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칸초니에레 ㅣ 대우고전총서 61
프란체스코 페트라르카 지음, 김운찬 옮김 / 아카넷 / 2024년 9월
평점 :
다 읽는데 약 한 달 반이 걸렸다. 아무래도 운문이다 보니 무리해서 빨리 읽으려 하지 않고 하루에 열 편 정도를 목표했다. 소네트는 괜찮지만, 세스티나나 특히 칸초네가 있는 경우 한편으로 그치는 경우도 종종 있다. 소네트 317편, 칸초네 29편, 세스티나 9편, 발라드 7편, 마드리갈 4편, 총 366편이다.
이 책이 <칸초니에레>의 첫 독서는 아니다. 김효신 번역본 두 권은 1편부터 100편까지 순차적으로 수록하였다. 이상엽 번역본은 100편을 발췌하였다. 각기 장단점이 있다. 아쉬운 마음에 근년에 출판된 완역본을 무리하게 도전하였다. 이것은 또한 일련의 페트라르카 독서의 대단원이기도 하다.
완역본 독서에도 단점은 있다. 무엇보다도 지겨움이다. 거의 매 편 반복되는 라우라 타령에 정신이 아득할 정도다. 살아서도 라우라, 헤어져서도 라우라, 죽어서도 라우라. 라우라에게 366편을 계속 들려준다면 라우라가 아마도 도망가지 않을까. 그러면 장점은 무엇일까. 이전 세 권의 발췌본을 읽었을 때, 시인 자신의 표현대로 ‘단편적인 시들’ 또는 ‘흩어진 시들’이라는 의견에 기울었다. 이제는 다르다. 죽기 직전까지도 시인은 이 작품집의 새로운 편집에 몰두하였다고 하는 것처럼 시집에 수록된 각 시는 시인 자신이 심혈을 기울여 배치하였기에 내적 통일성을 지닌다.
내가 지금의 나와는 약간 달랐던 / 젊은 시절 초기의 혼란스러움에 / 내 심장을 채우던 탄식의 소리를 / 흩어진 시들에서 듣는 여러분, (P.13, 1편)
이 시집은 이른바 서문, 본문, 결문의 짜임새 있는 삼단 구조를 지닌다. 1편이 서문에 해당하며, 2부와 3부의 시들은 라우라 생전과 사후의 영원한 사랑을 노래한다. 3부 마지막 몇 편은 세속적 사랑을 뉘우치고 신에게 귀의하며 마친다. 이러한 구조적 특성은 완역본을 통해서만 명확하게 인식할 수 있다.
페트라르카는 <칸초니에레>에서 소네트가 주종이지만, 칸초네, 세스티나, 발라드, 마드리갈도 노래한다. 이렇게 다채로운 시 형식을 채택한 까닭은 무엇일까. 무엇보다 소네트의 정형화된 패턴의 단조로움을 흩뜨리는 효과가 있다. 내용상에서도 분명히 시 형식에 따른 차이가 있을 텐데, 소네트가 단시라면, 특히 칸초네는 장시이기에 소네트의 분량으로는 담을 수 없는 더욱 길고 깊은 사실과 감정을 표현할 수 있다. 여기서 한 가지 아쉬운 점은 다양한 시 형식에 대한 소개와 분석이 부족하다는 점이다. 옮긴이는 이 책의 독자가 이미 이탈리아 시에 대한 기초 지식이 있을 거라고 간주하는 듯하다.
언제나 타오르는 불꽃으로 내 심장 속에서 / 아무리 말해도 지치지 않게 하는 것은 / 바로 그 아름다운 눈이라오. (P.207, 75편)
대다수의 시는 라우라를 향한 절절하면서 불멸의 사랑을 노래한다. 그녀의 신체와 정신을 향한 거침없고 맹목적 사랑, 시인의 사랑을 거부하고 냉대하는 연인에 대한 복합적 감정과 그러함에도 어쩔 수 없는 사랑. 떨어져 있어 보지 못함에 절절한 그리움. 끝내 그녀가 죽었다는 소식으로 인한 처절한 슬픔과 눈물. 이제 천상의 존재가 되어서 시인을 위로하고 훗날 천상에서 영원한 결합을 동경하는 시구들.
나는 집요한 아픔을 끝내지 못하고 / 매일 더해지는 고통에 괴로워하니, / 이 욕망이 점점 더 커지는 가운데 / 벌써 십 년째 가까이에 이르렀고, / 누가 나를 풀어줄지 모르고 있답니다. (P.138, 50편, 칸초네)
마음속 연인이자 영원의 여인상인 라우라는 시인에게 현실이자 이상의 대상이다. 시인은 라우라를 처음 만난 날과 장소, 순간을 잊지 못하며 그로부터 주기적으로 기념일을 꼽는다, 심지어 라우라가 세상을 떠난 이후에도. 이걸 보면 순전한 상상과 설정이라고 간주하기 어렵다. 그렇다고 현실의 라우라가 그렇듯 평생에 걸쳐 불멸의 연인으로 지치지 않는 사랑과 찬미의 대상으로 남아 있을 거라는 것도 무리한 바람이다. 이미 이 단계에서 라우라는 이념적 존재로 승화되지 않았을까. 페트라르카는 연인의 이름을 함부로 직접 드러내지 않는다. 그녀의 이름과 동음어인 월계수, 산들바람으로 간접적으로 나타내거나 사랑, 여인, 원수 등의 표현으로 지칭할 따름이다.
아모르가 아폴로의 심장에 상처를 주었고, / 이제 자유를 되찾기에는 늦었을 만큼 / 나의 목에다 달콤한 멍에를 묶었던 / 그 푸른 월계수에 부는 하늘의 산들바람은 (P.476, 197편)
<칸초니에레>만 근거하면, 페트라르카는 평생을 라우라를 향한 일편단심의 사랑을 갈구하다 삶을 마친 것으로 알기 쉽다. 시인은 수도사 신분이었지만, 다른 여인을 통해 남매를 자식으로 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렇듯 예술과 현실은 같지 않으며, 라우라를 향한 이상만으로 세속적 삶을 온전히 꾸려나갈 수 없다. 이 시집을 비판적으로 감상하고 해독해야 하는 이유다.
제아무리 구구절절한 절창이라고 하더라도 라우라만 매번 읊조리면 독자는 금세 물려서 싫증을 내고 만다. 페트라르카의 구체적 삶을 들여다보더라도 그는 수도사이자 인문학자이며 애국자이다. 작품 해설에 따르면 대략 30편 정도는 다른 대상과 주제를 다루고 있는데, 우정, 이성, 종교, 정치 등이다. 당대 교회에 대한 비판은 물론 특히 이탈리아 정치 현실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과 뜨거운 애국심을 보여주는 대목을 자주 접할 수 있다. 훗날 마키아벨리가 유명한 저작에서 괜히 페트라르카를 인용한 게 아니다. 이렇게 이따금 다른 주제로 전환은 라우라와 사랑 일변도를 깨뜨리는 참신한 환기 효과도 지닌다.
자기 고통을 느끼지도 못하는 것처럼 / 늙고 게으르고 굼뜬 이탈리아는 / 영원히 잘 텐데, 깨울 사람이 없나요? / 내가 머리칼을 움켜잡을 수 있다면! (P.144, 53편, 칸초네)
정숙하고 겸손한 청빈으로 세워진 네가 / 너의 설립자들에 거슬러 뿔을 쳐드는구나, / 뻔뻔한 창녀여, 어디에다 희망을 두었느냐? (P.364, 138편)
세상을 떠난 라우라를 다시 만나기를 고대하는 시인의 염원이 통했을까. 이제 시인은 꿈속에서 자신을 찾아오는 라우라와 재회한다. 생전에는 그토록 냉대하던 여인은 이제 그를 다정하고 따스하게 대한다. 자신은 일찍 천상으로 돌아가지만, 시인은 아직 지상에서 해야 할 일이 많이 남아 있기에 좀 더 훗날에 다시 만날 수 있을 거라는 둥. 생전에 라우라가 시인에게 무정하고 냉대한 게 결국은 오히려 모두에 좋은 일이었으니, 두 사람이 영혼과 육신의 타락에 빠지지 않고 순결을 지닐 수 있게 되어 영원한 구원의 은혜를 입게 되었다는 둥. 시인의 공상은 지상을 넘어 천상을 향한다.
나는 울고, 그녀는 손으로 / 나의 얼굴을 닦아주고, 이어서 / 달콤하게 한숨을 쉬고, / 바위도 깨뜨릴 수 있는 말로 화를 내고, / 그런 다음 그녀는 떠나고, 잠이 깬다오. (P.777-778, 359편, 칸초네)
문득 시인은 각성한다, 수도사로서 본분을 자각한다. 세상과 우주의 무엇보다도 최우선으로 사랑하고 공경해야 할 하나님보다 라우라를 더 사랑한 자신의 죄악을 깨닫는다. 시인은 회개하고 신에게 자신을 구원해줄 것을 간청한다. 마지막 대단원의 칸초네는 참회의 시편이자 성모마리아를 위한 찬가이다. 각주와 작품 해설에서는 단테의 <신곡> 구성과 명시적 유사성을 언급한다.
아모르는 스물한 해 동안 불 속에서 즐겁고, / 고통 속에서 희망에 넘쳐 불타게 했고, / 여인과 저의 심장이 함께 하늘로 올라간 다음 / 다시 열 해 동안 울게 했습니다. (P.793, 364편)
당신의 아들, 진정한 사람이자 / 진정한 하느님께 부탁하시어, / 저의 마지막 정신을 평화 속에 받아들이게 해주소서. (P.803, 366편, 칸초네)
<칸초니에레>를 단순한 사랑 노래로 간주해도 좋다. 개별 시편은 사랑의 대상과 감정을 다양한 각도에서 조망하고 있기에 시 작품 개별의 감상을 깊이 음미해도 좋다. 이 경우 발췌본이 충분한 역할을 한다. 다만 전체로서 통일성과 체계성을 가진 시집 <칸초니에레>의 전모를 알려면 반드시 완역본을 접해야 한다. 완독의 고통은 따르겠지만, 시인이 평생에 걸쳐 추구하고 창작하고 배치에 심혈을 기울인 이유를 비로소 이해할 수 있어서다. 그것이 이 두툼한 완역본을 읽은 소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