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순한 열정 (무선) -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99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99
아니 에르노 지음, 최정수 옮김 / 문학동네 / 201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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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표 당시에 상당한 논란을 일으킨 작품이다. 솔직히 잘 이해가 되지 않는다. 연하의 외국인 유부남과의 열정적 불륜 관계라는 게 문학에서 처음 다루는 것도 아닌데 말이다. 아예 대놓고 이건 허구야 했으면 별일 없을 텐데 작가는 언제나 자신이 경험한 내용만 글을 쓴다고 밝히는 게 문제다. 중년의 저명한 여류 작가가 자신의 체험담을 솔직하게 글로 남겼기에 시끄러웠던 셈이다.

 

아마도 이번 글쓰기는 이런 정사 장면이 불러일으키는 어떤 인상, 또는 고통, 당혹스러움, 그리고 도덕적 판단이 유보된 상태에 줄곧 매달리게 될 것 같다. (P.10)

 

에르노는 이미 자신의 과거와, 아버지와 어머니의 삶을 토대로 수 편의 작품을 썼다. 체험적 고백은 아무래도 작품세계의 외연이 제한될 수밖에 없다. 가족과 자신의 과거를 다루었으니 어쩌면 자신의 최근 삶을 글쓰기의 제재로 택함은 당연한 수순이 아니겠는가. 사람의 일생에서 가장 흥미진진하고 극적인 소재는 이성 간의 사랑이다. 작가는 독자에게 그 흥미로운 사건을 직접적인 목소리로 들려주는 셈이니 차라리 고마워해야 할 일이다.

 

나는 내 열정을 일일이 설명하고 싶지는 않다. 그것은 정당화되어야 할 실수나 무질서로 여겨질 수도 있다. 나는 다만 있는 그대로 보여주고 싶을 뿐이다. (P.27)

 

서로 간에 이성적으로 끌리지만 합법적 관계로 맺어질 수 없다면, 오히려 사랑의 열정은 더 절절하게 끓어오르기 마련이다. 이성과 지성을 갖춘 화자가 맹목적 열정에 사로잡혀 탐닉에 허우적거리는 모습은 낯설지만 드물지는 않다. 열병과도 같은 사랑은 반드시 청춘남녀에게만 허용된 증상은 아니다. 성취 가능성이 오히려 작기에 그네들의 열정은 한층 뜨거울 수 있다. 본능 앞에서 문명의 가면은 힘없이 벗겨져 사라진다. 적어도 유형을 불문하고 도덕과 윤리를 논외로 한다면, 사랑 자체의 절대성은 누구도 부정하지 못한다.

 

나는 이 남자와 함께 침대에서 보낸 오후 한나절의 뜨거운 순간이, 아이를 갖는 일이나 대회에서 입상하는 일, 혹은 멀리 여행을 떠나는 일보다 내 인생에서 훨씬 중요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P.16)

 

연인에게서 언제 연락이 올까 노심초사하면서 전전긍긍하는 화자는 많은 연인의 공통적 태도다. 연인과 함께 지내는 달콤하고 뜨거운 시간은 무엇보다 중차대한 의미를 지니면서도 어찌 그리 빠르게 지나가는지 안타까울 정도 아닌가. 내가 그를 그리워하는 만큼 그도 나를 그리워하는지 장담할 수 없기에 더욱 안절부절못하는, 그러기에 사랑에 빠진 사람은 절대 을의 지위에 놓일 수밖에 없는 건 만고불변의 진리라고 하겠다. 여기서 연인의 성적인 흥분은 육체적 매력과 욕망의 증거로서 자부심을 느끼게 하는 특성이다.

 

뜨겁게 불타올랐던 만큼이나 빠르게 열정은 식기 마련이다. 훗날 그때를 되돌아보면 왜 그리 앞뒤 안 가리고 맹렬하게 질주하였을까 의아할 정도다. 영원한 관계로 발전되었다면 굳이 이런 회상이 필요 없으며, 단기적 열정에 그쳤다면 일순간의 추억으로 묻혀버리고 만다. 서로 간에 더는 미련이 남아 있지 않다면 아득한 상념에 희미해진 인상으로 남아 있게 마련이지만, 어쩔 수 없는 연유로 불가피하게 헤어지게 되었다면 애틋한 마음은 두고두고 마음 밑바닥에 차곡차곡 쌓여서 이따금 이는 바람에 뒤숭숭하게 흩날리지 않겠는가. 실연의 괴로움으로 울고불고하면서 기나긴 시간을 자학하면서 보내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가. 화자 또한 마찬가지다. 눈을 뜨나 감으나 오직 연인의 모습만 눈앞에 아른거릴 뿐이다.

 

날이 밝아도 일어나고 싶지가 않았다. 아무런 계획이 없는 무의미한 하루가 내 앞에 버티고 있었다. 시간은 더 이상 나를 의미 있는 곳으로 이끌어주지 못했다. 단지 나를 늙게 할 뿐이었다. (P.47)

 

화자의 열정을 비난하지 말자, 폄훼하지 말자. 이 단순한 열정 덕택에 중년의 화자는 누구보다 풍요롭고 사치스러운 삶의 한순간을 누리고 지킬 수 있게 되었으니. 그에 대한 비난은 오히려 헐벗고 빈곤한 우리네의 열등감의 소산이자 시샘이라고 하겠다.

 

인간은 망각의 존재이기에 아쉬움도 있는 반면 덕분에 유용한 측면도 많다. 어느덧 시간이 흐르면 아련한 추억 속에 잠기며 당시의 열정은 당혹스러운 감정으로 다가오게 되는 순간이 있다. 저도 모르게 얼굴이 달아오르거나 자다가도 이불킥을 하는 때가 오지 않으리라고 누가 장담할 수 있겠는가. 화자 역시 놀람과 부끄러움으로 당시를 회상하지만, 당당하다. 그것은 자신의 감정과 충동에 대한 전적인 솔직함에 기인함이다. 그것이 작가가 굳이 비난을 각오하면서도 과거의 단순한 열정을 가감 없이 토로하는 까닭이 아니겠는가.

 

나는 한 사람이 어떤 일에 대해 얼마만큼 솔직하게 말할 수 있는지도 알게 되었다. 숭고하고 치명적이기까지 한 욕망, 위엄 따위는 없는 부재, 다른 사람들이 그랬다면 무분별하다고 생각했을 신념과 행동, 나는 이 모든 것들을 스스럼없이 행했다. (P.66)

 

중편에 해당하는 짧은 작품이다. 뭔가 짜릿하고 자극적인 대목을 기대했다면 실망하였을 독자도 제법 있으리라. 본격문학과 대중문학의 경계, 예술과 포르노의 구분되는 지점이다. 소재를 달리하지만 아니 에르노의 문학적 특징은 여기서도 명확하다. 고백적이며 회상적 성격, 체험과 경험에 기반한 글쓰기, 평이하며 서술적인 문장, 보기 드문 여백의 미의 활용, 그리고 작가의 자기 비판적 태도 등등. 작품해설에서는 정체성의 파괴라는 다소 부정적 인식을 하고 있다. 사랑이 인간성의 내밀한 본성이라고 하면, 그것은 내면의 발현이기에 오히려 외피의 허위를 벗기는 순수함과 솔직함으로 수용하는 게 옳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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