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다 컨스피러시 옥성호의 빅퀘스천
옥성호 지음 / 파람북 / 202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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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인한 입맞춤>에 이어 가룟[가롯] 유다와 관련된 책이다. 전자는 예수와 유다 간 은밀한 공조로 십자가가 이루어지고, 유다는 치욕을 감수하게 되었다는 견해다. 여기 저자는 다른 의견을 펼친다. 유다가 실존하는 인물인지 부정적이며, 설사 그의 실재성을 인정하더라도 그와 예수의 공모는 터무니없다고 본다. 유다의 도움은 십자가의 가치와 순수성을 저해하기에 용납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오히려 유다가 십자가를 회피하려는 예수를, 십자가로 나아가게끔 강제하는 역할을 했다고 주장한다.

 

예수는 십자가형에 처해졌다. 성경에 따르면 예수의 죄목은 유대교 근본 교리를 위배하였기에 종교적 사유이다. 그런데 반역자를 처벌하는 로마의 십자가형을 받았다는 건 이상하다. 이 말은 예수가 현실상에서 로마에 저항했다는 의미다. 세계제국 로마에 대항한다면 기독교도는 생존할 수 없다. 따라서 4대 복음서를 통해 예수의 죽음은 종교적이며, 기독교는 친로마적임을 밝히고, 로마에 저항한 유대민족이야말로 예수를 죽음으로 몰고 간 파렴치한 족속으로 설정하였다. 그리고 유대민족의 상징 인물로 비열한 배신자 유다를 만들어냈다.

 

구약에서 선택받은 사람들인 유대민족은 신약에 와서 예수의 비난과 저주를 받는 처지로 전락했다. 끝내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를 부인하고, 죽게 만든 악역이 되었다. 신약의 모순을 비판하는 견해는 일견 타당성이 있기에 흥미롭다. 유다는 예수의 실제 제자인가, 유다는 푼돈에 눈이 멀어 예수를 팔아넘겼는가, 아니면 유다의 마음에 사탄이 들어가 예수를 죽게끔 만들었는가 등 여러 의문이 생긴다. 사탄의 작용이라면 인류 구원을 위한 십자가를 저지해야 하는 사탄이 어째서 유다를 부추겨 예수의 십자가를 강행하게 행동하였는가.

 

1세기 기독교인이 살아남기 위해서 쓴 게 복음서다. 내가 살기 위해서 누군가가 대신 죽어야만 했다. 기독교인에게 유대교를 신봉하는 유대민족 외에 다른 선택지는 없었고, 그 결과 그들을 상징하는 인물, 가롯 유다를 만들었다. (P.23)

 

다만 유대민족을 희생양으로 삼기 위해 유다를 창안하고 이용했다는 견해는 논리적 맥락이 다소 약하다. 로마-유대 전쟁으로 위태로운 상황에 놓였다고 인정하더라도 복음서 저자는 유대인이 아니었는가. 유대인이라면 기독교도 유대인의 생존을 위해 유대교 유대인 동족을 멸족시키려는 음모를 획책한 게 아닌가. 유다와 손잡은 유대민족이 결과적으로 예수의 십자가를 완성했다면 오히려 칭찬할 일이 아닌가. 애시당초 십자가를 통한 구원이 타당한 주장인가. 이런 의문이 계속 떠오른다.

 

예수의 십자가에서 유다의 희생이라는 지분을 인정함으로써, 배신자 유다라는 오명을 벗기고 그의 복권을 기대할 수 있을까? 그렇지 않다. 유다가 나쁜 놈이 될수록 기독교가 산다. 기독교가 사는 길 중 하나가 유다를 악인으로 만드는 것이다. (P.61)

 

예수와 유다가 공모를 했든지 또는 망설이는 예수를 유다가 유대민족을 이용하여 강제하였든지 유다가 십자가 진행에 결정적인 기여를 한 게 사실이라면 더 이상 유다를 배신자 취급할 까닭이 없다. 그럼에도 기독교에서는 유다를 인정하는 게 불가능하다. 그건 기독교 존재의 뿌리를 뒤흔드는 위험한 발상이다.

 

2부에서 저자는 4대 복음서에 가롯 유다의 인물과 역할이 어떻게 변질하는지 자세하게 파헤친다. <마가복음>에서는 오병이어와 향유 에피소드를 통해 예수와 제자 간 긴장 관계를 암시한다. 유다의 드러난 배신 동기는 모호하다. 종교적 이유로 해석될 여지도 다분하다. <마태복음>에서는 그걸 우려하였던지 금전적 동기를 제시한다. 다만 그것이 푼돈에 불과하다는 게 애매하다. 돈에 눈먼 배신자가 유대민족이 혈안이 되어 찾고 있던 예수를 넘겨주는데 그 정도에 만족한다는 게 설득력이 약하다.

 

<누가복음>은 새로운 동기를 도입하는데, 사탄의 등장이다. 사탄이 유다에게 작용하여 배신하게 했다는 것. 이상하다. 사탄의 개입은 앞서 말한 모순을 낳는 동시에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의 능력을 초라하게 만든다. 예수가 사탄의 활동을 몰랐다면 무능하며, 알고 방치했다면 자가당착에 빠진다. <요한복음>에서는 처음부터 사탄이 유다를 사로잡았고, 예수는 이를 알면서도 제자로 삼고 방치하였다. 전지전능한 예수가 이러한 사실을 몰랐을 리가 없어서다. 그렇다면 예수는 유다를 사탄에서 구원할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래야 자신이 십자가에 오를 수 있으니까. 이쯤 되면 유다를 배신자로 치부하기 곤란하다. 유다는 배우일 뿐, 감독은 예수이므로. 이러한 모순을 저자는 아래와 같이 결말 짓는다.

 

유다가 희생자가 되는 순간, 예수가 가해자가 된다. 이게 무슨 의미일까? 기독교 구원교리에 심각한 문제가 있음을 스스로 인정하는 것이다. 그래서 유다는 죽어야 한다. 예수가 살기 위해서는 지난 2,000년 동안 그랬듯, 유다는 오늘도 죽어야만 한다. (P.272)

 

이상 저자의 논리와 견해를 따라가면 신약성경의 여러 모순과 불일치가 분명해진다. 저자의 해석도 날카롭게 틈새를 파헤치고 있어 막연하게 간과하던 복음서의 내용을 깊이 살펴보게 만드는 긍정적 효과가 있다. 다만 유다의 역할에 관한 저자의 주장은 여전히 추측에 기반하고 있기에 기꺼이 수용하기 어렵다. 무엇보다 저자는 기본적으로 반기독교적 입장을 시종 드러내고 있다. 이는 성경의 내용을 무조건 부정적으로 해석하는 방향을 취할 수도 있다는 우려를 내포하고 있다.

 

희생양이라는 원시 시스템, 누군가 나 대신 피를 흘려야 내가 산다는 구원의 교리로 움직이는 기독교는 언제라도 새로운 가롯 유다를 만들 수 있다. 기독교는 지금도 편 가르기에 골몰한다. 희생양은 기독교의 본질이고 DNA. (P.49)

 

인류 역사에 발생한 가장 큰 비극이 뭘까?

예수를 역사로 만든 복음서의 등장이다. (P.274)

 

저자의 분석과 주장은 분명 타당성과 흥미로움을 지니고 있다. 집필 의도가 기획 단계라면 모르겠지만 내용 자체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치면 감정 개입을 통해 객관성이 흔들리게 마련이다. <잔인한 입맞춤>과 마찬가지로 다른 근거 제시 없이 성경 자체의 불일치와 주관적 추정만을 근거로 삼는다면 다수의 동의와 지지를 받기는 어렵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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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끄러움 비채 모던 앤 클래식 문학 Modern & Classic
아니 에르노 지음, 이재룡 옮김 / 비채 / 201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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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어느 일요일 정오가 지났을 무렵, 아버지는 어머니를 죽이려고 했다. (P.23)

 

작가 특유의 충격적인 문장으로 시작한다. 그런데 내용이 심상치 않다. 아버지가 어머니를 죽이려고 했다니, 이건 살인미수가 아닌가. 놀라운 점은 잠시 후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일가족이 근처에 산책하러 나갔다는 사실이다. 작가의 기억과는 달리 진짜로 아무 일도 아니었던 것인가. 아니면 분명 중대한 일임에도 불구하고 아무 일도 아닌 것처럼 가장하였단 말인가.

 

그런데 왜 아버지는 어머니를 죽이려고 했는가. 여기서 작가의 호기심과 의문점은 시작한다. 부부 사이는 사랑으로 맺어진 따뜻하고 아름다운 관계가 아니던가. 아니 그게 정말일까. 그게 사실이라면 아버지가 어머니를 죽이려는 행위는 애초에 나오지 말아야 하지 않았을까. 부부 나아가 가족관계의 의미는 무엇일까.

 

당시의 내 현실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나를 가두었던 환경, 학교, 가족, 시골 마을의 의미를 규정하는 동시에, 미처 그 모순을 눈치 채지 못했지만 내 삶을 좌우했던 법칙, 의식, 믿음, 가치를 찾아보는 것 외에 달리 확인할 길이 없다. (P.47)

 

<단순한 열정>에서 자신의 내면적 욕망과 열정을 노출했던 작가는 이제 다시금 자신의 과거와 가족으로 돌아온다. 열두 살 화자는 우선 우리 동네를 확인한다. 화자가 태어나 거의 벗어나 본 적이 없는 삶의 물리적 영역. 여기서 모두가 모두를 알며 누구나 친숙한 처지다. 반면 그렇게 여유롭고 세련된 삶의 양식은 아니기에 우리 동네와 우리 가족은 품위와는 담쌓고 지낸다. 세상 무엇보다 친근하고 허물없는 관계가 가족이지만, 최소한의 예의조차도 기대하기 힘들 정도로 그네들 행동은 거칠고 막무가내다. 화자는 솔직한 서술이 자체로 사회적 계급을 드러낼까 우려한다.

 

화자의 부모는 어린 딸을 사립학교로 보낸다. 그것은 우리 동네를 벗어난 다른 공간에 속하는 장소다. 부모는 자기 자식이 우리 동네에 갇혀서 안주하기를 원하지 않는다. 사립학교가 있는 지역, 사립학교에 다니는 아이들이 속한 사회적 계급의 일원이 되기를 희망한다. 그것은 곧 그들이 처해 있는 우리 동네가 사회 계급적으로 하위에 놓여 있음을 인식하고 있음이다. 어디 프랑스뿐이겠는가 많은 우리네 부모들도 자신들을 굶주리고 못 배웠지만 자식들은 잘나고 출세하기를 바라기에 허리띠를 꽉 졸라맸다.

 

화자가 사립학교 세상에 적응하고 충실할수록 우리 동네와는 멀어진다. 태어나면서부터 뼛속 깊이 새겨진 우리 동네의 관습과 사립학교 세상과는 완전 딴판이다. 거칠고 난폭한 언행 대신 고상하고 품위 있는 언행이 지배하는 곳, 종교와 교육이 구분되지 않는 종교학교가 갖는 강한 규율성과 윤리적 억압, 같은 학생임에도 모든 면에서 구별될 수밖에 없는 공립학교, 시골, 촌스러움에 대한 경멸적 인식 등. 화자는 이중적 삶을 잘 영위할 수 있었을까?

 

사립학교에서 나는 친구가 한 명도 없었던 것 같다. 누구의 집에도 가지 않았고, 누구도 우리 집에 오지 않았다. (P.106)

 

이 작품의 표제인 부끄러움은 어떻게 발생하였을까. 그것은 화자가 갖는 모순되고 이율배반적인 교육과 문화상 차이에서 비롯한다. 화자가 사립학교의 가치관을 깊이 체득할수록 우리 동네의 저열함이 한층 두드러지게 되고, 이는 곧 부끄러움으로 다가온다. 부끄러움은 도덕적 감정이다. 내가 설정한 높은 도덕적 목표와 현재의 낮은 도덕적 단계가 나타내는 격차가 클수록 부끄러움의 강도는 높아진다.

 

부끄러움 중에는 이런 것도 있다. 나에게는 어떤 일이든 일어날 수 있고, 결코 멈추지 않을 것이며, 부끄러움 뒤에는 오직 부끄러움만 따를 거라는 느낌. (P.121)

 

그 부끄러움은 근본적이며 영구히 지속되는 감정이다. 극적인 상황 변화가 생기지 않는 한, 아마 죽을 때까지 벗어나지 못할지도 모른다. 화자의 부모는 부끄러움을 느끼지 못한다. 그들의 삶은 오로지 우리 동네에만 속하기에 달리 비교군이 없다. 우리 동네에서는 부부가 상호 존중하지 않고 다투며 미워하는 게 드물지 않기에, 화가 치밀 때 죽이겠다는 액션도 전혀 생소하지 않다. 그것은 사회적 계급의 차이, 나아가 그것이 함의하는 정신적, 윤리적 차이를 명백히 확인해줄 따름이다.

 

부끄러움은 내 삶의 방식이 되었다. 아니, 더는 인식하지조차 못했다. 부끄러움이 몸에 배어버렸기 때문이다. (P.137)

 

화자의 부끄러움은 근원적이기에,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언급하는 부끄러움과는 질적으로 다르다. 수십 년이 지나서 중년이 훌쩍 지난 화자가 이 사건을 회상하면, 당시 어린 화자가 갖는 부끄러움과 같은 감정을 품게 된다. 이는 화자가 세월의 경과에도 불구하고 뚜렷이 구분되는 계급적 격차를 융화하지 못했음을 가리킨다. 도시인이자 부르주아가 된 그녀의 가슴 속에는 프롤레타리아의 소녀와 부모가 그대로 자리 잡고 사라지지 않았다는 사실. 화자는 그 분명하면서도 무시무시한 진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

 

그 후 그 일요일은 나와 이전의 나에 대한 모든 것 사이를 가르는 어떤 장막처럼 남게 되었다. 평소처럼 놀고 읽고 행동했지만 나는 건성으로 살았다. 모든 게 가식적으로 되었다. (P.28)

 

문학평론가 신수정이 쓴 작품 해설을 길지 않지만, 화자가 갖는 부끄러움의 모순된 실체를 다시금 명확히 짚어낸다. 화자는 우리 동네의 계급적 한계를 인식하고 부끄러움을 느끼며 이에서 벗어나고자 하였다. 이는 외견상 성공했지만 내면으로는 여전히 부끄러움에 얽매여 있다. 한편 옮긴이 해설은 독해에 꽤 유효한 정보를 제공해주는데, 1980년대에 거대 담론의 반작용으로 소시민과 내면의 탐색을 주로 하는 문학적 경향이 나타났고 아니 에르노의 작품이 나타나는 배경이 되었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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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순한 열정 (무선) -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99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99
아니 에르노 지음, 최정수 옮김 / 문학동네 / 201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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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표 당시에 상당한 논란을 일으킨 작품이다. 솔직히 잘 이해가 되지 않는다. 연하의 외국인 유부남과의 열정적 불륜 관계라는 게 문학에서 처음 다루는 것도 아닌데 말이다. 아예 대놓고 이건 허구야 했으면 별일 없을 텐데 작가는 언제나 자신이 경험한 내용만 글을 쓴다고 밝히는 게 문제다. 중년의 저명한 여류 작가가 자신의 체험담을 솔직하게 글로 남겼기에 시끄러웠던 셈이다.

 

아마도 이번 글쓰기는 이런 정사 장면이 불러일으키는 어떤 인상, 또는 고통, 당혹스러움, 그리고 도덕적 판단이 유보된 상태에 줄곧 매달리게 될 것 같다. (P.10)

 

에르노는 이미 자신의 과거와, 아버지와 어머니의 삶을 토대로 수 편의 작품을 썼다. 체험적 고백은 아무래도 작품세계의 외연이 제한될 수밖에 없다. 가족과 자신의 과거를 다루었으니 어쩌면 자신의 최근 삶을 글쓰기의 제재로 택함은 당연한 수순이 아니겠는가. 사람의 일생에서 가장 흥미진진하고 극적인 소재는 이성 간의 사랑이다. 작가는 독자에게 그 흥미로운 사건을 직접적인 목소리로 들려주는 셈이니 차라리 고마워해야 할 일이다.

 

나는 내 열정을 일일이 설명하고 싶지는 않다. 그것은 정당화되어야 할 실수나 무질서로 여겨질 수도 있다. 나는 다만 있는 그대로 보여주고 싶을 뿐이다. (P.27)

 

서로 간에 이성적으로 끌리지만 합법적 관계로 맺어질 수 없다면, 오히려 사랑의 열정은 더 절절하게 끓어오르기 마련이다. 이성과 지성을 갖춘 화자가 맹목적 열정에 사로잡혀 탐닉에 허우적거리는 모습은 낯설지만 드물지는 않다. 열병과도 같은 사랑은 반드시 청춘남녀에게만 허용된 증상은 아니다. 성취 가능성이 오히려 작기에 그네들의 열정은 한층 뜨거울 수 있다. 본능 앞에서 문명의 가면은 힘없이 벗겨져 사라진다. 적어도 유형을 불문하고 도덕과 윤리를 논외로 한다면, 사랑 자체의 절대성은 누구도 부정하지 못한다.

 

나는 이 남자와 함께 침대에서 보낸 오후 한나절의 뜨거운 순간이, 아이를 갖는 일이나 대회에서 입상하는 일, 혹은 멀리 여행을 떠나는 일보다 내 인생에서 훨씬 중요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P.16)

 

연인에게서 언제 연락이 올까 노심초사하면서 전전긍긍하는 화자는 많은 연인의 공통적 태도다. 연인과 함께 지내는 달콤하고 뜨거운 시간은 무엇보다 중차대한 의미를 지니면서도 어찌 그리 빠르게 지나가는지 안타까울 정도 아닌가. 내가 그를 그리워하는 만큼 그도 나를 그리워하는지 장담할 수 없기에 더욱 안절부절못하는, 그러기에 사랑에 빠진 사람은 절대 을의 지위에 놓일 수밖에 없는 건 만고불변의 진리라고 하겠다. 여기서 연인의 성적인 흥분은 육체적 매력과 욕망의 증거로서 자부심을 느끼게 하는 특성이다.

 

뜨겁게 불타올랐던 만큼이나 빠르게 열정은 식기 마련이다. 훗날 그때를 되돌아보면 왜 그리 앞뒤 안 가리고 맹렬하게 질주하였을까 의아할 정도다. 영원한 관계로 발전되었다면 굳이 이런 회상이 필요 없으며, 단기적 열정에 그쳤다면 일순간의 추억으로 묻혀버리고 만다. 서로 간에 더는 미련이 남아 있지 않다면 아득한 상념에 희미해진 인상으로 남아 있게 마련이지만, 어쩔 수 없는 연유로 불가피하게 헤어지게 되었다면 애틋한 마음은 두고두고 마음 밑바닥에 차곡차곡 쌓여서 이따금 이는 바람에 뒤숭숭하게 흩날리지 않겠는가. 실연의 괴로움으로 울고불고하면서 기나긴 시간을 자학하면서 보내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가. 화자 또한 마찬가지다. 눈을 뜨나 감으나 오직 연인의 모습만 눈앞에 아른거릴 뿐이다.

 

날이 밝아도 일어나고 싶지가 않았다. 아무런 계획이 없는 무의미한 하루가 내 앞에 버티고 있었다. 시간은 더 이상 나를 의미 있는 곳으로 이끌어주지 못했다. 단지 나를 늙게 할 뿐이었다. (P.47)

 

화자의 열정을 비난하지 말자, 폄훼하지 말자. 이 단순한 열정 덕택에 중년의 화자는 누구보다 풍요롭고 사치스러운 삶의 한순간을 누리고 지킬 수 있게 되었으니. 그에 대한 비난은 오히려 헐벗고 빈곤한 우리네의 열등감의 소산이자 시샘이라고 하겠다.

 

인간은 망각의 존재이기에 아쉬움도 있는 반면 덕분에 유용한 측면도 많다. 어느덧 시간이 흐르면 아련한 추억 속에 잠기며 당시의 열정은 당혹스러운 감정으로 다가오게 되는 순간이 있다. 저도 모르게 얼굴이 달아오르거나 자다가도 이불킥을 하는 때가 오지 않으리라고 누가 장담할 수 있겠는가. 화자 역시 놀람과 부끄러움으로 당시를 회상하지만, 당당하다. 그것은 자신의 감정과 충동에 대한 전적인 솔직함에 기인함이다. 그것이 작가가 굳이 비난을 각오하면서도 과거의 단순한 열정을 가감 없이 토로하는 까닭이 아니겠는가.

 

나는 한 사람이 어떤 일에 대해 얼마만큼 솔직하게 말할 수 있는지도 알게 되었다. 숭고하고 치명적이기까지 한 욕망, 위엄 따위는 없는 부재, 다른 사람들이 그랬다면 무분별하다고 생각했을 신념과 행동, 나는 이 모든 것들을 스스럼없이 행했다. (P.66)

 

중편에 해당하는 짧은 작품이다. 뭔가 짜릿하고 자극적인 대목을 기대했다면 실망하였을 독자도 제법 있으리라. 본격문학과 대중문학의 경계, 예술과 포르노의 구분되는 지점이다. 소재를 달리하지만 아니 에르노의 문학적 특징은 여기서도 명확하다. 고백적이며 회상적 성격, 체험과 경험에 기반한 글쓰기, 평이하며 서술적인 문장, 보기 드문 여백의 미의 활용, 그리고 작가의 자기 비판적 태도 등등. 작품해설에서는 정체성의 파괴라는 다소 부정적 인식을 하고 있다. 사랑이 인간성의 내밀한 본성이라고 하면, 그것은 내면의 발현이기에 오히려 외피의 허위를 벗기는 순수함과 솔직함으로 수용하는 게 옳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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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연명 : 아벨 콰르텟 베토벤 현악사중주 전곡연주 3

일시 : 2025년 11월 21일(금) 19:30

장소 : 예술의전당 IBK기업은행챔버홀

연주 : 아벨 콰르텟

  - 윤은솔 (바이올린)

  - 박수현 (바이올린)

  - 박하문 (비올라)

  - 조형준 (첼로)

프로그램

  - 베토벤, 현악사중주 3번 D장조 Op.18-3

  - 베토벤, 현악사중주 9번 C장조 Op.59-3 '라주모프스키 3번'

  - 베토벤, 현악사중주 15번 A단조 Op.132


* 세줄평

첫곡 3번이 예열이었다면, 9번 2악장에서 문득 좋다라는 느낌이 들었다. 전범인 부다페스트 콰르텟과는 전혀 다른 아름다운 섬세함이 스며든다. 압권은 15번곡이다. 진부하지만 연주자간 완벽에 가까운 호흡, 제1 바이올린의 가냘프면서도 기도하는 듯한 울림. 깊은 여운은 2악장이 이대로 계속 이어졌으면 하는 바람마저도 들 정도다. 음악회에서 이처럼 감동을 받는 연주를 경험하기란 드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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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연명 : 박옥주가 그리는 오르간 세상 16 - Romance & Byzantin

일시 : 2025년 11월 19일(수) 19:30

장소 : 대한성공회 서울주교좌성당

연주 : 박옥주 (오르간)

프로그램

  - 앙리 뮐레, 비잔틴 스케치 [전10곡]


* 세줄평

성공회 성당은 처음 와본다. 로마네스크 양식이라 특색 있고, 정면에 모자이크 성화가 눈길을 사로잡는다. 오르간은 회중석 뒤편 발코니에 위치하는데, 연주 감상하기에는 다소 불편하다. 청중 대부분이 의자를 반대로 돌려서 감상한다. 뮐레라는 작곡가와 작품이 워낙 생소하기에 사전 학습과 음원 청취를 해봤는데, 성당에서 울리는 오르간 사운드는 오디오와 확실히 차별된다. 공간을 풍요롭게 감싸울리는 음향이야말로 오르간의 최고 미덕이 아닐까. 작고 섬세함과 크고 웅장함을 자유자재로 오가는 곡의 전개도 흥미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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