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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대지 ㅣ 현대문화센터 세계명작시리즈 23
생 텍쥐페리 지음, 배영란 옮김, 이림니키 그림 / 현대문화센터 / 2009년 3월
평점 :
생텍쥐페리의 작품은 자신의 삶에 기반을 두고 있다. 그의 삶은 비행기 조종사로서의 그것이 두드러진다. 그에게서 비행기를 제거한다면 어떠한 삶이 남아있을지 의심스러울 정도다. 그는 첫 작품에서 북아프리카 우편 비행 세계를 그렸고, 차기작에서 남아메리카의 우편 비행을 다루었다. 이 작품은 특정 지역에 치우치지 않고, 북아프리카와 남아메리카의 비행기 조종사 시절을 두루 회상한다. 그렇다, 회상한다는 게 중요하다.
생텍쥐페리 작품의 자전적 요소는 그것이 실화에 연원한다는 점이다. 자신의 체험 또는 동료 조종사의 경험, 우정을 쌓았지만 생을 담보할 수 없는 불투명한 미래가 기다리는 조종사의 생활, 그들에게 비우호적인 북아프리카 무어인들의 존재. 선구적 비행사 메르모즈의 추억, 동료이자 친구인 기요메의 추억. 기항지에서 겪었던 불귀순 세력 사람들과 흑인 노예 바르크 이야기. 이 소설은 특히 그가 리비아 사막에 불시착하여 생사의 고비를 넘나들었던 생생한 체험을 담고 있다. 조종사가 아닌 특파원으로 갔던 스페인 마드리드 전선의 경험도 빼놓을 수 없다.
조종사는 오직 비바람이 몰아치는 하늘이 만들어 준 위대한 심판대 한가운데에서만 자신의 조종기로 세 가지 신성한 힘, 즉 산과 바다, 그리고 폭풍우와 싸우는 것이다. (P.43)
현재의 항공 기술로 작가의 비행을 평가하면 안 된다. 레이다도, 야간투시경도, 기체의 기술적 완성도도 부족하고, 교신도 원활하지 않은 가운데 항공로도 완성되지 않아 악전고투하면서 비행기를 조종해야 하는 게 당시의 조종사다. 야간 비행에, 악천후라도 겹친다면 최악으로 생사를 장담할 수 없을 정도다.
사람은 절체절명의 한계상황에서는 누구나 철학자가 되기 마련이다. 자신의 삶을 스스로 개척해야 함에 따른 담대함과 고독함, 죽음을 두려워하면서도 담담하게 받아들이는 초연함, 동료 조종사의 사고에 동병상련의 심정으로 예민하게 반응하는 동료애 등이 작중에서 물씬 풍기는 분위기다. 기름은 조만간 바닥나는데, 정상 경로인지 완전히 벗어나 버렸는지 현재 위치가 어딘지 알 수 없는 와중에 기항지와는 무전 연락이 이루어지지 않는 상황에서 양편이 모두 초조한 가운데, 문득 잡음과도 같고 모깃소리와도 같은 한 줄기 신호는 얼마나 커다란 기쁨과 안도를 안겨주었겠는가.
사람이 된다는 것은 엄밀히 말하면 책임을 진다는 것이다. [......] 사람이 된다는 것은 그 자신의 돌을 가져다 놓으며 이 세상을 만들어 나아가는 데에 일조하는 것이다. (P.74)
생텍쥐페리는 작중에서 책임을 강조한다. 조종사의 임무와 선택은 기체와 자신의 목숨은 물론, 비행기가 싣고 있는 우편 등의 여러 화물의 무사함을 좌우한다. 조종사는 낮과 밤에 관계없이, 맑은 날씨인지 여부와 상관없이 자신이 맡은 임무를 수행해야 한다. 책임을 진다는 건 어느 곳, 어느 상황에서도 중요하지만 막상 책임을 지는 사람을 찾기는 쉽지 않다. 책임의 무게를 헤아릴 줄 아는 사람이라면 사고와 행동을 경박하게 굴지 않는다.
감상적인 것은 오직 사회적인 문제밖에 없다. 우리가 책임져야 하는 것들에 대해 책임을 지지 못하는 우리의 무능함이지, 권총이 아니었다. (P.216)
우리가 우리 자신의 역할을 인식하게 될 때, 우리는 그 역할이 아주 하찮은 것이라 할지라도 행복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그러한 때만이 우리는 평화롭게 살아가고 평화롭게 죽음을 맞이할 수 있다. 삶에 의미를 주는 것은 죽음에도 의미를 부여해주기 때문이다. (P.297)
작가를 향한 일부 오해 중 하나는 그의 의견이 전체주의적이라는 것이다. 작중 곳곳에서 그는 개인보다 공동체를 강조한다. 이것이 훗날 나치와 파쇼로 이루어지는 사상적 흐름이라는 비판이다. 하지만 이는 단견이다. 그가 부정적으로 인식하는 개인은, 개인만을 우선시하는 이기주의적 개인에 해당한다. 이웃과 사회와 국가를 전혀 염두에 두지 않는 이기주의는 사회적 유대를 저해한다고 본다. 이는 그가 조종사 경험을 통해 체득한 교훈이었을 것이다. 조종사가 무사히 비행을 마치려면 기체 정비, 출발지와 도착지는 물론 기항지와의 원활한 소통이 필수적이다. 정비사 및 무선사와 역할 분담도. 이 모든 것이 원활하게 맞물려 돌아갈 때 비행은 안전하게 가능해진다. 이는 상대방에 대한 전적인 신뢰와 책임 의식 없이는 불가능하다.
위기의 시기가 도래하면 서로서로 손을 잡는다. 한 공동체에 속해 있음을 깨닫는 것이다. 혼자가 아님을 깨닫고, 더 넉넉해진다. 그러고는 함박웃음을 지으며 서로를 바라본다. (P.55)
따라서 그가 전쟁에 부정적인 태도를 보이는 건 당연하다. 후술할 <전시 조종사>에서 한층 두드러지지만, 전쟁이란 끔찍하고 멍청한 일임을 그는 인식한다.
우리는 모두 하나로 이어져 있다. 지구라는 같은 별에 살고 있으며, 모두 한 배를 탄 선원들이다. 하나의 새로운 문명을 만들어내기 위해 문명과 문명이 서로 대립하는 것이 좋다 할지라도, 문명과 문명이 서로를 헐뜯는 것은 그야말로 끔찍한 일이다. (P.295)
조종사는 지상의 한계를 넘어 드높은 상공에서 세상을 굽어보는 드문 기회를 얻는 사람이다. 저 높은 곳에서 아래를 내려다볼 때 지상의 사물은 자그마한 미물에 불과하다. 인간이 만든 문명은 지상의 일부에만 국한한다. 까마득한 대지 위 오아시스 같은 마을과 집. 인간의 손길이 미치지 못하는 야생 자연 그대로의 원형. 물질문명에 오염된 인간이 자연과 대지를 통해 순수한 인간으로서의 삶을 되찾을 수 있는 곳. 그래서 작가는 인간다운 인간의 미덕을 찬미할 때 우선적으로 ‘인간을 만든 대지’(P.268)에게 찬사를 보낸다.
대지에 뿌리를 내리고 공동체와 책임을 굳게 인식하는 참된 인간의 모습을 작가는 마드리드 전선에서 발견한다. 분명히 살아남지 못할 것을 알면서도 망설임 없이 서두름 없이 뚜벅뚜벅 임무를 위해 걸어 나가는 사람들. 진한 동료애를 느끼고 있기에 말이 필요 없는 일체감 속에 상호 이해와 공감이 이루어지는 상황에서.
이 사람들은 자리에서 일어나 기지개를 켜고 요대 버클을 채울 것이다. 대위는 권총을 집어들 것이고, 술 취한 사람들은 술에서 깨어날 것이다. 그러고는 서두름 없이, 푸른 달빛 네모진 곳까지 완만하게 경사진 이 회랑을 모두가 걸어나갈 것이다. (P.272-27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