초에 세속의 유혹을 차단하기 위해 최대한 자급자족하며 숨어 지냈던 것이 아니겠는가. 사막과 깊은 산속처럼 인적이 드문 곳은 세속의 유혹이라는 측면에서 안전하지만, 야생의 위협에 취약하며 안토니우스가 끊임없이 투쟁하였던 악령이 난무하는 장소이다. 위험으로 가득하지만 여기서 승리하며 영광을 구할 수 있는 곳.

 

그러나 네가 참으로 평화 중에 살고자 한다면 내적 사막으로 가거라.” (P.122)

 

사막에 거주하며 평화를 찾는 사람은 세 가지 싸움에서 벗어났는데, 곧 귀와 혀와 눈의 싸움이지요. 그에게 오직 마음의 싸움, 이 하나만 남아 있습니다.” (P.184, 금언)

 

안토니우스는 악마, 악령과 그침 없는 대결을 벌인다. 그의 정진이 심오할수록 악령은 한층 거칠고 적극적으로 그에게 도전한다. 악령이 성자와 성경을 두려워하여 멀리한다고 생각하기 쉽지만, 오히려 그들은 동료이자 우호자인 양 그들의 눈과 귀를 속인다. 강약과 화전의 모든 수법을 동원하여 악령은 수행자를 유혹하고 무너뜨리기 위해 애쓴다. 영적 구원에 실패하는 사람이 많아야 그들은 즐거우므로.

 

정신과 영혼 면에서 깊은 수양을 쌓을수록 어찌 악령의 유혹이 많아지는가. 여기서 악령은 실체인가 허상인가. 육체와 정신의 욕구를 억압할수록 내면의 본능은 이를 충족하기 위해 무의식적으로 발현하기 마련이다. 본디 내게서 나온 것이지만 내가 허용할 수 없는 현상, 곧 그것의 물화가 수도자의 악령 아닐까.

 

수양이 높아질수록 그의 영적 능력은 한층 강력해진다. 악령의 물리침은 물론, 광인과 병자를 치유하는 예시를 이 책에서 많이 찾아볼 수 있다. 그것이 안토니우스가 부인하듯이 오로지 높으신 분의 능력이라고 할지라도 속세인의 눈에는 그의 행위로 여겨지게 마련이다. 낭중지추라고 한다. 아무리 숨어 지낸다고 할지라도 그의 명성을 눈덩이처럼 커지고 그를 흠모하는 사람들 안토니우스의 주변에 몰려들어 수행을 따라 한다.

 

이 책에 따르면 안토니우스는 문맹이다. 글자를 전혀 모른다는 뜻인지 아니면 성경 해독을 못 한다는 것인지 정확히 알 수 없다. 어떤 경우라도 그가 성경과 종교 이론에 해박하지 못하다는 뜻이다. 여기 실린 안토니우스의 가르침과 서간 내용을 보면 그의 주장은 매우 단순하다. 모든 걸 내려놓고 금욕과 기도로 절대자에게 다가가라는 게 요지다. 대중과 교회의 요청에 따라 그는 가끔씩 은수처를 떠나지만 볼일을 마치면 황급히 귀가하였다. 로마 황제의 부름에 끝내 응하지 않고 수사로 영원히 남았다.

 

우리는 범인이 감히 따라 할 수 없는 일을 행한 사람을 존경한다. 안토니우스의 삶이 그러하다. 모든 기독교도가 그를 따라 은수자가 될 수 없고, 되어서도 안 되며, 될 필요도 없다. 그의 금욕수행은 극단에 치우쳐 고행을 지향한다. 모든 종교적 수행은 일정 부분 금욕을 요구하지만 고행이 과도하여 자기학대에 가까우면 곤란하다.

 

육체는 무엇보다도 단식과 숱한 철야, 그다음 육체를 쇠약하게 하고 육체의 온갖 욕구를 끊는 다른 모든 금욕적 수행을 통해 순수하게 됩니다. (P.213, 서간 1)

 

안토니우스는 아타나시우스의 글로 인해 불후의 영광을 얻었다. 반대로 아타나시우스 또한 안토니우스의 생애를 기록함으로 인해 영원한 명성을 누리게 되었다. 아타나시우스의 전기 자체로만 보자면 흥미롭다. 인간 안토니우스가 아니라 신앙인의 전범으로 그를 바라봤기에 글에는 온통 종교적 이적과 교훈으로 가득 차 있다. 다만 모든 걸 떠나더라도 자신의 믿음을 완성하기 위해 모든 걸 버리고 평생을 헌신하는 사람을 만난다는 건 확실히 값어치가 있다. 비기독교인의 시각에 이 정도인데 기독교인이라면 더할 나위 없이 감동적이지 않겠는가. 그의 금언 38개와 서간 7편이 동일한 맥락이다.

 

그나저나 이집트에서 태어나 그곳에서 평생을 기독교인으로 살다 간 안토니우스가 오늘날 그곳이 기독교도를 눈 씻고도 찾을 수 없는 이슬람 땅으로 바뀌었다는 걸 알면 어떤 생각을 하게 될까. 그렇게나 기독교 이단 아리우스파를 배척하고, 그리스 철학자들과 논쟁하였던 안토니우스가. 마지막으로 그의 금언 중 하나를 소개한다. 관용이 절실히 요구되는 시대다.

 

사람들이 실성할 때가 올 것입니다. 그들이 미치지 않은 누군가를 보게 되면 넌 미친놈이야!’라고 말하며 그를 공격할 것입니다. 단지 그가 자기들과 다르다는 이유 때문입니다.” (P.1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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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시 : 2025년 6월 18일(수) 19:30

장소 : 수원SK아트리움 대공연장

연주

  - 최희준 (지휘)

  - 수원시립교향악단

  - 원재영 (피아노)

  - 곽재호 (트럼펫)

프로그램

  - 쇼스타코비치, 피아노 협주곡 1번 C단조 Op.35

  - 쇼스타코비치, 교향곡 8번 C단조 Op.65


* 세줄평

일부러 비교적 중앙 앞자리를 선택하였다. 협주곡은 자세히 보고 싶고, 교향곡은 모처럼 음향의 파도에 휩쓸리고 싶어서다. 피아노 협주곡은 다소 의아하였다. 독주와 악단 간 음량 밸러스가 맞지 않은 느낌이랄까 아니면 연주장과도 연관성이 있을 듯. 연주자의 완전한 기량을 감상하지 못한 아쉬움이 든다. 교향곡은 전혀 다르다. 기대하였듯이 쇼스타코비치 사운드다운 강렬하고 단말마적 비명과 무지막지한 폭주가 쏟아진다. 느리고 섬세함과 빠르고 거침의 대조가 오랜만에 듣는 쇼스타코비치를 더욱 매력적으로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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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시 : 2025년 6월 17일(화) 19:30

장소 : 예술의전당 리사이틀홀

연주 : 이호찬 (첼로), 송영민 (피아노)

프로그램

  - 포레, 첼로 소나타 1번 D단조 Op.109

  - 포레, 첼로 소나타 2번 G단조 Op.117

  - 풀랑크, 사랑의 길, FP 106

  - 풀랑크, 첼로 소나타,FP 143


* 세줄평

포레는 낭만적일 거라는 선입견을 첼로 소나타가 말끔히 지워버린다. 그가 과연 20세기 작곡가임을 깨닫게 된다. 소나타 2번의 강렬하면서 고독한 첼로 음향이 뇌리를 울린다. 풀랑크의 첼로 소나타는 역시 풀랑크다운 재치와 현대음악 서법이 결부된 곡이다. 이 곡도 확실히 진지하게 감상할 레퍼토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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