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시 : 2024년 12월 12일(목) 19:30

장소 : 금호아트홀 연세

연주 : 문지영 (피아노)

프로그램

  - 바흐, 건반악기를 위한 파르티타 1번 B-flat장조 BWV825

  - 바흐, 건반악기를 위한 파르티타 2번 C단조 BWV826

  - 바흐, 건반악기를 위한 파르티타 3번 A단조 BWV827

  - 바흐, 건반악기를 위한 파르티타 4번 D장조 BWV828

  - 바흐, 건반악기를 위한 파르티타 5번 G장조 BWV829

  - 바흐, 건반악기를 위한 파르티타 6번 E단조 BWV830


* 세줄평

바흐의 건반악기 음악을 좋아하지만, 파르티타는 가장 후순위일 정도로 머리속에 아무 반향이 없다. 예습 삼아 안젤라 휴이트 연주를 들었지만, 문지영의 연주는 그것과 전혀 다르다. 매우 피아노틱하고 낭만적인 바흐랄까. 글렌 굴드 스타일의 연주를 좋아하지만 이대로도 또한 매력적이다. 후반부로 갈수록 연주자의 집중력이 한층 돋보이는데, 두 번의 휴식시간을 포함하여 3시간을 훌쩍 넘긴 공연시간이라니. 연주자도 청중도 모두 승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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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시 : 2024년 12월 10일(화) 19:30

장소 : 예술의전당 리사이틀홀

연주 : 오지현 (첼로), 박은희 (피아노)

프로그램

  - 브람스, 첼로와 피아노를 위한 6개의 노래 중 3곡 - 들의 적막, 그것은 나에게 멜로디처럼 흐르네, 사랑의 노래

  - 브람스, 첼로 소나타 1번 E단조 Op.38

  - 브람스. 첼로 소나타 2번 F장조 Op.99


* 세줄평

기억에 첼로 독주회는 처음이다. 예당 리사이틀홀도 처음이다. 아담한 홀에, 아담한 음향, 연주는 깊고도 열정적이다. 마음을 편안하게 하는 소리에 절로 눈이 감기기도 하지만, 그것이 또한 첼로의 매력 아닌가. 인간의 목소리를 닮은. 소나타 2번이 훨씬 규모도 크고 드라마틱하여 눈을 빛내며 듣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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칸초니에레 민음사 세계시인선 13
프란체스카 페트라르카 지음, 김효신 외 옮김 / 민음사 / 200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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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뒤표지에 페트라르카 탄생 700주년 기념 국내 최초 번역본이라 표기하고 있다. 200410월에 펴냈으니 20년 전의 일이다. 이 책이 다른 번역본과 구별되는 점은 크게 두 가지다. 우선 <칸초니에레> 366편 중 1편부터 50편까지를 모두 담고 있다는 점이다. 여기에는 소네트뿐만 아니라 발라드, 세스티나, 칸초네도 포함하고 있어 페트라르카의 다채로운 시 형식을 눈여겨볼 수 있다.

 

다음으로 번역문과 함께 원문도 나란히 싣고 있다. 영시와 한시는 원문 수록이 장점으로 평가되기 마련인데, 이탈리아어 등과 같은 여타 외국어는 관점에 따라 긍정과 부정 의견이 존재하게 마련이다. 원문과 번역문을 비교하여 감상할 수 있는 독자가 과연 얼마나 되겠는가로 보면 실효성이 미약하다. 어쨌든 내용은 차치하더라도 소네트 등과 같은 정형시의 경우 시의 형식과 운율을 직접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점에서는 긍정적이다.

 

그대 들어보구려, 흩어진 시구로 이루어진 그 소리, 그 한탄 / 나 그 안에서 마음의 자양분 취하고 / 내 젊은 날의 첫 실수 위에 / 지금의 나와는 사뭇 달랐던 그때, (P.6, 1)

 

1편은 시집 전체의 서시에 해당한다. ‘흩어진 시구로 이루어진 그 소리, 그 한탄<칸초니에레>의 원제인 속어 단편 시모음을 지칭하고, ‘내 젊은 날의 첫 실수는 시인이 라우라에게 첫눈에 반해 이후 그녀에 대한 사랑으로 애달파 하고 방황하던 모습을 떠올리게 한다.

 

소네트는 앞서 읽은 이상엽 번역본에서 적었듯이 14행의 정형시에 라우라를 향한 시인의 사랑을 절절하고 애절하게 기쁨과 때로는 슬픔, 희망과 절망이 어우러지는 다양하고 변화무쌍한 감정을 토로한다. 시집의 전반부이므로 라우라 생전에 그녀를 향한 사랑이 주조를 이루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라우라를 향한 시인의 사랑은 거침없다. 예수의 탄생과 비교(4)하며, 그리스 신화를 인용(23)하기도 한다. 어느 시를 들추더라도 시인의 사랑을 느낄 수 있다.

 

이 책에서 흥미로운 점은 소네트가 아닌 다른 시 형식의 작품들이다. 11편과 14편은 발라드, 22편과 30편은 세스티나, 23, 28, 29, 37편과 50편은 칸초네라고 한다. 발라드는 4행과 10행으로 구성되어 있고, 세스티나는 66, 31연으로 비교적 긴 시다. 칸초네는 긴 시인데, 특정한 형식이 엿보이지 않는다. 시인의 뜨거운 시상을 소네트라는 제한된 형식으로 표현하는데 한계가 있기에 보다 자유롭고 길게 자신의 감정을 분출하기 위해 이런 형식을 택한 것으로 보인다. 절제미 대신 자유로움을.

 

페트라르카의 시선이 오로지 라우라에게만 향한 것은 아니다. 이 책의 작품 중에서도 이슬람 세력에 대한 반감을 보이는 시가 몇 편 눈에 띈다. 교황이 주도한 대규모의 십자군은 종료되었지만, 이후로도 여러 차례 소규모 십자군이 출범하였던 만큼 사제인 페트라르카가 기독교 세력의 단결을 요구한 건 당연하리라.

 

그대들의 겸손하고 온순한 양은 야만스러운 늑대들을 / 물리치리라. 그리하여 신성한 이들을 분열시키는 자는 / 그 누구든 갖은 고초를 겪게 되리니. (P.70-72, 27)

 

아랍인, 투르크인 그리고 칼데아인, / 홍해 바다 저편에 있는 / 이방의 신들을 믿는 모든 이들이, / 얼마나 보잘것없는가를 그대는 알게 되리라. (P.78, 28)

 

시인은 평생에 걸쳐 이 시집의 원고를 다듬고 또 다듬었다. 작가 연보에 따르면 사망한 해인 1374년에 아홉 번째 원고를 수정하였다고 하니 이 시집에 대한 시인의 집착과 애정은 참으로 대단한 것이다. 그토록 라우라를 향한 시인의 사랑은 그녀의 죽음과 상관없이 평생에 걸쳐 그에게 영감을 준 것이다. 라우라는 유부녀라고 한다. 그녀는 시인의 사랑을 받아들였을까, 아니 알아차리기나 했을까, 시인은 끙끙거리며 속앓이만 하며 일방적 사랑에 그친 게 아닐까. 라우라는 시인에게 결코 호의적이지 않았던 듯하다.

 

아래로 향한 그녀의 시선은 / 자만과 모욕감으로 모든 기쁨 앗아가고, / 때 이른 내 죽음의 원인이 되리라. (P.118, 38)

 

청춘의 불같은 열정과 사랑의 정념은 인정하지만, 이것이 노년에 이르기까지 대상이 오래전에 사망하였음에도 변함없이 이어진다는 건 놀라운 일이다. 라우라에 대한 시인의 사랑은 현실적인가 아니면 관념적인가. 어리석은 독자는 불순한 의구심을 품는다.

 

뜻깊고 흥미로운 책이지만, 모호한 대목을 간단히 언급하고 마치겠다. 옮긴이는 작품 해설에서 서시에서 언급한 젊은 날의 과오를 라우라가 아닌 한 여인과의 사이에서 자녀를 얻은 일을 가리킨다고 풀이한다. 시인이 늘그막에 시집 전체를 관통하는 서시에서 과연 시 내용과 거리가 먼 그 일을 굳이 언급하였을까 회의적이다. 늙은 사제에게 과오는 여인에 대한 사랑에 빠져 주님을 향한 헌신에 매진하지 못한 것으로 봐야 하지 않을까.

 

그녀에게 우아한 복수를 하려 하네, / 어느 날엔가 숱한 사랑의 모독에 앙갚음하려고, / 남몰래 사랑의 화살을 당겼다네, / 때와 장소를 기다려 상처를 주기 위해. (P.6-8, 2)

 

위 시구는 내용이 이해되지 않는다. 누가 복수를 한단 말인가, 시인이 라우라에게? 아니면 사랑, 즉 아모르가 라우라에게 복수를 하려고 시인에게 화살을 쏘아 자격도 없는 그가 그녀를 사랑하도록 만들었단 말인가? 사랑, 즉 아모르의 화살에 맞은 이는 분명 시인 자신이다. 다음의 시구를 보면 화살에 맞은 시인의 고통과 벗어나려는 헛된 노력이 구구절절 이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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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랑무늬영원
한강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2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수록작>

회복하는 인간

훈자

에우로파

밝아지기 전에

왼손

파란 돌

노랑무늬영원

 

2003년부터 2012년까지 긴 시간에 걸쳐 발표한 단편 작품집이다. 전체를 하나로 관통하는 명확한 의도를 가지고 쓴 작품들이 아니다 보니 일관된 통일성이나 주제 의식을 찾기 어렵다. 그럼에도 어느 정도는 작가 특유의 작품관을 확인할 수 있으니, 폭력적 남성성에 대한 거부감이 우선적으로 눈에 띈다. 작품 속 여자의 결혼생활은 가정 폭력과 결부된 사례가 제법 있다. 여자가 우호적 공감으로 추억하는 남자의 모습은 여성적 남성이다. 그들은 때로 여성이 되기를 꿈꿀 정도다.

 

작중 여자들은 여러 사유로 절망과 고통의 상황에 놓여 있다. 가정 폭력으로 비롯한 결혼생활의 실패, 교통사고, 가족 간 단절, 팍팍한 가정생활 등 원인은 다양하지만 칠흑 같은 한밤중의 막막한 처지에 놓여 있음은 유사하다. 하지만 작가는 이들을 방치하지 않는다. 비록 대낮처럼 환하지는 않더라도 어스름한 새벽빛이나마 그들에게 비춘다. 어쨌든 삶은 방기하지 않고 계속 영위할 가치는 있어야 한다면서. 이러한 경향성에서 벗어난 작품이 <왼손><에우로파>라는 점은 시사적이다. 양자 모두 화자이자 주인공이 남자라는 공통점이 우연의 일치가 아니다.

 

이하 각 작품에 대한 소회는 지극히 개인적이며 피상적이다. 솔직히 읽는 도중에도, 읽은 후에도 작가가 글에서 무슨 말을 하고 싶어하는지 확연히 다가오지 않아 그냥 내 맘대로 얼토당토않게 몇 자 억지로 끄적거린다.

 

<노랑무늬영원>

 

표제를 한창 오독하였다. 영원은 추상명사가 아니라 도롱뇽과를 지칭하는 구체명사다. 노랑무늬영원은 실제 도롱뇽의 한 종이다. 난데없이 영원이 등장하는 이유는 뭘까.

 

개를 피하려다 교통사고로 왼손을 못 쓰게 되고 오른손도 간신히 움직일 뿐이며 척추도 다친 여자. 그녀는 그림 그리는 사람이었다. 인생의 중심을 차지하던 그림을 더는 손댈 수 없게 된 그녀. 일상생활조차 혼자의 힘으로는 해나가기 어려운 신세가 된다. 여자와 남편 사이도 점차 불편하고 냉랭해진다. 부부 사이란 원래 그런 법인데 여자의 사고는 이를 가속하였다. 이건 누구의 잘못이라고 할 수 없는 문제다.

 

정말로 소중한 존재는 그것을 상실했을 때 비로소 알게 된다고 하지 않던가. 그녀는 삶의 중심에서 주변부로 밀려나면서 삶에 대한 소외감을 절감한다. 그녀와 같은 상황에 놓였다고 해서 모두가 그녀처럼 느끼지 않는다. 예술가로서 그녀의 예민한 감각은 상실과 소외를 확장 수용하면서 허무감에 빠져든다.

 

그곳은 내 집이 아니다. 나에게는 집이 없다. 이 삶은 나의 삶이 아니다. 어떤 정서적 유대도 느낄 수 없다. 어떤 장소, 어떤 기억, 어떤 미래에 대해서도. (P.241)

 

삶의 무의미성에 허우적대는 그녀는 옛 친구의 우연한 연락으로 거의 잊히다시피 한 등산과 남자, 사진의 추억을 회상한다. 추억 속 남자의 죽음 소식을 알게 된 그녀는 문득 살고 싶다는 마음이 든다. 반불구가 된 오른손의 감각을 회복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도롱뇽의 잘린 앞발이 새로 생겨나는 것처럼 새로 태어나게 해야 한다, 처음부터.

 

만일 내가 이 세상에서, 사랑을 가진 인간으로서 다시 살아나가야 한다면, 내 안의 죽은 부분을 되살려서 그렇게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그 부분은 영원히 죽었으므로.

그것을 송두리째 새로 태어나게 해야 하는 것이다. 처음부터 다시 배워야 하는 것이다. (P.296)

 

그녀 자신이 인정하듯이 사고를 당한 것과, 이후의 삶의 태도가 필연적으로 이어진 것은 아니다. 그동안 그녀는 그림을 삶의 중심에 놓고 그림 속으로 도피하는 삶의 방식을 선택하였다. 옛 친구 세 모자의 평범하지만 단란한 삶의 일상, 사진을 찍은 남자의 신원을 파악하기 위한 과정에서 그림 이외는 알지 못했던 또 다른 삶의 양태를 그녀는 보게 되었다. 기존 작업과는 다른 그림 작업을 통해 계속 예술가로서 삶을 꾸려나갈 수 있다는 발상조차도. 문득 그녀는 자신의 손이 도롱뇽의 그것처럼 새로 돋아나옴을 느낀다. 그것은 가장 가벼운 동시에 가장 생생한 생명력의 표출이다.

 

<파란 돌>

 

한밤중 잔잔한 독백으로 풀어내는 담담하면서도 애틋한 연가. 연인은 이승이 아닌 하늘나라에 있다. 서른일곱의 여자는 자살을 앞두고 그를 떠올린다. 대개 그러하듯 자신은 잘 지낸다고 둘러대면서. 회상 속 남자는 전형적 남성성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다. 조금만 피를 흘려도 생명에 위험이 되는, 항상 언행을 느리고 차분하게 유지해야 하는 사람. 그런데도 끝내 저세상으로 떠나간 사람. 여자였기를 바라던 남자. 칠 년여를 함께 살았던, 그리고 여자의 목을 조르던 남자와는 정반대 유형의 남자.

 

처음이자 마지막이 된 그 입맞춤 이후, 나는 어떤 남자에게서도 더 이상의 기쁨을 얻지 못했습니다. 어떤 흥분과도, 무아경의 희열과도 바꿀 수 없을 겁니다. 나이만 먹은 소년이었던 당신의 겁먹은 손이 숨죽이며 내 뺨에 머물렀던 순간을. (P.211)

 

이 작품은 남편의 가정 폭력을 배경으로, 피해자 여성과 가해자 남성의 뚜렷한 대비를 통해 폭력적 남성성을 파헤친다. 그녀의 입맞춤은 이성 간의 그것이라기보다는 여성 간의 사랑에 가깝다. 깊은 어둠 속에서 진행된 독백은 서서히 아침을 맞이하며 분위기도 죽음에서 삶으로 변화한다. 여자의 연인은 죽음을 맞이하였지만 삶을 갈구하였다. 삶을 버리고 죽음을 바라는 여자와는 다르다.

 

그때 갑자기 안 거야. 그걸[파란빛 도는 돌] 주우려면 살아야 한다는 걸. 다시 살아나야 한다는 걸. (P.212)

 

날마다 운동하는 그녀의 루틴은 알게 모르게 이미 삶을 지향하고 있다. 살아 있음을 느끼는 건 신체의 역동성과 감각에서 가장 비롯하지 않는가. 여자가 문득 연인과 파란 돌을 떠올리는 건 고통과 비참 속에서도 삶은 이어져야 함을, 삶 속에서 생명의 본원적 가치가 존재함을 나타내고자 함이 아니겠는가.

 

<왼손>

 

블랙 코미디 같은 단편이다. 우스꽝스러운 동시에 섬찟함을 안겨주는 설정은 단지 주인공에게 발생한 개인적 재난으로 치부하기 어렵다. 사람은 누구나 가면을 쓴다. 본능에 따른 충동만으로 사회적 인간으로 살아남기 어렵다. 이성과 도덕률로 감정과 행동을 통제한다. 나의 왼손이 내 통제를 벗어나 제멋대로 움직인다면 매우 난처할 것임은 뻔하다.

 

가장 나쁜 것은, 왼손이 스스로 움직이기 시작할 때 그것이 무슨 일을 하려 하는지 그가 전혀 예측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P.157)

 

왼손은 왜 갑자기 독자적 움직임을 개시하였을까. 아이가 생기면서 아내와의 가정생활이 순탄치 않게 되어서인지, 숙면을 취하지 못하여 신경이 불안정한 상태에 놓여서인가. 예전 여자친구 선혜를 알아차리고 버스 하차 벨을 누르며, 그녀의 뺨을 어루만져 극적인 관계 진전을 이루어낸 것은 모두 왼손 덕분이다. 그렇게 보면 왼손은 주인공의 숨겨진 본능을 간취하는 능력이 탁월한 모양이다.

 

일시적 성공은 영원하지 못하다. 사람이 본능만으로 온전히 살아갈 수 없듯이 성진 또한 선혜와의 관계에 갈등한다. 그가 이성을 강하게 의식할수록 왼손의 저항은 강렬해진다. 회사에서 그리고 선혜와의 관계에서, 마침내는 아내에게서 그는 버림받고 파국에 놓인다.

 

혹시 그런 경험 해봤어? 내 안에, 전혀 모르는 사람이 들어있는 것 같은 때. (P.152)

 

이것은 선혜의 말이지만 성진의 처지를 정확히 기술하고 있다. 평범한 유부남인 성진에 발생한 사건이지만, 우리는 그를 향한 안타까운 동정심을 금할 길 없다. 아닌 밤중에 날벼락이라고, 그에게 근원적인 잘못이 있던가. 세상 누구도 성진처럼 되지 말라는 법이 없다. 게다가 이 작품은 결혼생활에 대한 근본적 의구심을 제기한다. 성진의 결혼생활, 선혜의 결혼생활을 볼 때 과연 행복한 결혼생활이란 가능할까.

 

<훈자>

 

훈자, 파키스탄과 중국 국경지대의 산간 오지. 그녀는 언제나 훈자를 생각한다. 그곳은 그녀가 일상에서 벗어나 꿈꿀 수 있는 유일한 장소이므로. 그곳을 향한 소망을 떠올리며 일상의 고단함을 버텨낸다. 가정에서도 직장에서도 주변인에 머무는 남편, 가계를 꾸려나갈 단 한 사람인 그녀, 그리고 돌봄을 필요로 하는 아이. 그녀는 알고 있다. 자신이 훈자에 갈 가능성이 거의 없음을. 그럼에도 훈자를 꿈꿀 수 있기에 현실을 살아갈 수 있는 것이다.

 

더 이상 그 여자는 훈자를 생각하지 않았다.

훈자인 훈자도, 훈자가 아닌 훈자도 생각하지 않았다. (P.52)

 

그녀는 왜 훈자를 생각하지 않는가. 팍팍한 삶이 더는 훈자 생각만으로 위안 삼을 수 없도록 악화하였음이 아니겠는가. 다친 아이, 고단한 업무. 피곤 속에서 그녀는 도로 위 핸들을 굳게 다잡는다. 죽은 들고양이 따위로 무리하게 차선을 바꿀 수는 없다. 그녀는 무슨 일이 있더라도 견뎌낼 것이다. 그녀의 모습을 두고 왈가왈부 촌평을 하는 건 적합하지 않다. 그녀는 전심전력으로 삶을 다투고 있기에.

 

불안하게 큰 커브를 돌며 그 여자는 눈을 부릅뜬다. 앞차가 뱉어 내는 브레이크 등의 불빛이, 끈덕지게 술렁이는 도로의 어둠이 핏물처럼 그 여자의 눈에 비쳐 어른댄다. (P.58)

 

<회복하는 인간>

 

괜찮아. 진짜 금방 낫는대. 시간만 지나면 낫는대. 누구나 다 낫는대. (P.31)

 

육신의 상처는 금방 나을 수 있다. 주인공인 당신 발목의 화상은 더디지만 어쨌든 회복될 것이다. 마음의 상처는 금방 나을 수 있을까. 어느 날 마음이 갈라져 버린 당신과 당신 언니의 관계는 결코 회복되지 못하였고 앞으로도 회복의 가능성은 없다. 그녀는 이 세상에 없으므로.

 

지금 당신이 겪는 어떤 것으로부터도 회복되지 않게 해달라고, 차가운 흙이 더 차가워져 얼굴과 온몸이 딱딱하게 얼어붙게 해달라고,... (P.34)

 

이것이 당신의 잘못인가. 그녀의 비밀을 알고 있다는 사실 자체를 되돌릴 수 없다. 독자의 눈에 결코 당신에게 책임을 물을 수 없지만, 당신은 계속 자책한다. 당신이 조금만 더 다가섰다면 관계는 달라지지 않았을까 하면서. 자전거를 타다 넘어진 그녀의 생각은 서글픔을 넘어 깊은 슬픔을 담고 있다.

 

<에우로파>

 

화자와 인아는 남사친, 여사친의 관계다. 인아는 의사 남편과 이혼하였다. 원인에 가정 폭력이 있었음을 대강이나마 짐작할 수 있다. 인아는 자신의 결혼생활을 장례식에 비유한다. 인아의 아름답고 낯선 노래를 들으면서 화자는 자신의 숨은 욕망을 불현듯 드러낸다.

 

(너 같은 목소리를 갖고 싶고, 너 같은 몸을 갖고 싶어. 어떤 밤에는, 그 갈망 때문에 미칠 것 같을 때도 있어.) (P.77)

 

이제 그들의 관계는 새로운 장으로 넘어간다. 두 사람은 이제는 이성을 의식할 필요가 없다. 남성성의 폭력을 경험한 여자와 스스로 남성성을 버리고자 하는 남자. 두 사람에게 남성성은 부정적 요소다. 인아가 꾸는 악몽도 본질은 동일하다. 화자는 여장을 한 채 도시의 번화가를 거닐며 환상에 사로잡힌다.

 

얼음으로 뒤덮인 목성의 위성 에우로파처럼, 우리네 삶은 단단한 껍질 속에 연약한 속살을 감춰 둔 채 세상에 맞서고 있는지 모르겠다. 기쁨보다는 슬픔이, 즐거움보다는 아픔이 더 많은 삶의 순간일 것이다. 에우로파가 커다란 운석을 피하지 않듯 삶의 매 순간은 회피할 수 없다. 인아는 묵묵히 버티면서 행로를 찾아 헤맬 것이다. 하지만 화자는? 위선의 탈을 뒤집어쓴 화자의 앞날은 어떠할지 알 수 없다.

 

<밝아지기 전에>

 

남동생을 죽음에 이르게 한 죄책감은 은희 언니의 삶을 송두리째 뒤바꾼다. 아무 일 없었던 듯 맨정신으로 남들처럼 평온한 삶을 산다는 건 더는 그녀에게 불과한 일이 되었다. 수년이 지난 후 화자가 외국에 사는 그녀를 만나러 가기 직전 그녀는 시신으로 귀국한다.

 

화자는 지난 연말 K 선생님의 전시회에 갔다가 그가 말하는 그의 심장과, 그의 친구 전시회에서 본 그의 친구의 심장 얘기를 떠올린다. 거대하고 끔찍한 덩어리로서의 심장과, 아주 조그마한 0.3밀리 샤프펜슬로 나타내는 심장. 본질에 있어 크기는 중요치 않다, 고통은 마찬가지이므로.

 

하늘은 파랗고, 차가운 햇빛이 우듬지의 윤곽을 에워싸고 있다. 한동안 고개를 뒤로 젖히고 올려다보다가, 내가 그것들을 아름답다고 느끼고 있었다는 것을 깨닫는다. 냉혹할 만큼 완전하게 은희 언니를 잊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P.104)

 

삶은 고통으로 충만하지만, 내내 어둡고 슬픈 것은 아니다. 겨울이 지나면 봄이 오고, 밤이 여위면 새벽이 다가오듯. 밝아지기 전이 가장 어둡듯이 우리는 눈앞의 빛을 알지 못한 채 당장의 어둠에만 몸부림치기에 십상이다. 두루미 종류의 흰 새의 죽음, 은희 언니의 죽음에서도 화자는 무심코 세상의 아름다움을 본능적으로 인식한다.

 

은희 언니는 돌아올 거라고 했다. 돌아오면 이전과는 다른 삶을 살 거라고 했다. 후회와 고통만이 점철한 삶이 아닌 삶을. 자책하지 않는 삶을. 그것은 화자가 딸 윤이와 함께 하는 삶과 멀지 않은 삶이리라. 생과 사의 경계에 올라선 사람만이 깨달을 수 있는 생명력으로 그득한 삶. 그래서 화자는 문장을 고쳐 쓴다. 회복된 것은 은희 언니만이 아닐 것이다.

 

그녀가 돌아오지 않는다. 그 문장을 지우고 기다린다. 온 힘으로 기다린다. 파르스름하게 사위가 밝아지기 전에, 그녀가 회복되었다, 라고 첫 문장을 쓴다. (P.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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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식주의자
한강 지음 / 창비 / 200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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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식주의자>, <몽고반점>, <나무 불꽃>으로 구성된 삼부작 연작소설이다. 이 중 <몽고반점>2005년 이상문학상 대상 수상작이면서 내가 한강이라는 작가를 처음으로 알게 해준 작품이기도 하다. 이후 개인적으로 한강 작가를 애호하게 되었음을 덧붙인다.

 

부커상 수상작이기도 한 이 작품을 이제사 찬찬히 읽어보면서 작품에 대한 좋고 싫음의 편차가 상당히 클 수 있겠다 싶다. 소설 내내 비치는 파격적 소재와 성적 묘사, 여성주의, 폭력성에 대한 극단적 거부감 등이 보수적인 독자를 불쾌하게 만들 여지가 충분하다. 후기작의 시적 산문 문체에 사용하지 않았기에 독서 자체는 어렵지 않다. 건조할 정도로 담백한 필체는 조만간 그의 미래를 살짝 드러내기도 하지만.

 

삼부작의 주인공은 분명 영혜이지만, 그녀는 화자로 전면에 나서지 않는다. 작중에서 그녀는 말수도 적고 거의 수동적이다. <채식주의자>는 그녀의 남편, <몽고반점>은 형부, <나무 불꽃>은 그녀의 언니가 각각 화자를 맡는다. 그들의 발언과 생각을 통해 독자는 영혜의 생각과 행동을 이해해 보지만 그것은 결코 영혜 자신의 목소리가 아니기에 태생적 한계를 지닌다.

 

<채식주의자>라는 표제는 어쩌면 다소나마 어그로를 끌려는 의도가 있지 않나 싶다. 영혜가 채식주의자가 되었다는 사실 자체는 중요하지 않다. 보편적이지는 않지만 당시에도 채식주의자는 있었으므로. 다만 그녀의 선포는 너무 급작스럽고 공격적이다. 자신은 채식주의자이지만 남편을 비롯한 다른 사람들은 그렇지 않음을 영혜는 인정하지 않는다. 그녀가 브래지어 차는 걸 싫어하는 행동을 통해 단초를 보였음에도 남편은 그녀를 완전히 오해하고 있다. 그녀의 육식 거부는 채식 자체보다도 동물성이 갖는 폭력성에 대한 거부에 가깝다. 남편과의 잠자리마저 저항하는 영혜가 내뱉는 젖가슴 예찬론은 폭력성에 대한 반감을 여실히 표출한다.

 

내가 믿는 건 내 가슴뿐이야. 난 내 젖가슴이 좋아. 젖가슴으론 아무것도 죽일 수 없으니까. 손도, 발도, 이빨과 세치 혀도, 시선마저도, 무엇이든 죽이고 해칠 수 있는 무기잖아. 하지만 가슴은 아니야. 이 둥근 가슴이 있는 한 난 괜찮아. 아직 괜찮은 거야. (P.43)

 

동서와 처형이 나중에 영혜의 남편에 대해 부정적인 평가를 내리지만, 사실 그는 평범한 유형의 남자다. 가정과 회사 생활에서 그는 어떻게든 버텨내려고 애쓴다. 그에게 부족한 점은 아내의 변신을 좀 더 심각하고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못하였고, 회사 부부 모임에 데려갔다든지 처가 식구들의 도움을 받으려고 했다든지 하는 행동이다. 그렇다고 그를 무작정 비난하는 건 온당치 못하다. 그로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아내의 행동이므로. 칼로 손목을 긋고 병원에서 새를 물어뜯는 아내를 받아들인다는 건 어떤 평범한 남편도 간단치 않다.

 

<몽고반점>에서 형부와 영혜의 행동을 어떻게 평가해야 할 것인가. 두 사람의 행위 결과는 파국으로 치달아 형부 가정은 파탄 나고 영혜는 정신병원에 입원하게 된다. 정신이 오락가락하는 처제를 성적으로 이용하고 유린한 형부를 비난하면 충분한가, 정말로 영혜는 제정신이 아닌 상태라고 할 수 있는가. 형부가 처제 엉덩이의 몽고반점에서 보았던 환상은 무엇이고, 처제가 자신의 몸에 그린 식물과 꽃 그림을 지우지 않은 까닭은 무엇인가. 자신의 몸에 역시 식물 그림을 그린 형부와 영혜의 육체적 결합이 갖는 함의는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가. 그것이 아름다운 동시에 추악한 장면이라면 작가는 그런 이중적 장면을 생생한 표현으로 그려냈는가. 식물의 섹스를 흉내 냈지만 두 사람의 행위는 역시 동물의 그것을 벗어나지 못하였음인가. 그런데 영혜는 왜 이제 꿈을 꾸지 않게 되기를 바라는 걸까.

 

앞선 소설들에서 어렴풋하고 은근슬쩍 엿보이던 작가의 의도는 <나무 불꽃>에서 좀 더 명확해진다. 우리는 여기서 제부는 감탄하고 남편은 등한시한 영혜의 언니를 비로소 자세히 들여다볼 수 있다. 뛰어난 생활 능력과, 겉보기에 성공적인 가정생활이 사실은 끝없는 버티기 노력의 산물임을. 현실과 타협하고 수용하며 지쳐가는 그녀와 달리 원초적 본능과 목소리로 현실을 거부하는, 비록 죽음을 목전에 둔 상황에서도, 동생에 대해 부러움과 시샘의 양가적 속내를 보게 된다. 그녀에게 갖는 우리의 감정은 안타까운 동정심에 다름 아니다, 그것은 우리 역시 그녀와 별반 차이가 없다는 동류의식과도 같다.

 

영혜가 육식을 거부하게 된 계기인 꿈과 그에게 육식을 물리적으로 강제하려는 아버지의 행동에 있어 공통점이 있다. 그것은 바로 잔인한 폭력성이다. 개는 아버지 오토바이에 묶여 지쳐 나자빠질 때까지 피눈물을 흘리며 죽어간다. 딸의 입에 강제로 고기를 쑤셔놓고 뜻대로 안 되자 뺨을 때리는 행동에서 우리는 전근대적 가부장제의 유산인 뿌리 깊은 폭력성을 확인하게 된다. 폭력에 대한 그녀의 반발과 혐오감은 <채식주의자>의 충격적 결말인 작은 새를 물어뜯는 영혜의 모습에서 역설적으로 드러난다. 작가는 여기에서 육식은 동물성의 증표이며, 폭력성과도 짙게 결부하고 있다. 육식은 고기를 먹는 행위이며, 고기를 동물을 죽여야 획득할 수 있다. 그것은 생명체의 목숨줄을 강제로 끊어야 하며 피를 흘려야 가능하다. 우리는 생존을 핑계로 다른 생명체의 목숨을 앗는다.

 

어떤 고함이, 울부짖음이 겹겹이 뭉쳐져, 거기 박혀 있어. 고기 때문이야. 너무 많은 고기를 먹었어. 그 목숨들이 고스란히 그 자리에 걸려 있는 거야. 틀림없어. 피와 살은 모두 소화돼 몸 구석구석으로 흩어지고, 찌꺼기는 배설됐지만, 목숨들만은 끈질기게 명치에 달라붙어 있는 거야. (P.61)

 

<몽고반점>은 동물성과 대비되는 식물성을 지향한다. 언뜻 식물은 정적이며 수동적인 존재로 간주되지만, 영혜의 형부는 식물과 꽃을 인간의 나체와 결합함으로써 더없이 역동적이며 생명력으로 충만한 존재로 변화시킨다. 동물성이 폭력적인 반면 식물성은 비폭력과 평화로움을 나타낸다. 동물성은 죽음으로 이어지지만 식물성은 무한한 삶과 번창으로 뻗어나간다. 형부가 처제의 몸에서 육체적 욕망을 갈망하고, 그토록 무감각하게 반응하던 처제가 성적 욕망을 느끼게 되는 것 역시 마찬가지 동인이다. 그들의 행위는 사회적으로 금기시되는 것이지만, 예술적 영감과 식물적 관능에 함몰된 형부는 통념의 끈을 넘어선다. 비록 세속적 파멸이 눈앞에 있더라도.

 

언니, 내가 물구나무서 있는데, 내 몸에 잎사귀가 자라고, 내 손에서 뿌리가 돋아서... 땅속으로 파고들었어. 끝없이, 끝없이... , 사타구니에서 꽃이 피어나려고 해서 다리를 벌렸는데, 활짝 벌렸는데... (P.156)

 

외딴 정신병원에 입원 중인 영혜는 식음을 거부한다. 그녀를 찾아간 언니에게 그는 비밀을 털어놓듯 자신이 더는 동물이 아닌 나무라고 속삭인다. 음식 따위는 필요 없이 햇빛만으로 충분한, 그래서 물구나무서기 자세로 거꾸로 있어야 비로소 완전한 나무에 가까워진다며. 병원 관계자와 언니가 보기에는 황당하기 그지없지만, 영혜의 논리에서는 완벽하다. 동물로서의 인간 영혜는 죽지만, 식물로서의 나무 영혜는 새롭게 자라나는 것이다. 누구에게도 피해를 받지 않고 아무에게도 피해를 주지 않으며 대지 속에서 대지와 함께 살아가는 존재. 나무의 초록빛 불꽃은 온전한 생명의 불꽃이 아닐까.

 

여성주의가 강제와 억압의 거부이자 여성 몸의 주체로서 재인식이라고 한다면, 영혜는 여성주의자다. 그의 어머니와 언니는 봉건적 가치관에서 아직 탈피하지 못한 상태이며, 그의 아버지는 전형적 남성중심주의자다. 이 작품을 여성주의 관점에서 해독할 수 있지만, 동물을 남성, 식물을 여성으로 무리하게 비정하지 않는다면 한계에 봉착한다. 여기서 작가는 여성주의 자체보다 동물적 폭력성에 더욱 관심을 기울이고 있음을 알게 된다.

 

자신이 오래 전부터 죽어 있었다는 것을. 그녀의 고단한 삶은 연극이나 유령 같은 것에 지나지 않았다는 것을. 그녀의 곁에 나란히 선 죽음의 얼굴은 마치 오래전에 잃었다가 돌아온 혈육처럼 낯익었다. (P.201)

 

문득 이 작품의 진짜 주인공은 혹시 영혜의 언니가 아닐까 엉뚱한 생각을 해본다. 각 단편에서 주요 인물들은 등장했다가 사라진다. 영혜의 남편도, 형부도, 부모도 모두. 영혜는 꾸준히 존재감을 드러내지만 독자 누구나 알고 있듯 그를 정상적인 사고의 인물이라고 인정하기는 어렵다. 비록 그가 던지는 화두가 강렬하고 메시지가 묵직하지만. 영혜의 언니는 매 단편마다 충격적 경험을 하고 이를 수습하는 역할을 맡는다. 동생의 자해 행위, 남편과 동생의 기묘한 육체 결합, 식음을 거부하고 스스로 나무가 되기 위해 죽어가는 동생. 모두가 도망치고 이성의 끈을 놓을 때 그녀는 온몸으로 이 모든 것을 감당한다. 자신의 삶을 망가뜨린 동생을 용서할 수 없도록 미워하면서도 포기할 수 없음을. 과연 그녀의 자각처럼 그녀는 세상을 살아본 적이 없는 건가, 자신은 이미 죽어 있는 존재인가? 이는 우리 모두에게 던지는 질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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