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끄러움 비채 모던 앤 클래식 문학 Modern & Classic
아니 에르노 지음, 이재룡 옮김 / 비채 / 201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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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어느 일요일 정오가 지났을 무렵, 아버지는 어머니를 죽이려고 했다. (P.23)

 

작가 특유의 충격적인 문장으로 시작한다. 그런데 내용이 심상치 않다. 아버지가 어머니를 죽이려고 했다니, 이건 살인미수가 아닌가. 놀라운 점은 잠시 후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일가족이 근처에 산책하러 나갔다는 사실이다. 작가의 기억과는 달리 진짜로 아무 일도 아니었던 것인가. 아니면 분명 중대한 일임에도 불구하고 아무 일도 아닌 것처럼 가장하였단 말인가.

 

그런데 왜 아버지는 어머니를 죽이려고 했는가. 여기서 작가의 호기심과 의문점은 시작한다. 부부 사이는 사랑으로 맺어진 따뜻하고 아름다운 관계가 아니던가. 아니 그게 정말일까. 그게 사실이라면 아버지가 어머니를 죽이려는 행위는 애초에 나오지 말아야 하지 않았을까. 부부 나아가 가족관계의 의미는 무엇일까.

 

당시의 내 현실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나를 가두었던 환경, 학교, 가족, 시골 마을의 의미를 규정하는 동시에, 미처 그 모순을 눈치 채지 못했지만 내 삶을 좌우했던 법칙, 의식, 믿음, 가치를 찾아보는 것 외에 달리 확인할 길이 없다. (P.47)

 

<단순한 열정>에서 자신의 내면적 욕망과 열정을 노출했던 작가는 이제 다시금 자신의 과거와 가족으로 돌아온다. 열두 살 화자는 우선 우리 동네를 확인한다. 화자가 태어나 거의 벗어나 본 적이 없는 삶의 물리적 영역. 여기서 모두가 모두를 알며 누구나 친숙한 처지다. 반면 그렇게 여유롭고 세련된 삶의 양식은 아니기에 우리 동네와 우리 가족은 품위와는 담쌓고 지낸다. 세상 무엇보다 친근하고 허물없는 관계가 가족이지만, 최소한의 예의조차도 기대하기 힘들 정도로 그네들 행동은 거칠고 막무가내다. 화자는 솔직한 서술이 자체로 사회적 계급을 드러낼까 우려한다.

 

화자의 부모는 어린 딸을 사립학교로 보낸다. 그것은 우리 동네를 벗어난 다른 공간에 속하는 장소다. 부모는 자기 자식이 우리 동네에 갇혀서 안주하기를 원하지 않는다. 사립학교가 있는 지역, 사립학교에 다니는 아이들이 속한 사회적 계급의 일원이 되기를 희망한다. 그것은 곧 그들이 처해 있는 우리 동네가 사회 계급적으로 하위에 놓여 있음을 인식하고 있음이다. 어디 프랑스뿐이겠는가 많은 우리네 부모들도 자신들을 굶주리고 못 배웠지만 자식들은 잘나고 출세하기를 바라기에 허리띠를 꽉 졸라맸다.

 

화자가 사립학교 세상에 적응하고 충실할수록 우리 동네와는 멀어진다. 태어나면서부터 뼛속 깊이 새겨진 우리 동네의 관습과 사립학교 세상과는 완전 딴판이다. 거칠고 난폭한 언행 대신 고상하고 품위 있는 언행이 지배하는 곳, 종교와 교육이 구분되지 않는 종교학교가 갖는 강한 규율성과 윤리적 억압, 같은 학생임에도 모든 면에서 구별될 수밖에 없는 공립학교, 시골, 촌스러움에 대한 경멸적 인식 등. 화자는 이중적 삶을 잘 영위할 수 있었을까?

 

사립학교에서 나는 친구가 한 명도 없었던 것 같다. 누구의 집에도 가지 않았고, 누구도 우리 집에 오지 않았다. (P.106)

 

이 작품의 표제인 부끄러움은 어떻게 발생하였을까. 그것은 화자가 갖는 모순되고 이율배반적인 교육과 문화상 차이에서 비롯한다. 화자가 사립학교의 가치관을 깊이 체득할수록 우리 동네의 저열함이 한층 두드러지게 되고, 이는 곧 부끄러움으로 다가온다. 부끄러움은 도덕적 감정이다. 내가 설정한 높은 도덕적 목표와 현재의 낮은 도덕적 단계가 나타내는 격차가 클수록 부끄러움의 강도는 높아진다.

 

부끄러움 중에는 이런 것도 있다. 나에게는 어떤 일이든 일어날 수 있고, 결코 멈추지 않을 것이며, 부끄러움 뒤에는 오직 부끄러움만 따를 거라는 느낌. (P.121)

 

그 부끄러움은 근본적이며 영구히 지속되는 감정이다. 극적인 상황 변화가 생기지 않는 한, 아마 죽을 때까지 벗어나지 못할지도 모른다. 화자의 부모는 부끄러움을 느끼지 못한다. 그들의 삶은 오로지 우리 동네에만 속하기에 달리 비교군이 없다. 우리 동네에서는 부부가 상호 존중하지 않고 다투며 미워하는 게 드물지 않기에, 화가 치밀 때 죽이겠다는 액션도 전혀 생소하지 않다. 그것은 사회적 계급의 차이, 나아가 그것이 함의하는 정신적, 윤리적 차이를 명백히 확인해줄 따름이다.

 

부끄러움은 내 삶의 방식이 되었다. 아니, 더는 인식하지조차 못했다. 부끄러움이 몸에 배어버렸기 때문이다. (P.137)

 

화자의 부끄러움은 근원적이기에,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언급하는 부끄러움과는 질적으로 다르다. 수십 년이 지나서 중년이 훌쩍 지난 화자가 이 사건을 회상하면, 당시 어린 화자가 갖는 부끄러움과 같은 감정을 품게 된다. 이는 화자가 세월의 경과에도 불구하고 뚜렷이 구분되는 계급적 격차를 융화하지 못했음을 가리킨다. 도시인이자 부르주아가 된 그녀의 가슴 속에는 프롤레타리아의 소녀와 부모가 그대로 자리 잡고 사라지지 않았다는 사실. 화자는 그 분명하면서도 무시무시한 진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

 

그 후 그 일요일은 나와 이전의 나에 대한 모든 것 사이를 가르는 어떤 장막처럼 남게 되었다. 평소처럼 놀고 읽고 행동했지만 나는 건성으로 살았다. 모든 게 가식적으로 되었다. (P.28)

 

문학평론가 신수정이 쓴 작품 해설을 길지 않지만, 화자가 갖는 부끄러움의 모순된 실체를 다시금 명확히 짚어낸다. 화자는 우리 동네의 계급적 한계를 인식하고 부끄러움을 느끼며 이에서 벗어나고자 하였다. 이는 외견상 성공했지만 내면으로는 여전히 부끄러움에 얽매여 있다. 한편 옮긴이 해설은 독해에 꽤 유효한 정보를 제공해주는데, 1980년대에 거대 담론의 반작용으로 소시민과 내면의 탐색을 주로 하는 문학적 경향이 나타났고 아니 에르노의 작품이 나타나는 배경이 되었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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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순한 열정 (무선) -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99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99
아니 에르노 지음, 최정수 옮김 / 문학동네 / 201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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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표 당시에 상당한 논란을 일으킨 작품이다. 솔직히 잘 이해가 되지 않는다. 연하의 외국인 유부남과의 열정적 불륜 관계라는 게 문학에서 처음 다루는 것도 아닌데 말이다. 아예 대놓고 이건 허구야 했으면 별일 없을 텐데 작가는 언제나 자신이 경험한 내용만 글을 쓴다고 밝히는 게 문제다. 중년의 저명한 여류 작가가 자신의 체험담을 솔직하게 글로 남겼기에 시끄러웠던 셈이다.

 

아마도 이번 글쓰기는 이런 정사 장면이 불러일으키는 어떤 인상, 또는 고통, 당혹스러움, 그리고 도덕적 판단이 유보된 상태에 줄곧 매달리게 될 것 같다. (P.10)

 

에르노는 이미 자신의 과거와, 아버지와 어머니의 삶을 토대로 수 편의 작품을 썼다. 체험적 고백은 아무래도 작품세계의 외연이 제한될 수밖에 없다. 가족과 자신의 과거를 다루었으니 어쩌면 자신의 최근 삶을 글쓰기의 제재로 택함은 당연한 수순이 아니겠는가. 사람의 일생에서 가장 흥미진진하고 극적인 소재는 이성 간의 사랑이다. 작가는 독자에게 그 흥미로운 사건을 직접적인 목소리로 들려주는 셈이니 차라리 고마워해야 할 일이다.

 

나는 내 열정을 일일이 설명하고 싶지는 않다. 그것은 정당화되어야 할 실수나 무질서로 여겨질 수도 있다. 나는 다만 있는 그대로 보여주고 싶을 뿐이다. (P.27)

 

서로 간에 이성적으로 끌리지만 합법적 관계로 맺어질 수 없다면, 오히려 사랑의 열정은 더 절절하게 끓어오르기 마련이다. 이성과 지성을 갖춘 화자가 맹목적 열정에 사로잡혀 탐닉에 허우적거리는 모습은 낯설지만 드물지는 않다. 열병과도 같은 사랑은 반드시 청춘남녀에게만 허용된 증상은 아니다. 성취 가능성이 오히려 작기에 그네들의 열정은 한층 뜨거울 수 있다. 본능 앞에서 문명의 가면은 힘없이 벗겨져 사라진다. 적어도 유형을 불문하고 도덕과 윤리를 논외로 한다면, 사랑 자체의 절대성은 누구도 부정하지 못한다.

 

나는 이 남자와 함께 침대에서 보낸 오후 한나절의 뜨거운 순간이, 아이를 갖는 일이나 대회에서 입상하는 일, 혹은 멀리 여행을 떠나는 일보다 내 인생에서 훨씬 중요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P.16)

 

연인에게서 언제 연락이 올까 노심초사하면서 전전긍긍하는 화자는 많은 연인의 공통적 태도다. 연인과 함께 지내는 달콤하고 뜨거운 시간은 무엇보다 중차대한 의미를 지니면서도 어찌 그리 빠르게 지나가는지 안타까울 정도 아닌가. 내가 그를 그리워하는 만큼 그도 나를 그리워하는지 장담할 수 없기에 더욱 안절부절못하는, 그러기에 사랑에 빠진 사람은 절대 을의 지위에 놓일 수밖에 없는 건 만고불변의 진리라고 하겠다. 여기서 연인의 성적인 흥분은 육체적 매력과 욕망의 증거로서 자부심을 느끼게 하는 특성이다.

 

뜨겁게 불타올랐던 만큼이나 빠르게 열정은 식기 마련이다. 훗날 그때를 되돌아보면 왜 그리 앞뒤 안 가리고 맹렬하게 질주하였을까 의아할 정도다. 영원한 관계로 발전되었다면 굳이 이런 회상이 필요 없으며, 단기적 열정에 그쳤다면 일순간의 추억으로 묻혀버리고 만다. 서로 간에 더는 미련이 남아 있지 않다면 아득한 상념에 희미해진 인상으로 남아 있게 마련이지만, 어쩔 수 없는 연유로 불가피하게 헤어지게 되었다면 애틋한 마음은 두고두고 마음 밑바닥에 차곡차곡 쌓여서 이따금 이는 바람에 뒤숭숭하게 흩날리지 않겠는가. 실연의 괴로움으로 울고불고하면서 기나긴 시간을 자학하면서 보내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가. 화자 또한 마찬가지다. 눈을 뜨나 감으나 오직 연인의 모습만 눈앞에 아른거릴 뿐이다.

 

날이 밝아도 일어나고 싶지가 않았다. 아무런 계획이 없는 무의미한 하루가 내 앞에 버티고 있었다. 시간은 더 이상 나를 의미 있는 곳으로 이끌어주지 못했다. 단지 나를 늙게 할 뿐이었다. (P.47)

 

화자의 열정을 비난하지 말자, 폄훼하지 말자. 이 단순한 열정 덕택에 중년의 화자는 누구보다 풍요롭고 사치스러운 삶의 한순간을 누리고 지킬 수 있게 되었으니. 그에 대한 비난은 오히려 헐벗고 빈곤한 우리네의 열등감의 소산이자 시샘이라고 하겠다.

 

인간은 망각의 존재이기에 아쉬움도 있는 반면 덕분에 유용한 측면도 많다. 어느덧 시간이 흐르면 아련한 추억 속에 잠기며 당시의 열정은 당혹스러운 감정으로 다가오게 되는 순간이 있다. 저도 모르게 얼굴이 달아오르거나 자다가도 이불킥을 하는 때가 오지 않으리라고 누가 장담할 수 있겠는가. 화자 역시 놀람과 부끄러움으로 당시를 회상하지만, 당당하다. 그것은 자신의 감정과 충동에 대한 전적인 솔직함에 기인함이다. 그것이 작가가 굳이 비난을 각오하면서도 과거의 단순한 열정을 가감 없이 토로하는 까닭이 아니겠는가.

 

나는 한 사람이 어떤 일에 대해 얼마만큼 솔직하게 말할 수 있는지도 알게 되었다. 숭고하고 치명적이기까지 한 욕망, 위엄 따위는 없는 부재, 다른 사람들이 그랬다면 무분별하다고 생각했을 신념과 행동, 나는 이 모든 것들을 스스럼없이 행했다. (P.66)

 

중편에 해당하는 짧은 작품이다. 뭔가 짜릿하고 자극적인 대목을 기대했다면 실망하였을 독자도 제법 있으리라. 본격문학과 대중문학의 경계, 예술과 포르노의 구분되는 지점이다. 소재를 달리하지만 아니 에르노의 문학적 특징은 여기서도 명확하다. 고백적이며 회상적 성격, 체험과 경험에 기반한 글쓰기, 평이하며 서술적인 문장, 보기 드문 여백의 미의 활용, 그리고 작가의 자기 비판적 태도 등등. 작품해설에서는 정체성의 파괴라는 다소 부정적 인식을 하고 있다. 사랑이 인간성의 내밀한 본성이라고 하면, 그것은 내면의 발현이기에 오히려 외피의 허위를 벗기는 순수함과 솔직함으로 수용하는 게 옳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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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연명 : 아벨 콰르텟 베토벤 현악사중주 전곡연주 3

일시 : 2025년 11월 21일(금) 19:30

장소 : 예술의전당 IBK기업은행챔버홀

연주 : 아벨 콰르텟

  - 윤은솔 (바이올린)

  - 박수현 (바이올린)

  - 박하문 (비올라)

  - 조형준 (첼로)

프로그램

  - 베토벤, 현악사중주 3번 D장조 Op.18-3

  - 베토벤, 현악사중주 9번 C장조 Op.59-3 '라주모프스키 3번'

  - 베토벤, 현악사중주 15번 A단조 Op.132


* 세줄평

첫곡 3번이 예열이었다면, 9번 2악장에서 문득 좋다라는 느낌이 들었다. 전범인 부다페스트 콰르텟과는 전혀 다른 아름다운 섬세함이 스며든다. 압권은 15번곡이다. 진부하지만 연주자간 완벽에 가까운 호흡, 제1 바이올린의 가냘프면서도 기도하는 듯한 울림. 깊은 여운은 2악장이 이대로 계속 이어졌으면 하는 바람마저도 들 정도다. 음악회에서 이처럼 감동을 받는 연주를 경험하기란 드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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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연명 : 박옥주가 그리는 오르간 세상 16 - Romance & Byzantin

일시 : 2025년 11월 19일(수) 19:30

장소 : 대한성공회 서울주교좌성당

연주 : 박옥주 (오르간)

프로그램

  - 앙리 뮐레, 비잔틴 스케치 [전10곡]


* 세줄평

성공회 성당은 처음 와본다. 로마네스크 양식이라 특색 있고, 정면에 모자이크 성화가 눈길을 사로잡는다. 오르간은 회중석 뒤편 발코니에 위치하는데, 연주 감상하기에는 다소 불편하다. 청중 대부분이 의자를 반대로 돌려서 감상한다. 뮐레라는 작곡가와 작품이 워낙 생소하기에 사전 학습과 음원 청취를 해봤는데, 성당에서 울리는 오르간 사운드는 오디오와 확실히 차별된다. 공간을 풍요롭게 감싸울리는 음향이야말로 오르간의 최고 미덕이 아닐까. 작고 섬세함과 크고 웅장함을 자유자재로 오가는 곡의 전개도 흥미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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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여자
아니 에르노 지음, 정혜용 옮김 / 열린책들 / 201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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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에는 어머니 얘기다. 딸의 관점에서 아버지와 어머니를 회상하고 추억하는 내용과 방향은 같지 않다. 아버지는 화자의 이십 대에 세상을 떠났으니 화자 개인은 물론 가족과 추억이 상대적으로 빈약하다. 더하여 부녀간은 결국 성 차이에 비롯하는 이해의 한계에 봉착한다. 어머니는 화자가 사십 대에 죽음을 맞이하였으니 인생의 여러 국면을 경험한 화자에게는 더욱 할 말이 많을 수밖에 없다. 더하여 모녀간은 가까웠다 멀어졌다 하지만 종국에는 이해와 화해가 불가피한 관계가 아니던가.

 

아들은 아버지와 불화하고 멀어지지만 나이 들어서는 자신이 결국 아버지와 별 차이가 없음을 발견한다. 딸도 어머니와 마찬가지다. 자신은 어머니처럼 살지 않겠다고 벼르지만 뒤돌아보면 자신에게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사람이며, 자신이 가장 닮은 사람이 어머니다. 자식은 부모와 애증이 뒤섞인 유전 공동체다.

 

나는 울기 시작했다. 그녀가 나의 어머니였기 때문에, 내 유년기의 그 여자와 같은 여자였기 때문이었다. (P.99)

 

화자에게 어머니가 더욱 가슴 치밀게 다가오는 까닭은 그녀가 늙고 병들어 쇠약해져 죽음을 맞이하는 과정을 화자가 오롯이 경험해서다. 아버지의 죽음 후 카페 겸 식료품점을 닫고 딸네 집에서 살다가 떨어져 지내기를 반복한 어머니는 좁지만 단칸 아파트에서 홀로 살아간다. 이대로 편안히 살다가 임종을 맞으면 좋으련만 어머니는 알츠하이머병에 걸린다.

 

노인들의 뇌가 서서히 쪼그라들면서 언어와 사고, 행동을 비롯한 온갖 뇌 기능이 조금씩 삐걱거리다가 끝내 결말에 이르는. 당사자는 오히려 인지하지 못하지만 가족과 자식에게는 씻을 수 없는 슬픔과 고통을 안겨주는 불치병. 살아 있느니 차라리 죽는 편이 모두에게 좋을 것으로 인정받는 서글픈 병. 화자는 비로소 어머니의 죽음을 피부로 느끼기 시작한다.

 

이것은 전기도, 물론 소설도 아니다. 문학과 사회학, 그리고 역사 사이에 존재하는 그 무엇이리라. (P.110)

 

화자에게 어머니의 삶 전체를 돌아보고 기술하고 묘사하는 과정은 문학적 치장이 아니다. 원초적 본능으로 연결된 감각을 최대한 억누르면서 개인적 감정을 배제하며 화자는 어머니에 대해 서술한다. 우리는 소설로 읽지만, 화자는 이 글을 소설로 간주하지 않는다. 소설의 허구성과 장식성이 부재한다면 어찌 소설이라 부를 수 있겠는가. 작품 속 어머니는 자상하고 부드러운 모성애로 가득한 어머니상과는 전혀 다르다. 훈육에서 폭력을 주저하지 않으며, 애정 발현과 지배 욕망 사이를 넘나들며, 자식은 통제하려 한다. 손님을 대할 때 어머니의 위선적 연기 장면을 서술하는 화자의 회상은 냉철하기조차 하다.

 

화자가 전작에서부터 보여 준 현실 비상의 꿈과 의지는 확실히 아버지보다 어머니의 영향을 깊게 물려받은 듯하다. 어린 시절부터 나타난 격렬한 의지와 현실 안주에 대한 강렬한 거부는 비록 자신은 성공하지 못하였지만, 자식이라도 탈출시키기 위한 맹목적 열망으로 분출하였고 화자가 사립학교에 이어 대학에 진학할 수 있는 기반이 되었다. 비록 화자는 중산계층에 다가갈수록 부모가 가진 저열한 하층계급의 속성에 진저리치지만 말이다. 자신의 몸과 머리에 밴 저속함을 떨쳐내기 위한 몸부림이라고 할 정도로.

 

다른 세계로 옮겨 가고 있는 나는 내가 더 이상 보여 주고 싶지 않은 모습이 여전히 내 모습인 것에 대해서 어머니를 원망했다. (P.63)

 

자식은 부모의 청춘 시기를 알지 못한다. 활기차고 생명력이 분출하고 꽃다운 시절의 아버지와 어머니는 사고의 범위를 벗어난다. 어릴 때는 한없이 크고 높은 사람, 청소년 때는 자신을 억압하는 그래서 저항하고 언젠가 극복해야 할 기성세대, 중장년이 되어서는 어느덧 늙고 쇠약해져 보살핌의 대상이 되어버린 사람.

 

나이 들어 노망난 여자와 젊어서 힘차고 빛이 났던 여자를 글쓰기를 통해 합쳐 놓지 않고서는 내가 살아갈 수 없으리라는 것을 알고 있다. (P.92)

 

한순간의 단면으로 인생을 깨닫거나 설명할 수 있다면 차라리 오만에 가깝다. 삶은 불가해한 것이며, 제각기 다르기에 섣부른 예단과 추측을 거부한다. 화자가 전작의 아버지와 여기의 어머니를 각각 대상으로 하여 전기와 행장에 가까운 글쓰기를 시도하는 까닭은 무엇일까. 아마도 부모의 삶을 온전하게 복원하면서 우리가 미처 알지 못하고 놓쳐버린 삶의 전일성을 발견하기 위한 노력일지 모른다.

 

여자가 된 지금의 나와 아이였던 과거의 나를 이어 줬던 것은 바로 어머니, 그녀의 말, 그녀의 손, 그녀의 몸짓, 그녀만의 웃는 방식, 걷는 방식이다. 나는 내가 태어난 세계와의 마지막 연결 고리를 잃어버렸다. (P.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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