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련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86
아서 밀러 지음, 최영 옮김 / 민음사 / 201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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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나라한 진실은 정면으로 마주하고 싶지 않아 때로는 외면하고픈 마음도 들 때가 있다. 그것이 익히 알려진 사실이라 하더라도. 이 희곡을 읽는 내 심정이 꼭 이러했다. 17세기 광기와 공포에 사로잡혀 비인간적인 행위들이 사회의 정당한 권위에 올라타고 인간성과 이성을 무참히 압살하던 역사적 기록. 훗날 우리는 이를 마녀재판이라 칭하며 이를 주도했던 당대 사회와 인물, 특히 종교에 대하여 관용적일 수 없다.

 

역사의 진보를 굳건히 믿는 사람들에게 17세기의 마녀재판과 20세기 중반의 매카시즘은 비이성적 광기의 발현이라는 점에서 회의감마저 들게 한다. 그것이 종교와 이데올로기의 외투를 차용했지만 본질은 동일하다. 개인적 목적을 위해 조장한 공포의 위협과 광기로의 확산은 그 주장이 갖는 터무니없는 불합리성을 건드리지 못한 채 해일처럼 사회를 휩쓸어 무수한 피해자를 양산하였다.

 

작가는 질문한다. , 무엇 때문에 이런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어처구니없는 사건이 발생하였는가? 사회의 지도층이라고 불리는 종교계, 재계의 인물들은 어떻게 정치적, 개인적 이익 달성을 위해 이러한 광기를 심화하고 유포하는데 이바지하였는가? 여기서 작가는 특유의 희곡적 기법을 일체 사용하지 않고 오로지 정공법으로 서사와 대사의 힘으로 극의 강력한 전개를 밀어붙인다. 압박감에 숨이 막힐 정도이지만 독자는 결코 책장을 덮지 못한다.

 

퍼트넘, 애비게일, 패리스 등이 사적 이익을 위해 악마와 마녀의 출몰을 주장하고 인정하는 반면 헤일 목사는 순수한 신앙의 차원이다. 신앙인으로서 그의 자세는 한치의 허물도 탓할 수 없다. 레베카와 프록터에 대한 사례를 통해 그의 확고한 신념은 금이 가고 마침내 그는 마녀재판이 전적으로 오류임을 깨닫지만 자신의 힘으로 되돌리기에는 이미 너무 늦었다. 그의 유일한 잘못은 초기에 악마의 존재에 대한 지나친 경도로 사건의 실상을 파악하지 못했다는 점이리라. 그의 과도한 순수성 내지 순진성을 비판할 수밖에. 그것이 악용되면 광기로 전환되기 쉬우므로.

 

(헤일) 그들은 자백을 했습니다.

(프록터) 부인하면 교수형에 처해질 판인데 왜 자백하지 않겠습니까? 교수형을 당하지 않으려고 무엇이나 맹세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 생각은 해 보지 않으셨습니까? (P.106)

 

(헤일) 저는 법정에서 너무나도 많은 무서운 증거들을 보았습니다. 악마가 세일럼에 살아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고발하는 손길이 가리키는 곳이면 어디든지 감히 겁내지 말고 쫓아가야만 합니다! (P.110)

 

극의 주인공은 프록터다. 작가의 긍정적 소개 글을 통해서도 그가 견실한 농부인 동시에 비판적 신앙인임을 알 수 있다. 드물게 보는 지성인인 그조차도 애비게일과의 관계에서 약점을 지녔으니 완전한 인간은 없기 때문이다. 결국 애비게일로부터 파문은 비롯된다.

 

악마의 수하로 지목당한 사람들의 선택 대안은 두 가지다. 악마와 거래했음을 인정하고 회개하면 목숨은 유지할 수 있다. 이때 당사자는 다른 악마의 수하를 지목해야 한다. 거래를 부정하고 자신의 신앙적 올곧음을 주장한다면 그는 교수형을 모면할 수 없다. 양심과 생명 사이에서 중차대한 결정을 내려야 한다. 이것이 독자들 자신에게 닥친 현실이라면? 그래서 우리는 프록터의 고뇌와 갈등에 공감하며, 그와 아내의 엇갈린 증언에 탄식을 금하지 못하는 것이다. 프록터가 끝끝내 자신의 이름을 포기하지 못하며 형장의 북소리와 함께 사라짐에 대해서도.

 

미국에서는 보수적인 견해의 소유자가 아니라면 붉은 지옥과 동맹을 맺고 있다는 비난을 공공연히 받게 된다......정치적인 정책은 도덕적 권리와 동급이고, 그걸 반대하는 것은 악마적인 악의와 동급이 된다. 일단 이 같은 등식이 효과적으로 맺어지면, 사회는 책략과 대항의 집적으로 변하며, 정부의 주된 역할은 중재자에서 하느님의 응징으로 바뀐다. (P.56-57)

 

악마와 마녀는 종교의 영역이다. 정치와 법정이 종교에 개입한다면 남아날 존재가 없다. 종교와 얽혀진 수많은 역사적 사건들이 이를 예증한다. 오늘날 우리는 이를 당연시하며 우매한 옛사람들을 손가락질한다. 잘못된 마녀재판을 중단할 권한과 때를 지닌 유일한 인물이 부지사 댄포스다. 헤일 목사를 비롯한 다른 사람처럼 그도 오해와 착오를 범하였지만 진실의 그림자를 접하였으면서도 자신의 과오를 인정하길 거부한다. 그것은 자신의 정치적 몰락을 의미하므로. 정치적 인간은 냉혹하다. 자신을 정당화하기 위해서라면 많은 무고한 생명을 희생시킬 용의를 갖고 있다. 헤일 목사의 절절한 호소조차도 그를 설득하지 못한다. 세일럼의 비극이 절정으로 치닫게 된 원인이다.

 

(댄포스) 지금 연기한다는 것은 내가 실수했다는 것을 시인하는 게 되오. 형 집행의 연기나 사면은 지금까지 죽은 자들의 죄에 의혹을 일으킬 것이오......나는 감히 법에 대항해서 반기를 드는 자들은 만 명이라도 교수형에 처하겠으며, 짠 눈물이 바다를 이루어도 법의 결정을 녹일 수는 없다는 것을. (P.190)

 

세일럼의 마녀재판으로 대변되는 광기는 완전히 소멸했을까? 우리는 쉽사리 긍정적인 대답을 내놓을 수 없다. 세계적으로 보면 중동과 이슬람 지역의 종교분쟁이 여전하다. 이데올로기는 어떠한가? 공산주의 몰락으로 과거와 같은 대대적인 매카시즘 선풍은 사라졌다고 하지만, 이데올로기는 바이러스처럼 지속적으로 변형하고 있어 언제 또 다른 위협으로 다가올지 모른다. 마지막 책장을 덮는 우리네 심정은 결코 편치 못하다. 세일럼은 과거형이 아니라는 사실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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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르간산을 내려가다가 현대희곡선 3
아더 밀러 / 현대미학사 / 199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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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먼의 이중 결혼생활을 향한 의견은 성별과 가치관에 따라 다르게 나타날 수 있다. 대다수의 건전한 이성을 지닌 남성과 여성이라면 라이먼의 비도덕성에 대한 맹렬한 적개심을 드러낼 것이다. 결혼의 신성한 서약을 송두리째 뒤집은 그는 지옥에 떨어져야 마땅하다. 아무것도 모른 채 라이먼에게 깜빡 속은 두 부인과 자녀들에 대해 무한한 동정심을 표한다. 극소수의 일부 몰지각한 남성들은 꿈꾸지만 차마 실행하지 못한 욕망을 감히 행동에 옮긴 라이먼의 용기에 갈채를 보내며 딱한 처지에 놓인 그에게 안타까운 마음을 표한다.

 

(라이먼) 솔직히 자네 같은 일부일처주의자들이 반드시 행복하다고는 믿지를 않았어. 데오와 함께 있으면 나 자신이 불행하다는 걸 알 수 있다구. 데오도 행복할 리가 없어. (P.35)

 

일부일처제로 대변되는 결혼제도의 가치를 옹호하는 이의 관점에서 라이먼의 행위는 충격적이다. 외견상 화목하고 평화로우며 부러움을 살만한 모범적인 부부와 가족에게서 라이먼은 무슨 불만과 부족을 지녔단 말인가? 일순간의 흔들림이 있었더라도 잘못을 깨닫고 리와의 관계를 정리한 후 데오에게 돌아오는 게 순리가 아닌가 등등. 독자는 라이먼과 데오의 대사를 통해 완벽하게 보이는 부부관계에서조차 미묘한 흠결이 상존함을 발견한다.

 

사랑하면서도 관계에 의한 흠결을 가슴에 담고 살아나가는 게 대다수의 부부다. 중혼 기간 동안 라이먼과 두 부인과의 관계는 돈독하고 오히려 행복했다는 사실을 그녀들도 부인하지 못한다. 데오의 남편 라이먼과 리가 아는 라이먼은 같지만 다른 인물이다. 경비행기를 몰고 스포츠카를 질주하는 라이먼의 모습을 데오는 상상조차 할 수 없다.

 

() 자네 바라는 게 뭐야?

(라이먼) 내 평생의 소망은 두 여자였어. (P.87)

 

비록 한구석으로 자유와 일탈을 희망하더라도 그건 어디까지나 찰나의 꿈에 불과하다. 라이먼은 다르다, 자신의 바람과 감정을 솔직히 표현한다는 점에서. 라이먼은 도덕적으로 타락한 남성이 아닌 보편적 남성의 숨겨진 욕망을 대변하는 전형에 가깝다.

 

병실에 누워 꿈과 현실을 오가며 라이먼은 자신과 데오 간의 숨겨진 결혼생활의 이면을 독자에게 드러낸다. 모두가 궁금해할 데오와의 이혼을 감행하지 않게 된 사유도. 이 과정에서 라이먼은 불리할 때면 깁스한 몸속으로 숨어들며 어떻게든 자신의 정당성을 옹호하고 두 부인과의 관계도 유지하길 원한다. 역자 후기에도 나와 있듯 작가는 공간과 시간을 넘나들기 위한 기법으로 플래시 백 기교를 사용하여 실제 장소는 병실 한 군데이지만 극 중 스펙트럼은 뉴욕에서부터 아프리카까지 광활하게 십 년여에 걸쳐 펼쳐진다.

 

라이먼의 온갖 호소와 노력에도 두 부인은 그의 곁을 떠난다. 언론에 대서특필된 마당에 그녀들이 피해자로서 대중적 동정심 유지 및 자신의 도덕적 자존감을 지키려면 다른 방안이 없으리라. 데오의 내심은 그를 용서하고 받아들이고자 하지만 베시를 비롯한 현실이 이를 용납하지 못한다. 리는 자신이 법률상 부인이 아니라는 사실 자체에서 그를 떠날 명분이 충분하다. 데오가 비판했듯이, 그녀와 라이먼의 관계는 애당초 정당성과는 거리가 멀게 시작하였다. 이렇게 작품은 부도덕한 라이먼의 심신이 파탄 나는 것으로 끝나는 방향으로 진행된다.

 

(라이먼) 그러나 이 말을 꼭 해야겠어 비참하고 슬픈 내 영혼은 마음 한 구석에서 외치고 있어. 왜 내가 비난받아 마땅한지를 말이야. (P.138)

 

라이먼과 작가는 이렇게 끝낼 마음이 추호도 없다, 라이먼의 항변처럼. 법률과 도덕의 허울을 벗어던지면 라이먼은 거짓 없이 솔직하다. 일부일처제의 부부관계에서 얼마나 부도덕한 행위와 사건들이 자행되는지는 새삼스럽지 않다. 우리네 과거사로 돌아갈 필요도 없이 전 세계의 많은 지역에서 여전히 일부다처제가 허용되고 있다는 점 또한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즉 일부일처제는 신성불가침한 하늘의 윤리원칙이 아니다.

 

중혼 생활이 드러나고 부인들이 떠나가 외톨이가 된 처지이지만 라이먼의 꿈은 결코 스러지지 않는다. 병실에는 아직 새로운 여인이 남아있다. 간호사! 본능의 질주를 향한 수컷의 억제 불가능한 맹렬한 기세. 마지막 장면서 라이먼의 얼굴에는 놀람과 욕망이 드러나며 그의 입은 기적을 외친다. 꿈이 현실로 전환될 수 있다고 그는 굳게 믿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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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리위에서 바라본 풍경
아더 밀러 지음, 이한섭 옮김 / 예니 / 198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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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이 작품의 서문 격인 제법 장문의 <사회극에 대하여>가 부록으로 권말에 수록되어 있는 데서 알 수 있듯이 작가는 이 희곡을 사회극으로 규정한다. 이에 따르면 작가는 개인과 사회[폴리스]가 분리되지 않는 고대 그리스 연극을 이상으로 삼아서 사회적 동물로서의 인간을 연극이 주 대상으로 삼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새로운 연극은 희랍적이어야 할 것이며 이렇게 됨으로서 연극은 인간을 사회적 동물로 대하고 과거의 연극의 그 자잘구레한 편파성에 말려들지 않을 수 있는 것이다. (P.95)

 

작가는 일개 날품팔이 노동자인 에디에게 비극적 영웅의 면모를 부여한다. 본디 선하고 좋은 사람인 에디는 피할 수 없는 운명에 의해 잘못된 선택을 하게 되고, 자신의 비극적 운명을 회피하지 않고 당당하게 맞선다. 그러기에 독자는 에디 카본을 차마 비난할 수 없고 다만 그의 피할 수 없는 운명의 맹목성을 안타까워할 뿐이다. 변호사 알피에리가 말미에 토로하듯이.

 

(알피에리) 에디가 얼마나 잘못했고 그의 죽음이 얼마나 무익한 것이었는지를 잘 알면서도 또한 그의 순수성을 추억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는 적어도 자신에 관한 진실을 밝히고 죽어간 것입니다. (P.78)

 

작중에서 에디의 사고와 행동을 관통하는 두 가지 이슈가 있다. 먼저 애정과 욕망의 문제. 조카딸 캐더린을 향한 에디의 사랑을 아내와 알피에리는 근친상간적 욕망이라고 해석한다. 베아트리스는 특히 예민하게 인식한다. 하지만 캐더린의 장래와 결혼에 대해 에디가 유달리 까다롭게 구는 것을 성적 욕망의 투영이라고 해석하는 게 올바른지 모르겠다. 깊이 사랑하는 딸에 대한 아버지들의 집착에 가까운 사랑이 있는 게 사실이다. 만약 캐더린이 조카딸이 아닌 친딸이라고 할 때도 이런 해석이 유효한지 궁금하다.

 

다음으로 관습과 법률의 문제. 캐더린과 결혼하려는 로돌포의 의도를 의심하는 에디에게, 밀입국자를 밀고한 에디의 행위를 규탄하는 마르코에게 알피에리는 동일한 대답을 한다. 법적으로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에디와 마르코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고 자기 나름의 방안을 모색한다. 그것이 관습과 실정법에 위배된다고 할지라도

 

로돌포의 머리카락 색깔, 노래를 잘 부르고 풍부한 유머를 지닌 것, 그리고 힘들게 모은 돈을 홀라당 소비해버리는 행태 등. 무엇보다 캐더린과의 결혼 의도가 미국 시민권을 얻기 위한 사기적 목적이라는 의심. 에디가 로돌포를 싫어하는 원인은 분명치 않다. 욕망 대상을 향한 경쟁자인 탓인지 아니면 남들은 알아차리지 못한 로돌포의 숨은 면모를 발견한 것인지. 어쨌든 로돌포의 모습은 악인이 아니라는 것을 마르코와 에디의 대적을 막으려 애쓰는 대목에서 확인할 수 있다.

 

(에디) (비탄에 차서 외친다.) 나를 그렇게 생각했단 말이지. 내가 그런 생각을 했다구? (P.77)

 

에디가 원하는 건 바로 캐더린이었을까? 베아트리스의 주장에 에디의 반응은 위와 같다. 그는 비탄과 실의로 가득하다. 그가 법률보다도 엄중한 시칠리아계의 관습을 어기면서까지 지키고자 했던 캐더린의 장래를 자신을 제외한 모든 사람은 색안경을 끼고 바라본다는 사실. 심지어는 캐더린마저도 자신을 의심하고 꺼린다는 현실. 게다가 이미 마르코에 의해 되돌릴 수 없이 실추된 명예. 그것은 살아도 살아 있다고 할 수 없을 정도로 가혹한 징벌이다.

 

사적 처벌을 강행하는 마르코를 앞에 두고 에디 카본이 원하는 건 단 한 가지. 잃어버린 자신의 이름을 돌려달라는 것이다. 그것이 불가능하다면 자신은 생존의 이유를 갖지 못한다. 마르코의 괴력을 알고 있는 에디는 정면으로 그와 맞선다면 목숨을 유지하지 못할 것을 알면서도 당당하게 맞선다. 목숨보다도 더 소중한 그 무엇을 지키기 위해. 비록 남들은 이해하지 못하고 알아주지 않더라도 말이다. 그런 에디 카본에게서 거역할 수 없는 운명에 스러지는 고대 그리스의 비극적 영웅의 자취를 찾을 수 있는 것이다.

 

(에디) 이웃 사람들 앞에서 내 이름을 누더기로 만들었지! 내 이름을 돌려다오! (천천히 마르코를 향해 간다.) ! 내 이름을 돌려다오. (P.77)

 

출간된 지 오래된 책이다. 절판된 지도 한참 되어 시중에서는 도저히 구할 방안이 없다. 편집도 글꼴도 고색창연한 느낌이다. 신간이 절실히 요구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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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10-10 03:28   URL
비밀 댓글입니다.

성근대나무 2021-10-10 14: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죄송합니다. 저도 도서관에서 빌려본 책이라서요.
 
키다리 아저씨 그 후 이야기 Classics in Love (푸른나무) 9
진 웹스터 지음 / 푸른나무 / 200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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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제는 <Dear Enemy>. 화자 샐리 맥브라이드가 고아원 의사 로빈 맥클레이에게 보내는 서신의 첫 문구다. 번역본에서는 싸움꾼 선생께로 옮기고 있어 두 사람 사이의 관계가 우호적이지 않음을 직설적으로 보여준다. 이 작품을 통상 <키다리 아저씨> 속편으로 간주하는데, 주인공이 성공한 전편의 주인공 주디의 친구라는 점, 그리고 형식이 대부분 주디에게 보내는 샐리의 서신으로 이루어졌다는 점, 그리고 배경이 주디가 어린 시절을 보냈던 존 그리어 고아원이라는 점 등이다. 다만 주디와 저비스는 글 속에서만 존재감을 드러낼 뿐 실제 작품 속에는 활동하지 않으며, 이 작품의 화자이자 주인공은 전적으로 샐리 맥브라이드이다.

 

샐리의 서신에 따르면 고아원의 환경이 매우 열악하다는 점, 그리고 고아원의 운영이 너무 권위적이고 획일적이라는 점이 드러난다. 고아원의 본질적 설립 목적을 되새겨볼 때 존 그리어 고아원은 지금껏 고아들을 위한 단순 수용시설에 불과하였다.

 

저를 이 고아원에 오게 했던 낭만적인 매력은, 시적인 상상력 속에서만 존재하는 것일 뿐이에요. 이 곳은 정말 끔찍하답니다. 어둠침침하고, 을씨년스럽고, 불쾌한 냄새가 나는, 정말 언어로 표현하기 어려운 곳이에요. (P.20)

 

여기서 이 작품의 사회소설로서의 면모가 확연히 드러난다. 전작에서 고아원의 비참한 현실은 주디의 서신에서 가끔씩 언급될 뿐이며 그 자체가 작품의 주도적 비중을 차지하지 않는다면, 여기서는 소설 전개의 핵심적 사안이다. 샐리는 고아원 원장으로서 고아원을 변화시키고 싶어한다. 좀 더 밝고 인간적인 곳, 즉 진정 아이들을 돌보는 곳으로. 샐리는 주디 부부와 샌디를 비롯한 주변 사람들의 도움을 얻어 서서히 고아원을 개혁한다.

 

애정만으로 결혼해서 내 모든 인생을 포기하고 싶지는 않아......그리고 난 내 삶을 발견하기 위해 곰곰이 생각해 봐야겠어. 결혼하면 내가 좋아하는 일을 그만둬야 할 테니까. (P.226)

 

더불어 그녀 자신도 바뀌게 되는데, 원장직을 한시바삐 그만두려던 생각은 사라지고 고아원 운영의 보람과 재미를 발견하게 되는 점이다. 그녀가 고아원에 매진하면 할수록 불가피한 갈등과 선택의 순간이 다가온다. 약혼자는 그녀를 이해하지 못하고 그녀는 평범한 여성의 삶에 안주할 마음이 없다. 여성의 자아실현과 자기 주도적 삶의 선택이라는 점에서 여성주의 문학으로 분류할 수 있다.

 

한편 샐리는 원장직을 수행하면서 샌디와 사사건건 대립한다. 그래서 ‘Dear Enemy’라는 표현이 나오게 되었다. 샌디는 비록 완고하고 무뚝뚝하지만 자신의 직무와 아이들에 대한 사랑은 헌신적이다. 초창기 주디에게 샌디를 향한 불만을 토로하던 샐리는 업무를 공유하고 대화를 해나가면서 서서히 샌디에 대한 인식이 변하게 된다. 더불어 아이들에 대한 사랑과 고아원의 탈바꿈이라는 동일한 지향점을 지닌 그들이 여러 오해와 편견에도 불구하고 장애물을 극복할 수 있음은 당연한 귀결일 것이다.

 

그런 면에서 전작과 마찬가지로 이 소설 역시 러브 스토리이다. 평범한 가치관을 소유한 젊은 여성으로서 샐리의 장래는 성공한 정치가의 아내로 몇 명의 아이와 함께 남편을 정성으로 내조하는 여성상으로 예정되어 있다. 존 그리어 고아원 원장만 맡지 않았더라면, 아니면 재빨리 원장직을 그만두었더라면 말이다. 우여곡절 끝에 샐리가 자신과 부합하는 진정한 사랑을 찾게 되었다는 점에서 러브 스토리는 결실을 이루었다고 보겠다.

 

이 작품은 전작에 비하면 대중적 흥미를 끌어내는 요소가 약하다. 열악한 환경의 젊은 여성의 신데렐라 이야기라고 치부할 수 있는 통속적 소재에 비하면 샐리의 이야기는 고아원 운영에 깊이 편중되어 있다. 가벼운 소설책에서 무겁고 진지한 사회의 어두운 단면을 정면으로 마주하고자 하는 이는 많지 않다. 게다가 저비 도련님과 미스터리한 키다리 아저씨에 비하면 고든 씨와 샌디는 호감도도 낮은 편이다. 특히 고든 씨는 매우 평면적 이미지로 묘사되어 있어 흡입력이 약하다.

 

그럼에도 이 작품이 단순히 <키다리 아저씨>의 속편으로 치부되기에는 아깝다. 샐리의 말처럼 주디 부부의 모습은 이상적이어서 오히려 비현실적이다. 주디 이야기에 비하면 샐리 이야기가 훨씬 더 현실적이다. 샐리는 보다 진취적이고 현실 참여적이다. 그녀는 자신의 감정에 솔직하고 행동에 가식이 없다. 고아원 운영의 중요한 업무를 처리하는 사람은 결국 샌디가 아니라 샐리 자신이다. 그녀의 책임감과 사명의식이 있기에 주변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고 도움을 얻을 수 있었다. 이 작품이 전작의 명성에서 벗어나 독자적인 가치를 인정받길 기대한다

 

참고로 아래아한글에서 맞춤법 검색을 하니 고아원의 표준어는 보육원이라고 계속 지적한다. 직설적인 표현을 순화시킨 용어인데, 당사자의 감정을 고려한 변경으로 이해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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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이웃 이야기 동화는 내 친구 65
필리파 피어스 지음, 햇살과나무꾼 옮김, 고경숙 그림 / 논장 / 201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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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록작품>

1. 우리 이웃 이야기

2. 한밤중에

3. 목초지에 있던 나무

4. 프레시

5. 가만 있는 짐과 말 없는 짐

6. 검은 딸기 소동

7. 다시 물 위로

8. 운 좋은 아이

 

필리파 피어스의 첫 번째 단편집이다. 작가명이 생소하여 별 기대감이 없었는데, 알고 보니 <한밤중 톰의 정원에서>로 유명한 작가라고 한다. 나중에 천천히 다른 작품들도 읽어봐야지.

 

작가는 개별 단편에서 특별하고 거창한 사건을 전개하지 않는다. 대다수는 사실 사건이라고 불리기조차 애매한 일상의 자잘한 에피소드에 불과하다. 어찌 보면 흔하고 눈에 띄지 않아 스쳐 지나가기에 십상임에도 작가의 눈은 허투루 넘어가지 않는다. 동화책의 주인공은 아이들이므로 그네들의 눈높이에 맞추어 개별적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 대표적인 게 <다시 물 위로>인데, 연못 바닥으로 처음 오리 잠수하는 아이의 체험을 독자에게 그대로 전달한다. 물속 빛과 색의 변화 모습과 기대와 불안을 품고 있는 아이의 심정에 공감하지 않을 수 없다. <한밤중에>처럼 부모 몰래 야식을 먹었던 경험은 대부분이 갖고 있을 텐데, 슬쩍 눈감아주는 아빠의 행동에 미소를 짓게 된다.

 

<프레시><목초지에 있던 나무>는 상실에 대한 이야기다. 민물조개는 강바닥에, 느릅나무는 목초지에 있어야 자연스러운 존재다. 사촌 동생의 채집과 안전을 위한 벌목의 불가피성은 이성적으로 납득하지만 마음속 내밀한 감정은 다르다. 댄은 자기 마음을 들여다봐도 알 수 없으며, 리키는 한밤에 까닭 모를 슬픔을 느끼며 눈물을 흘린다. 민물조개를 잡은 이가 댄이고, 늙은 나무를 넘어뜨리는데 리키가 기꺼이 동참하였기에 그들의 심정은 미묘하다.

 

<검은 딸기 소동><가만 있는 짐과 말 없는 짐>은 둘 다 가족의 본질을 생각하게 한다. 둘 다 일상의 친숙한 공간을 벗어난 모험 이야기가 핵심을 이룬다. 전자의 밸은 아빠의 호통을 피해 낯선 곳에서 만난 부부의 가정집에서 평온과 소소한 행복을 맛본다. 아빠의 손수건을 찾기 위해 함께 다시 그 지역을 돌아다니지만 밸은 굳이 그곳을 찾고 싶은 생각이 없다. ‘따뜻하고 달콤한 냄새가 나던 부엌의 흐뭇한 추억을 잃고 싶지 않으므로.

 

후자는 어린 손자와 늙은 할아버지의 따스하며 아름다운 관계를 그린다. 외로울까 봐 심심할까 봐 서로를 배려하는 마음씨는 다른 가족들에게서 발견하기 어려운 미덕이다. 리틀발리 소풍을 통해 두 사람은 잊을 수 없는 추억을 쌓지만, 배타적이 아니라 다른 가족 구성원과 공유하고 소통하기 위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우리 이웃 이야기><운 좋은 아이>는 장소도 사건도 전연 다르지만 이웃과의 교류가 등장한다는 점에서 공통점을 지닌다. 다만 아이와 이웃 어른의 관계는 긍정적이지 않은 결론으로 이어진다. 전자에서 딕 아저씨와 메이시 할아버지의 사안은 돌연 주인공과 딕 아저씨의 것으로 변질된다. 자신에게 우호적이라고 믿었던 주인공에게 배신당했다고 생각한 딕 아저씨는 이웃 사람들한테 넌더리가 나서집을 떠난다. 후자의 팻은 전혀 운 좋은 아이가 아니다. 자유로운 오후 시간을 어쩔 수 없이 루시와 고달픈 모험으로 보내버린다. 게다가 버스 안에서 차장과 이웃 주민 승객의 차가운 시선과 한심하게 여기는 동정이란. 팻은 모든 사람한테서 외면한 채 눈물을 흘린다.

 

공간 배경이 영국의 시골 지역이다. 자그마한 동네와 주변의 한적한 교외를 무대로 삼다 보니 도시의 복잡함과 혼잡함이 없이 편안하고 정적이다. 주요 등장인물도 가족과 이웃 등 몇 명 이내로 그치고 있어 아담하고 친숙한 느낌을 준다. 작품은 다양한 성격이 혼재되어 있다. 흐뭇한 미소를 자아내는 전형적인 유형 외에도 생경하고 이질적인 감상을 품게 하는 이야기들도 제법 있다. 동화가 반드시 아름답고 행복해야 한다는 당위성은 없으리라. 우리네 현실 자체가 항상 밝고 즐겁고 행복한 것은 아니므로 차라리 이것이 더욱 현실에 가깝다. 다만 작가는 지나치게 적나라하고 직설적으로 기술하지 않고 슬쩍 에둘러 표현함으로써 독자 스스로가 생각해보도록 유도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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