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있는 한국사 교과서 1 - 민족의 형성과 민족 문화 살아있는 휴머니스트 교과서
전국역사교사모임 엮음 / 휴머니스트 / 200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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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표지 좌측 상단에 청소년과 함께 살아 숨쉬는-21세기 대안 교과서라는 문구가 이 책의 성격을 대변한다. 이 책이 기획되고 집필되던 2000년초까지만 해도 중등 한국사 교과서는 국정교과서였던 모양이다. 저자들은 국정교과서의 획일화된 체계와 청소년의 눈높이와 흥미를 끌기에 부족한 주제와 내용서술 등의 한계를 극복하고자 대안 교과서로 모색했다고 밝힌다.

 

현장에서 이 책은 꽤 인기가 있었던 모양이다. 2002년에 초판이 나왔고, 2007년과 2012년에 개정판, 2019년 개정증보판이 각각 출간되었다. 20년에 걸쳐 절판되지 않고 꾸준히 개정판이 나왔다는 게 높이 평가할 만하다. 초판을 개정증보판과 비교해 보면 목차만 조금 차이가 있을 뿐 내용은 거의 같음을 알 수 있다. 기본 뼈대는 동일한 가운데, 도판 자료가 추가되거나 대체되었을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11개의 단원으로 구성되었는데, 실제 역사 서술은 2단원 우리 역사의 새벽부터 10단원 일어서는 농민들까지다. 1단원은 역사는 왜 배우나요로서 역사 학습의 의미를 밝히며, 11단원은 민족의 형성과 민족 문화로서 앞선 서술한 내용을 토대로 우리 민족과 문화의 정체성을 논의하는 자리로 만들고 있다.

 

본문 내용 자체는 딱히 언급할 만한 게 없다. 중등 교과서이니만치 기본적인 사실 전달에 주력하며, 논쟁적이거나 심화된 내용은 다루지 않는다. 대신 글만으로는 지루하거나 이해하기 어려운 대목, 흥미를 높이기 위한 목적을 가지고 풍부하고 큼지막한 사진 자료와 삽화를 매우 많이 수록하고 있다. 거의 장마다 한두 개 이상의 도판이 있다고 보면 되며, 이따금 전면과 양면에 걸친 사진을 담고 있어 보는 눈이 시원할 정도다. 보통의 책보다 큰 판형이니 효과는 더욱 배가된다. 유효적절한 지도의 추가로 구체적 장소의 위치 확인과 사건 전개의 이해를 높이는 점도 칭찬할 만하다.

 

일반적 역사서와 차별되는 점은 독자인 학생의 참여와 의식을 요구하는 항목이다. 본문 학습이 끝나면 저도 저요’, ‘나도 역사가’, ‘과거와 현재의 대화에서 학생들의 참여를 요구한다. 그리고 연대순의 단조로운 역사 서술을 벗어나 요즘 관점에서 흥미로운 주제를 가지고 당대를 조망할 수 있도록 세 개의 주제로 특별 꼭지를 추가하고 있다. ‘여성과 역사9, ‘문화재를 찾아서11, ‘청소년의 삶과 꿈’ 9편이다. 다만 중등 역사 교과서에 굳이 여성이라는 항목을 가지고 이렇게 강조할 필요가 있을까에 대해 의문스럽다. 마지막으로 부록으로 한국사 연표를 담고 있어 교과서의 정석을 보여준다.

 

오늘날 중등 역사 교과서는 국정이 아니라 검정도서 방식이다. 이제는 여러 저자와 출판사가 역사 교과서를 발행하고 있으므로 기존처럼 획일화 우려는 많이 감소하였다. 그럼에도 교과서 자체가 갖는 한계성으로 여전히 많은 학생이 역사에 흥미를 느끼지 못한다. 문제는 교과서가 아닐지도 모른다. 역사를 다루는 방송프로그램과 유튜브에서 만나게 되는 흥미진진함은 결국 활자 매체와 영상 매체라는 포맷의 근본적 차이에 있다. 역사 교과서, 나아가 역사서를 영상 매체와 차별화하는 방안이 무엇일지 지속적 모색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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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여자의 열매
한강 지음 / 창비 / 200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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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수록작>

어느 날 그는

아기 부처

해질녘에 개들은 어떤 기분일까

붉은 꽃 속에서

내 여자의 열매

아홉 개의 이야기

흰 꽃

철길을 흐르는 강

 

<어느 날 그는>

 

사랑은 묘하다. 생판 남남인 남녀를 세상 그 무엇보다도, 심지어 부모보다도 더 소중하고 친밀한 관계로 변모시킨다. 남남이었다면 신경 쓰지 않거나 사소하여 지나치기에 십상인 미묘한 언행이 순식간에 증폭하여 증오로 뒤바뀌어 철천지원수처럼 갈라서기도 한다. 이 단편에서 그와 민화의 경우가 꼭 그러하다. 상대방의 불충실함에 대한 뜨거운 분노, 상대방을 때리고 흉기로 마구 난자할 정도로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행해지는 이성의 상실, 사랑의 콩깍지가 씌었을 때는 몰랐던 상대방의 일상적 참모습에 대한 실망과 환멸. 이것을 보면서 우리는 사랑이란 감정과 결과에 의구심을 품게 된다. 사랑은 권장하고 환영받아 마땅한 현상일까. 작가는 여전히 그렇다고 암시한다.

 

제아무리 죽일 놈의 사랑이라고 치를 떨지만, 민화를 만나기 전과 후의 그는 완연히 다른 사람이다. 사랑은 반드시 즐겁고 행복함만을 가리키지 않는다, 이에 따른 불안과 슬픔까지 포용할 수 있어야 참다운 사랑이다. 동물적으로 무감각했던 그는 이제 비로소 사람이 된 것이다. 감정이라는 인간적 면모를 회복하였으므로. 전선에 맺혀 있는 빗방울을 무심히 바라보다가.

 

<아기 부처>

 

남녀 사이가 진실한 사랑으로 맺어졌다면 축복과 행복을 누려야 마땅할 정도로 이상적인 모습이다. 작중 화자와 남편의 인연도 그런 줄 알았다. 온몸에 전신화상을 입은 유명 아나운서. 그 비밀을 유일하게 알고 있는 보통 아내 화자. 상처를 보듬고 감싸 안아 승화시키는 사랑이란 거룩할 정도로 아름답다. 아마도 부처라면 가능할 것이다, 여기서 부부의 균열이 생긴다. 남편의 외도에 대해 누구를 비난해야 할까, 남편, 아내, 아니면 둘 다. 둘 다인 동시에 둘 다 아닐 수도 있다. 감정의 변화를 이성과 도덕으로 완전히 억누를 수 있을까. 설사 그렇다 해도 그것이 바람직한가. 아내의 태도에 실망한 남편이 기댄 자신만만한 젊은 여성 역시 그의 몸을 보는 순간 외마디 비명을 지르지 않았던가. 남자애의 흰 몸에 맨살을 부비고 싶은 참을 수 없는 욕망을 느낀 그녀는 어떻고. 오히려 이런 것들이 진정 인간적인 반응이다.

 

부처라면 모름지기 속세의 희로애락을 초탈한 존재다. 아기 부처라고 하면, 더없이 맑고 순수한 모습의 부처를 떠올리게 된다. 이 소설의 아기 부처는 다르다. 자신의 손으로 진흙을 주물러서 만든 얼굴이 곧 부처 얼굴이라고 한다. 너무 가혹하지 않은가. 빚는 이의 마음 상태에 따라 부처와 거리가 먼 얼굴이 부처가 되다니.

 

흙을 덮고 힘차게 밟아 도독한 무덤을 만들었는데, 발을 떼고 나자 오히려 더욱 선명하게 살아난 얼굴이 나를 올려다봤다. 일그러진 이마, 입꼬리를 슬쩍 치켜올린 웃음, 차갑게 빈정대는 듯한 눈꼬리가 또렷이 도드라져 있었다. (P.103)

 

애석하지만 두 사람은 부부 같지 않은 가족관계를 계속 이어가야 한다. 남편은 해결 방안이 없고, 아내는 자신의 섣부른 선택에 죄책감과 책임감을 지고 있으므로. 그들의 일상도 서늘한 겨울을 견디고 봄이 올 수 있을까. 아내와 남편은 서로에게 분노를 느끼지도 실망하지도 않는다. 타인에게 호의를 베풀 듯이 그렇게 서로가 견뎌내는 것이 곧 삶이다, 씁쓸하지만.

 

<해질녘에 개들은 어떤 기분일까>

 

이 작품 속 부부도 파탄지경이다. 트럭에서 장사하던 아내는 젊은 남자와 눈이 맞아 아이를 두고 도주해 버렸다. 남편은 아내를 찾는다고 일상을 버리고 아이와 함께 전국 각지를 헤매고 다닌다. 독자는 아내에게, 남편에게 무작정 비난을 퍼붓기 어렵다. 어쨌든 결단의 당시 그들은 순수했으므로, 앞뒤 가리지 못할 정도로. 다만 사랑은 몰라도, 결혼은 곧 생활이라는 점을 몰랐을 뿐. 얼마나 자주 엄마가 푸념과 탄식을 늘어놓았으면 아이도 무심결에 따라 할 정도이겠는가.

 

해질녘의 개들이 어떤 기분일지 아이도, 우리도 알 수 없다. 저물어 가는 해에 컹컹 짖으며 아쉬움에 잠길지 아니면 석양의 황홀한 색채에 감동하며 부르짖을지를. 마찬가지로 엄마와 아내를 빼앗긴 부녀의 감정이 어떠할지 막연한 추정만 가능할 뿐이다. 삶을 내팽개치고 절망과 음주에 허우적대는 아빠의 모습이 보다 인간적이다. 반면 울지도 않고 별다른 감정을 표현하지 않는 아이의 모습은 오히려 비인간적이다.

 

마지막 수단으로 아이를 죽이고 스스로를 끝내려던 아빠의 실패한 행동은 연민을 자아낸다. 그냥 속 시원히 둘 다 생을 끝낸다면 앞으로의 나락과 고통을 방지할 수 있기에 더 나은 게 아닐까. 이러한 삶이 희망없이 되풀이된다면 그보다 더한 절망과 괴로움이 있겠는지. 그럼에도 희망의 징조를 찾을 수 있다. 여태껏 아빠의 주정을 피해 몸을 한껏 웅크리던 아이가 아빠의 감정을 헤아리기 시작했으니. 공감을 하는 순간 타인은 이제 남이 아니다. 현재 처지가 무섭고 두려우며 앞날이 막막하게 느끼는 건 비단 자신만이 아니기에. 앞으로도 두 사람에게 쉽사리 서광이 비치지는 않겠지만 그래도 어떻게든 견디고 헤쳐나갈 것임을 우리는 기약할 수 있으리라.

 

<붉은 꽃 속에서>

 

유한한 수명을 지닌 모든 생명체의 본원적인 질문인 동시에 두려움은 죽음이다. 죽는 게 두렵지 않다고 큰소리치던 사람도, 죽음에 준비가 되어 있다고 다짐하던 사람도 막상 죽음이 눈앞에 닥치면 이를 인정하지 않고 회피하고자 필사적이다. 어쩌랴 그것이 불가피한 속성임을. 싯다르타의 출가와 그의 그것은 동질적이다. 윤이의 상실 이후, 앞집의 할머니도 상여로 나간 이후 볼 수 없게 되고 가깝거나 멀거나 차츰차츰 사라진다, 이윽고는 마지막으로 자기 자신마저도. 삶과 죽음의 숙명적이고 불가해한 현상을 세속을 떠나 마음과 영혼으로 다가가려는 노력이 결국 종교 아니겠는가.

 

불빛은 제가 불빛인 줄을 알았을까. 붉은 꽃 속에 제가 밝혀져 있었던 것을 알았을까. (P.213)

 

아무것도 모르는 아이 눈에 아름답기 그지없는 하얀 꽃과 붉은 꽃으로 인식되는 영가등과 붉은 등의 행렬은 자체로 신비로운 형상을 이룬다. 시종 차분하고 나직한 어조로 서술되는 이 단편의 정조는 지극히 내밀한 동시에 체념적이다. 비가 내리는 가운데 치러진 노스님의 쓸쓸한 다비식은 수행자의 현실이자 미래를 보여준다. 명상과 사색은 궁극적으로 자기반성의 존재론으로 귀결되기에 이를 견딜 수 없어 갈림길에서 나아가지 못하는 수행자는 상행자의 길을 따르게 된다.

 

<내 여자의 열매>

 

아내가 갑자기 식물로 변해버린다는 설정은 카프카의 벌레 못지않게 의외의 착상이다. 여기서는 식물로 변해가는 과정을 남편의 시각으로 서서히 보여준다. 월계수로 변하는 다프네의 모습과 비슷하다고나 할까.

 

전조 없는 현상은 없다. 도시 속 소시민적 삶을 지향하는 남편과 달리 아내는 도시를 답답해하며 자유로운 공기를 호흡하며 살기를 희구한다. 화분이 놓인 베란다에서 충돌 후 부부는 다시 싸우지 않지만, 더불어 대화도 줄어간다. 아내는 이미 식물로 변하기 위한 준비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아내를 바라보는 남편의 심경은 양가적이다. 청신한 식물로서 아름다움에 새삼 탄복하는 동시에 아내 상실에 대한 외로움에 젖어 든다. 동시에 그것은 자신이 아내의 본성을 진정으로 이해하지 못했다는 자괴감과도 상통한다.

 

아내가 식물로 변한 까닭은 무엇일까. 바람과 햇빛과 물만으로 살 수 있는 깨끗한 존재로서 타인에게 피해를 주지 않고 타 생명의 희생으로 살아갈 필요가 없어서이리라. 자기 뜻에 맞지 않는다고 화를 내고 큰소리로 강제하는 남편의 동물성에 대치되는 속성은 식물성임이 타당하다. 완전히 식물이 되어버린 아내와 남편을 연결하는 가느다란 끈은 한 움큼의 아내의 열매이다. 남편은 다음 봄에 아내의 재생을 소망하지만 독자는 짐작할 수 있다. 그것은 기대하기 희망일 뿐임을.

 

남편과 아내, 남자와 여자, 동물성과 식물성으로 대비되는 이원적 구조에서 전통과 현대 사회는 항상 전자를 높이 평가하고 후자를 비하하였다. 작가는 이 단편에서 통념적 사회질서를 해체하고 동물성에 휘둘리지 않는 독자적인 식물성의 세계를 구축하려고 한다. 이 작품이 뒷날 <채식주의자>를 예견한다면 지나칠까.

 

<흰 꽃>

 

서두의 일상만 보면 화자는 지독한 염세와 허무에 빠진 듯하다. 회사에서 사회생활에서 별다른 의의와 동력을 찾지 못한 화자는 제주도로 떠난다. 완도행 여객선에서 우연히 맞닥뜨리는 중년 사내와 과음하는 남녀들, 학생들. 화자의 회상은 아버지의 죽음 후 어머니가 사용한 상복의 흰 리본들, 그리고 어머니상을 치른 후 자신이 패용한 흰 리본들로 이어진다.

 

작품은 흰색의 이미지로 연결되어 있다. 화자가 끈질기게 욕망한 밝은 햇빛, 흰 양복을 입은 중키의 사내, 흰 나비와도 같은 흰 리본들, 얼굴이 달떡 같은 계집아이를 낳고 싶다는 생각, 어두운 밥집에서 차츰차츰 밝아지는 환한 햇빛으로. 흰색은 묘한 색상이다. 깨끗하고 순수함의 상징인 동시에 죽음을 직접적으로 뜻한다. 눈부신 햇빛은 악과 대비되는 선을 가리키는 동시에 매우 차가운 공격성을 지니고 있다.

 

독자가 이 단편에서 찾아낼 수 있는 것은 왠지 모를 허전하고 아련한 정서다. 그것은 회상과 추억이며, 외로움과 상실감에 대한 본능적 반응이기도 하다. 세상에 홀로 선 존재는 독립적인 동시에 고독한 존재이다. 화자가 지향하는 햇빛은 흰 리본으로 대변되는 과거의 기억과 추억을 넘어 보다 새롭고 밝은 삶을 일신하고자 하는 내밀한 바람이 아니겠는지.

 

<철길을 흐르는 강>

 

이 작품집에 수록된 작품들은 모두가 씁쓸하고 어둡고 애잔한 정조를 띠고 있다.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이십 대 여성작가로서는 너무나 침울하고 암담하다. 아마도 이 소설이 가장 전형적이 아닐까. 역시 화자의 회상으로 이어지는 전개는 독자의 섣부른 예상과는 무관하게 막막하게 흘러간다. 죽은 새를 호주머니에 넣은 채 손아귀에서 썩어갈 때까지 만지작거릴 수밖에 없었던 화자의 그로테스크한 심적 상태. 마침내 언 땅을 헤치고 죽은 새를 눈물 흘리지 않고 독오른 눈으로 파묻던 화자.

 

그녀의 가슴 속에는 철길 가장자리에 가지런히 벗어둔 어머니의 흰 구두가 여전히 남아 있다. 홀로 근근이 견디는 삶에서 그녀는 연인에게조차 가슴을 내어주지 않는다. 모두가 떠나더라도 자신은 여기 남아서 슬픔과 고통 속에서 버티리라. 화자가 팔짱을 끼려 하자 몸뚱이부터 목덜미, 손에 이르기까지 몸 전체가 투명하게 비쳐 보임은 그 끝에 다다르고 있기에 아득하다. 그녀에게 구원은 아니더라도 자그마한 암시나마 남길 수 있을까. 아직은 세상과 삶에 더 붙어있으라고 응원의 차원에서라도. 작가는 이렇게 응답한다.

 

새떼의 울부짖음이 고막을 찢었다. 참다 못해 소리치려 입을 벌린 순간, 젖은 새새끼들이 일제히 목구멍을 비집고 뛰쳐 날아갔다. (P.312)

 

<아홉 개의 이야기>

 

표제 그대로 아홉 개의 짤막한 이야기 모음이다. 언뜻 보면 전혀 맥락이 없는 이야기들이지만 다시 보면 알지 못한 내적인 공통점으로 연결된 것 같기도 하다. 기억과 추억을 바탕으로 그 차분하고 정적이며 체념적인 정서가 작품 전체를 감아 돈다. ‘첫사랑의 아련하지만 흐뭇한 서정은 금방 사라지기에 더욱 따뜻하다.

 

작중 그녀는 여기를 떠나고 싶어 하며 실제로 떠나기도 한다. 어디로 가는지는 알 수 없지만, ‘바람속 그녀처럼. ‘푸른 산자유에서 그녀는 꿈속에서 푸른 산 또는 낯선 길을 홀로 걷는다. 그녀는 외롭고 쓸쓸하지 않다. 어차피 그녀 혼자 가기로 되어 있으므로. 꿈에서 깨어났을 때 옆에 자고 있는 남자의 모습에서 그녀는 오히려 서늘함을 느낄 뿐이다. 마지막 세월에서 그녀는 비로소 남자의 손을 잡고 길을 걷는다.

 

 

작가 한강의 두 번째 소설집이다. 오래전에 읽은 첫 번째 소설집 <여수의 사랑>은 이제 기억이 가물가물하다. 그 책도 이것과 마찬가지로 암울하고 슬픈 분위기였던가. 화자와 인물들은 정주하지 못하고 현실과 과거와 꿈속에서 거듭 방황하던가. 책을 읽는 내내 마음은 온통 체한 듯한 묵직함에 눌려 있다. 무엇이 젊은 작가 한강을 이토록 치열하고 고통스럽게 만들었는가. 원래는 개별 작품을 종합하여 내용을 압축하고 좀 더 통합적인 사고를 해보고 싶었지만 몸도 마음도 피곤하여 그만둔다.

 

작품 해설은 문학평론가 황도경의 글로, ‘짐승의 시간, 꿈꾸는 식물이라는 제목을 달고 있다. 인물의 고통과 상처에 주목함으로써 개인적으로 동의와 공감대를 공유하는 대목도 있고 다른 견해를 갖는 해석도 있다. 작가가 일상에서 추상으로, 산문에서 시의 세계로 옮아가는 과정을 예리하게 포착하며 우려와 기대를 표명하고 있음은 특기할 만하다.

 

다만 <내 여자의 열매>를 통해 구체화한 식물성을 동물성과 대비하여 어머니와 아버지, 여성과 남성, 희생자와 가해자로 양분하는 관점은 지나친 확대다. 수록작 성별 대결 구도한 비교적 분명한 작품에서 남성의 폭력은 반응적, 대응적임에 주목해야 한다. 먼저 상대에게 어떤 형태로든 폭력을 행사하는 건 여성이다. <어느 날 그는>의 민화는 다른 남자를 만난다. <아기 부처>의 아내는 남편의 흉터 있는 몸을 피한다. <해질녘에 개들은 어떤 기분일까>에서 아이 엄마는 아이와 아이 아빠를 버리고 다른 남자와 도주한다. 작품 속 남성은 분노와 반감에 공격적, 반항적 행위를 해보지만 결국 두려움에 휩싸여 어쩔 줄 모르고,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르는 불쌍한 존재들이다. <해질녘에 개들은 어떤 기분일까>에서 아이의 말이 이것을 명확하게 포착한다.

 

어쩌면 그동안 아빠는 아이보다도 더 무서워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고, 그렇게 줄곧 무서움을 참고 있었기 때문에 혼자서 더욱 무서웠는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P.174)

 

이 책은 구판 초판본이며, 개정판은 2018년에 문학과지성사에서 나왔다. 작가에 따르면 작품 배치를 바꾸었고, 몇몇 표현을 손봤다고 한다. 가장 큰 차이는 개정판의 작품 해설 필자는 강지희라는 점이다. 평론가에 따라 분석하는 시각과 내용이 어떤 차별점을 보일지 궁금하다.

 

펴낸날이 2000315일이다. <그대의 차가운 손>과 함께 보유한 한강 책 중에서 유이한 1쇄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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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시 : 2025년 3월 14일(금) 17:30

장소 : 금호아트홀 연세

연주 : 이현 (피아노)

프로그램

  - 드뷔시, 전주곡집 제2권, 제9곡 '피크윅경을 예찬하며'

  - 드뷔시, 영상 제2집, 제3곡 '금빛 물고기'

  - 프랑크, 전주곡, 코랄과 푸가

  - 브람스, 피아노 소나타 3번 F단조 Op.5


* 세줄평

즐겨 듣는 곡들은 아니다. 프랑크와 브람스는 머리속에 아무런 반향도 없다. 프랑크 곡의 초반부는 반쯤 졸다시피 하였다. 코랄부터 나아져서 푸가는 들을만했다. 역시 아직 프랑크까지는 어렵다. 브람스의 소나타가 이리 장대한 줄 몰랐다. 구조나 선율면에서 훨씬 듣기 좋다. 저음과 고음의 대비가 빛나고 연주의 스케일도 크다. 청중이 그다지 많지 않은 게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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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독한 생활 나남 한국연구재단 학술명저번역총서 서양편 433
프란체스코 페트라르카 지음, 김효신 옮김 / 나남출판 / 202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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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작품은 독특하다. 편지 형식으로 쓰고 있지만, 진짜 편지라고 하기는 어렵다. 수신인이 받아 읽다가 양과 내용에 질려서 짜증 나고 던져버리고 말 것이다. 굳이 유형으로 나누자면 에세이에 가깝다. 가벼운 수필이 아니라 몽테뉴의 에세이 같은, 그리고 다소 난삽한.

 

저자의 핵심적 메시지는 첫 번째 편지에 담겨 있다. 저자는 고독한 생활을 권한다. 페트라르카는 무슨 까닭으로 고독한 생활을 권유하는가? 저자가 말하는 고독한 생활은 정확히 어떤 생활을 가리키는가? 이런 궁금증에 저자는 일목요연하고 논리정연하게 대답하지 않는다. 의식의 흐름에 따라 펜이 흘러가는 대로 죽 서술해 나간다. 그렇기에 전체적 구성과 논리 전개에 있어서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느낌을 주지 못한다.

 

우리가 하느님을 의지하든, 우리 자신과 우리의 진지한 연구에 몰두하든, 우리 자신과 조화를 이룬 마음을 찾고 있든, 우리는 사람과 혼잡한 도시로부터 가능한 멀리 떨어져 있어야 합니다. (P.25)

 

저자는 독자에게 혼잡함에서 떠나라고 조언한다. 행동하는 사람과 여가를 즐기는 사람의 예시를 통해 자기주장의 정당성을 옹호한다. 확실히 누구라도 일상의 번잡함을 벗어날 수 있다면 참으로 매력적이지 않겠는가. 사람은 홀로 조용한 곳에 있을 때 간과했던 일상과 자신을 되돌아보며 반성과 새로운 결의를 다지게 마련이다. 창작 활동에 종사하는 경우 집중과 영감을 위해 남들이 다 잠든 한밤중과 새벽을 선호하는 사람도 많을 것이다. 수도 생활을 하는 종교인이라면 고독한 생활의 필요성을 응당 절감하게 되는데, 수도원이 접근하기가 어려운 곳에 위치하거나 외부인의 출입을 엄금하는 등의 까닭은 이러한 연유에서다.

 

고독은 유일한 증인으로 하느님을 모시고 있으며, 맹목적이고 신뢰할 수 없는 대중의 목소리가 아니라 자신의 양심에 신뢰를 두고 있습니다. (P.63-64)

 

페트라르카의 논의에서 불명확한 점이 있다. 여기서 말하는 고독은 물리적 고독과 정신적 고독 중 어느 것을 가리키는가. 무인도와 첩첩산중, 오지 같은 곳에 가야 비로소 고독함이 가능할 수 있다. 감옥에 갇히는 강제적 고립도 고독한 생활이라고 할 수 있지 않겠는가. 물리적 고독이 불가능하고 불필요한 상황에서 정신적 고독은 과연 가능하지 않은가. 자칫하면 은둔과 낙향 등을 권유하는 듯한 뉘앙스를 지닐 수 있다.

 

저자가 고독함을 강조하는 것은 여가와 자유를 위해서인데, 생활인이라면 평상시에는 절대로 가능하지 못하고 은퇴 이후에나 꿈꿀 수 있다. 저자 역시 고독한 생활과 은퇴 후의 삶은 혼용해서 말하고 있다. 정말로 은퇴 후에나 가능한 생활을 말하는 것이라면 예외적인 극소수만 가능한 삶을 말하는 것이므로 부적당하다. 그렇지 않고 일상생활 속에서의 여가와 자유라면 저자가 미덕이라고 칭할 수 있는 그런 정신적이고 풍요로운 고독이 가능할까 싶기도 하다.

 

문학이 없는 고립은 망명, 감옥, 고문입니다. 문학이 주어지면 고립은 당신의 나라, 자유, 그리고 기쁨이 됩니다. (P.56)

 

고독은 친구의 존재로 인해 방해를 받는 것이 아니라, 더 풍성해진다는 것은 결코 내 견해가 아닙니다. 둘중 하나 없이 살 수 있다면, 친구보다 고독을 빼앗기길 택해야 합니다. (P.99)

 

은퇴 후에도 생계에 지장이 없는 사람, 생활인이지만 일정 기간 이상의 여가를 구할 수 있는 사람 정도가 저자가 말하는 조건에 부합할 것이다. 게다가 물리적 고립은 바람직하지 않다. 고독은 외톨이를 의미하지 않는다. 뜻에 맞는 친구들과의 만남도 유지되어야 하고, 문학 같은 정신적 즐거움을 줄 수 있는 취미도 향유할 수 있어야 한다. 즉 고독한 생활을 일반화하여 추구하기는 어렵다는 결론을 끌어낼 수 있다.

 

페트라르카 자신도 그의 주장 대다수를 위한 게 아님을 밝힌다. 우선 자신의 기질이 고독한 생활에 어울리는지 되돌아보아야 한다. 도시의 번잡한 생활이 필요하고 여기에 끌리는 사람이라면 기질을 거슬러 굳이 고독한 생활을 좇을 이유가 없다. 저자 자신은 기질상 여기에 끌리기에 고독한 생활을 주창하는 것이지, 남들에게 무조건 설파하지 않는다.

 

이 글이 논설문이 아니고 에세이에 가깝다고 하는 까닭이 이것이다. 저자는 순전히 자신의 기질과 사고에 근거하여 고독한 생활이 주는 미덕과 장점을 보여 주고, 자신이 그러한 삶을 지향함을 독자에게 공개한다. 저자의 의견이 마음에 든다면 뜻을 같이하면 족하고 마땅치 않다면 외면하면 그뿐이다.

 

나는 다른 사람들을 위한 규칙을 제안하는 게 아니라 내 마음의 원칙을 밝히는 것입니다. 누군가가 나의 원칙을 좋아한다면 그가 이 제안을 따르도록 하세요. (P.54)

 

두 번째 편지는 일종의 사례 모음집이다. 저자의 논거를 뒷받침하는 여러 예시가 한가득 제시된다. 첫 번째 편지는 읽기가 괴로운 반면, 두 번째 편지는 역사적 이야기를 받아들이듯이 흥미롭게 읽어나갈 수 있는 장점이 있다. 여기 등장하는 인물들은 저명한 철학자, 시인, 성경 속 인물, 성인들의 목록이 줄줄이 이어진다. 모세, 아우구스티누스, 교황 그레고리우스, 예수 자신, 그 외 잘 모르는 기독교 성인 등등. 게다가 유럽 기독교 문명을 넘어 북구의 민족과 인도 브라만까지도 소환한다. 와중에 기독교 세력 간 분쟁과 다툼에 한탄하며, 신성로마제국 황제를 비판하는 대목은 결코 세속을 떠날 수 없었던 페트라르카의 모습을 떠올리게 된다.

 

어쨌든 저자는 무수한 사례를 통해 고독한 생활의 가치와 미덕을 계속해서 주창함을 볼 수 있다. 다시 한번 대다수의 일반인이 아니라 자신처럼 특이한 기질을 지닌 소수의 사람을 위해 이 논의를 밝히고 있음을 언급하며 글을 마친다.

 

고독한 생활은 고전과 문학을 애호하고 탐구하며, 집필과 창작 활동에 매진하고 싶어 하는 페트라르카 같은 인물에게 무엇보다 필요하리라. 우리 같은 범인들은 어차피 현실적으로 고독과 번잡의 극단적 배제는 태생적으로 불가능하다. 고독한 생활에서 중요한 건 정신적 고요와 평온이라고 할 때, 일상에서 잠시만이라도 가던 길을 멈추고 한번 호흡을 가다듬거나 하늘을 쳐다볼 수 있다면 미흡하나마 자체로 의미가 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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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민석의 무도 한국사 특강 - 개정판
설민석 지음 / 휴먼큐브 / 201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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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 나아가 역사 자체를 어릴 때부터 매우 좋아한다. 문득 한국사능력검정시험을 치러볼까 하는 생각에 가벼운 통사로 리마인드를 해보려고 이 책을 펼쳐 든다. 아뿔싸, 이 책은 통사가 아니다. 저자가 무한도전’ TV 프로그램에 출연하였던 방식을 그대로 적용하여 인물, 사건, 문화유산의 세 주제로 우리 역사 전체를 아이템별로 편집하였다. 대중적 반응이 좋았는지 2014년 초판 후, 4년만인 2017년 개정판을 내놓았다.

 

한국사의 대중화를 지향하는 콘셉트에 맞게 선정한 주제도 흥미를 끌 만한 것으로 엄선하였고, 다루는 내용도 기초수준에 심화 지식을 살짝 맛보여주는 수준이다. 심층적이거나 난해한 수준으로 파고들지 않았다. 역사서는 통사가 기본이 되어야 한다는 기본 주관이지만, 초심자에게는 이런 접근법도 용인될 수 있다.

 

구성은 전체 인물 편, 사건 편, 문화유산 편의 3개 장으로 하며, 각 장은 10개의 에피소드로 이루어져 있다. 각 에피소드는 맨 앞에 대표적 내용을 소재로 재미난 일러스트레이션을 선보인다. 에피소드별 분량은 네다섯 장 정도이므로 그렇게 부담스럽지 않다. 본문도 역시 삽화와 도판을 적극 활용하기에 내용 이해에 도움이 되어 쑥쑥 책장을 넘길 수 있게 한다. 이따금 에피소드 끝에 역사 상식이라고 하여 박스형으로 추가 정보를 제공하기도 한다. 맨 끝에는 한국사 연표와 본문 자료 출처를 밝히고 있다. 전체로서 잘 짜인 구성이라고 평가할 수 있다.

 

한국사의 수많은 사건과 인물 중에서 에피소드 선정은 대중성과 주관성이 많이 작용한 듯싶다. 인물 편은 단군왕검에서 출발하는데, 고구려는 없고, 신라는 선덕여왕, 백제는 의자왕을 택하였다. 고려에서는 왕건과 공민왕이며, 조선 시대는 세종에 두 편을 배정한 것 외에 장희빈과 숙종이 전부다. 일제강점기에서는 안중근 의사와 윤봉길 의사.

 

선덕여왕이 내부적으로 왕권을 강화하면서 민생을 안정시키고, 삼국통일에 중요한 역할을 하는 당나라와 외교 관계를 잘 유지했기에 통일이 가능했던 게 아니었나 생각합니다. (P.34-35)

 

다만 선덕여왕에 대한 위와 같은 호의적 평가는 동의하기 어렵다. 두 명의 여왕이 잇달아 왕위에 오르면서 왕권이 크게 약화하여 귀족들의 반란이 잇달았으며, 백제의 공격도 한층 드세졌다. 후계자의 부재, 유력 경쟁자의 제거는 김춘추가 왕권을 계승할 수 있는 기반이 되었다.

 

에피소드 선정의 주관성은 사건 편이 더하다. 몽골 침입, 위화도 회군 두 편, 임진왜란 두 편, 3.1운동, 6.25전쟁, 민주화 운동 두 편, 노동 운동. 현대사의 비중이 유독 큰 것을 알 수 있다. 민주화 운동과 노동 운동 소개는 어쨌든 간과하기 쉬운 부문을 집중 조명한다는 점에서 개인적으로 유익하였지만, 이 대목에서 다르게 받아들이는 사람도 있으리라.

 

현재 우리가 누리고 있는 많은 권리와 민주주의를 되찾기 위해 치열하게 항쟁했던 당시 사람들의 이야기를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P.262)

 

위화도 회군에 대한 평가는 회고적 감상주의를 배제했다는 점에서 긍정적이다. 이 점에서 최영 장군의 실책은 너무나 뼈아프다.

 

어쨌든 최영은 이성계가 회군이라는 승부수를 던질 만한 그릇임을 파악하지 못했고, 아무 방비도 없이 이성계에게 죽임을 당했습니다. (P.154)

 

마지막 문화유산 편은 비교적 무난하다. 석굴암, 불상, , 팔만대장경, 세시풍속, 김홍도, 신윤복, 민화, 특이하게 화폐 속 인물과 문화유산, 간도와 독도 이야기가 들어 있다. 조선 후기 풍속화의 비중이 크다는 게 언뜻 눈에 띈다.

 

김홍도가 배경을 포기한 이유는 풍속화 특유의 인물 중심 구조를 강조하기 위함이란 해석이 지배적입니다. (P.363)

 

신윤복의 그림에서 표현상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역시 색일 겁니다. 색채의 미학이라 불릴 정도로 다채로운 색깔을 사용했어요. (P.377)

 

400면이 넘는 제법 분량이 있는 책이지만, 저자의 의도대로 잘 읽힌다. 이것이 솔직한 독서 소감이다. 이 책의 목적은 한국사 초심자가 한국사에 흥미를 갖도록 유도하는 데 있다. 이 책을 읽고 나서 한 단계 심화된 역사서로 나아가고자 하는 마음이 생기면 대성공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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