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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라이펜제의 태수 ㅣ 부클래식 Boo Classics 57
고트프리트 켈러 지음, 오청자 옮김 / 부북스 / 2015년 4월
평점 :
고트프리트 켈러가 1877년에 발간한 <취리히 단편집>에 수록된 5편의 노벨레 중 한 편으로 국내에는 처음 소개되었다. 수 년 전 그의 <초록의 하인리히>와 몇 편의 <젤트빌라 사람들>을 읽은 후 일종의 이삭줍기라고 할 수 있다.
주인공인 살로몬 란돌트는 실제 그라이펜제의 태수를 지낸 실존인물이다. 즉 이 작품은 역사적 사실을 바탕으로 한 소설이라고 할 수 있는데 시대적 배경과 주인공 외 세부사항까지 사실에 기반을 두었는지 아니면 순전한 창작인지는 알 수 없다.
내용은 좀 당황스러운데, 주인공이 자신이 한때 결혼하고자 하였던 여성 다섯 명을 모두 한 자리에 초대하여 그들과 함께 유쾌한 시간을 보낸다는 설정이다. 목차를 보면 각 장의 이름이 주로 새의 이름인데, 이는 란돌트가 사랑했던 여성들의 별칭이다. 살로메는 오색방울새, 피구라는 어릿광대, 벤델가르트는 함장, 바바라는 종달새, 아글라야는 지빠귀.
예나 지금이나 사랑이 바로 결혼으로 이루어지지는 않는다. 결혼의 현실성은 무시할 수 없다. 예술에서 순수한 사랑과 결혼을 그토록 찬미하는 것을 보면 역설적으로 현실에서는 무척이나 드문 경우임을 추론할 수 있다. 우선 상대방의 집안과 경제적 조건이 눈에 띈다. 건강 상태도 신경 써야 하고 취미랄까 취향이 맞는지도 고려 요소다. 무엇보다 변치 않는 마음이 있어야 할 것이다. 더 조건이 좋거나 마음이 끌리는 사람이 나타난다면 곤란할 테니.
사랑하는 짝을 얻고자 할 때의 양태는 사람이나 동물이나 별 차이가 없다. 동물 프로그램을 보면 자신의 힘과 건강을 과시하거나 멋지게 치장한 모습으로 보무당당하게 주위를 배회한다. 불확실은 확실로, 애매함은 긍정적으로 포장하는 과장됨의 미학도 용인된다. 이 과정에서 여성을 결코 시험해서는 안 된다. 그 실수를 란돌트는 살로메에게 했다.
자기의 출신과 미래의 전망을 불가사의할 정도로 미심쩍게 묘사함으로써 그녀의 애정이 확고한가를 시험해 보려는 호기심이 그를 자극했다. (P.29~30)
다섯 명의 여성 중 란돌트와 가장 잘 어울렸을 걸로 추정되는 인물은 피구라다. 그녀의 밝은 성격과 지적, 정신적 면모 등은 란돌트의 단점을 보완하고 강점을 더욱 빛나게 해주었을 테니. 피구라와 란돌트는 결단성이 부족했다. 진정한 사랑이라면 확실치 않은 가족병력을 우려해서 결혼을 포기하지는 않아야하지 않겠는가.
그가 피구라와 더 나아가지 못한 점이 아쉽다면, 함장과의 관계는 안타깝기 그지없다. 주변인물 중에는 당사자를 도우려는 순수한 마음으로 이것저것 두 사람의 관계에 개입하는 경우가 있는데, 여기도 마찬가지다. 누구나 완벽하지는 못하다. 도저히 고칠 수 없는 결함이 아니라면 시간과 노력은 단점을 보완할 수 있다. 사람들은 순간의 인상과 판단에만 의존하여 미래에 눈감는다. 피구라와 그의 오빠처럼. 그들은 오직 란돌트를 위하는 마음에서 함장과 그를 떼어놓았다. 그것이 잘한 행위였는지는 훗날이 알려준다.
그는 예술애호가로서 자주성에서나, 근원적으로 풍부한 사고에서, 그리고 자연에 대한 직접적이며 독창적 이해에서 현저하게 높은 수준에 있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이러한 방법과 방식으로 과감하고도 신선한 창작활동이 이루어졌는데, 이 창작활동은 가장 진정한 의미에서의 영원한 사랑의 열기로 충만해 있었다. (P.104)
란돌트는 예술가이기도 하다. 그의 예술적 취향과 삶의 지향을 공감하지 못한 여성과 결혼한다면 그의 삶은 얼마나 불행해질 것인가. 예술을 포기한다면 종달새와 결혼을 얻을 수 있음은 분명하다. 하지만 그것이 임시방편이며 본성을 속이는 선택임을 란돌트는 너무나 잘 깨달았다.
아글라야와의 만남은 차라리 이해될 수 있다. 그녀가 란돌트를 속인 짓도 너그러이 용서된다. 그녀야말로 자신의 사랑을 위해 앞뒤 가릴 처지가 아니었으며, 란돌트의 도움을 간구했던 것이었다.
주인공은 매우 마음이 너그럽다. 자신을 받아들이지 않고 떠나간 여성들이 괘씸하고 미울 텐데 한결같이 친절과 호의를 베푼다. 물론 그녀들을 골탕 먹이기 위한 깜짝쇼를 벌이지만 악의를 품고 있지는 않다. 그럼에도 그가 다섯 여인을 한자리에 모은다는 발상은 솔직히 이해하기 어렵다.
그것은 란돌트가 결혼에 대한 일말의 상념도 품지 않고 있어서 가능하였으리라. 그는 이제 과거의 미래가 불분명한 처지가 아니라 성공한 고위 관리로서 존경받는 지위에 있다. 란돌트의 가슴 속에 과거의 아릿한 사랑은 이제 흐뭇한 추억으로 자리 잡았다. 사람 사이의 관계는 부담 없는 상황일 때 마음 편하고 유쾌한 분위기가 조성되기 마련이다.
나는 어떤 거친 현실의 입김에 의해서도 흐려지지 않은 추억을 다섯 번 들여다보는 거울을 소유하는 행운을 누릴 수 없었을 것이오. 나는 지금 사랑의 신들이 다섯 개의 돌들을 포개어 놓은 우정의 탑에 살고 있는 즐거움을 누리고 있는 것이오! 그것은 진정 시간이 체념의 대가로 내게 가져다준 장미들이오. 하지만 그 장미들은 얼마나 아름답고 영원한가요! (P.146)
켈러가 그라이펜제의 독특한 태수를 주인공으로 노벨레를 쓴 연유는 무엇일까. 작품집의 표제처럼 고국의 역사와 인물을 드러내고자 하는 욕망도 분명 가졌을 것이다. 사실과 허구를 정교하게 교차시키면서 인물의 행동과 삶을 통해 인간사의 복잡다기함을 보여주고 싶은 의도도 부분적으로 지녔으리라. 무엇보다도 그것이 선과 악의 대립, 탐욕과 증오 같은 격렬한 감정과 행위의 분출이 아닌 자연스러움과 관용의 느긋한 미학과 결부되어 독자에게 흥미와 기쁨을 주고 있는 점이 특필할 만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