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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르멘 ㅣ 펭귄클래식 123
프로스페르 메리메 지음, 송진석 옮김 / 펭귄클래식코리아 / 2012년 3월
평점 :
품절
작품해설에서 옮긴이는 이 두 작품을 ‘유혹과 열정의 주제’(P.265)로 파악한다. <카르멘>이야 그렇다 하더라도 <콜롱바>가 여기에 해당될지는 조심스럽다. 나로서는 차라리 ‘문명과 야성 또는 이성과 비이성의 주제’로 이해하고 싶다.
그것은 기이하고도 야만적인 아름다움이었다. 처음 보고는 놀라지만 잊을 수 없는 얼굴이었다. 특히 눈은 사나우면서도 관능적인 표현을 갖고 있었는데, 그 이후로 나는 그 어떤 인간의 시선에서도 그런 표현을 본 적이 없다. (P.28)
<카르멘>에서 초반부의 돈 호세는 이성과 합법의 옹호자다. 카르멘의 유혹에 끌리면서 그는 점차로 비이성과 불법의 영역으로 빠져든다. 이성보다 감성, 합리보다 열정이 주류가 되면서 그는 파괴적 사랑에 함몰된다. 사랑이 상호에게 이익과 발전이 되지 못하고 서로를 파멸로 이끌고 가는 불행한 사랑. 통상 만나서는 안 될 관계라고 치부되는. 사랑과 소유를 위해 법의 울타리를 안중에도 없으며, 밀수, 강도와 살인마저 낯설지 않다.
당신은 악마를 만났어. 그래, 악마. 악마가 언제나 검은색인 건 아니야. 당신 목을 비틀지도 않았어. 나는 양모로 된 옷을 입었어. 하지만 내가 양인 건 아니잖아. (P.49)
여기서 돈 호세를 비이성의 세계로 유혹한 것은 카르멘의 치명적 매력이다. 팜므 파탈의 하나의 전형으로서 그녀는 세속의 잣대와 이해를 초월한다. 그녀에게는 법률과 도덕은 남의 세상일이다. 순수한 야성. 오직 마음 내키는 대로 자유로운 삶을 구가하기에 그녀는 더욱 매혹적인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녀를 가까이 하는 남성은 모두 파멸의 길로 접어든다.
우리 사이는 이제 끝났어. 당신은 남편으로서 나를 죽일 권리가 있어. 하지만 카르멘은 언제나 자유로울 거야. 보헤미안으로 태어나서 보헤미안으로 죽을 거야. (P.77)
중편인 <카르멘>에 비해 <콜롱바>는 분량 상 장편에 가깝다. 따라서 작품 속 인물의 다중성, 대립과 갈등의 폭과 범위가 한층 심화된다. 작가는 오빠 오르소가 아닌 여동생 콜롱바를 타이틀 롤로 내세웠다. 오르소는 프랑스 문화를, 콜롱바는 코르시카 문화를 대표한다. 근대와 봉건, 이성과 관습을 각각 상징한다. 오르소는 어릴 적부터 육지에서 교육받았기에 이성과 도덕의 가치를 존중하고 준수하려고 노력한다. 콜롱바는 순진한 시골처녀인 동시에 코르시카 전통을 뼛속 깊이 간직하고 있다. 발라타를 부르는 그녀의 모습에서는 무녀적 속성마저 두드러진다.
콜롱바의 눈이 지금까지 그녀가 보지 못했던 영악한 기쁨으로 빛났다. 야만적 명예의 관념을 광적으로 신봉하는 이 키 크고 강인한 여인은 이마에 가득한 오만, 그리고 입술을 구부린 냉소적 미소와 함께 무장한 청년을 마치 불길한 원정에라도 데려가는 듯한 모습을 보이면서 리디아 양에게 오르소의 두려움을 떠올리게 했다. 그녀는 악령이 그를 파멸로 이끌고 가는 것을 보는 것만 같았다. (P.147)
여기서 독자는 코르시카의 독특한 관습인 방데타가 갖는 깊은 문화적 함의에 놀랄 수밖에 없다. 친족의 살해에 대한 복수는 어느 문화권에서도 불가피성을 인정받는다. 다만 방식에 있어 코르시카는 정면 대결이 아닌 암살과 기습을 허용한다는 데서 제한적 정당성을 지닐 뿐이다. 여기서 법적 판단은 개입하지 않는다. 생각하고 믿는 바대로 행하면 그뿐이다. 공식 사회에서는 매장되지만 산적이 되어 암암리의 영웅이자 권력자로 자리 잡는 모순적 지위를 누린다.
아버지의 죽음에 대한 복수. 심증은 가지만 물증이 없는 상황. 오르소의 바램과는 달리 사태는 일로 악화되며, 복수의 대결은 불가피하게 된다. 그리고 독자는 알게 된다. 사태 전개의 배후에서 모든 것을 주도하며 심지어 조작마저 서슴지 않는 냉혹한 인물로서의 어린 아가씨 콜롱바. 그에 비하면 오르소는 덩치 큰 애기에 불과하다. 콜롱바가 짜놓은 각본에 따라 무대 위에서 쫓기듯이 어설프게 연기하는 풋내기 배우.
카르멘은 뜨거운 열정의 소유자인 반면 콜롱바는 차가운 열정의 체현자다. 두 사람을 바라보는 작가의 시선은 결코 따뜻할 수 없다. 카르멘은 돈 호세에게 죽임을 당한다. 콜롱바는 복수를 성공리에 마치고 흐뭇해 하지만 그녀를 바라보는 작가와 세인들의 눈초리는 차갑기 그지없다.
“저기 저 예쁜 아가씨 보이지.” 그녀가 자기 딸에게 말했다. “흉안(凶眼)을 갖고 있는 게 분명해.” (P.263)
<카르멘>과 <콜롱바> 모두 지식을만드는지식 판에 이어 두 번째로 읽는다. 다만 <콜롱바>는 첫 번째가 축약본이어서 아쉬웠는데 펭귄클래식 판은 완역본임을 알게 되어 수년 만에 다시 이 책을 읽게 된 계기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