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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튼 동물기 5 ㅣ 시튼 동물기 5
어니스트 톰슨 시튼 글, 그림, 햇살과 나무꾼 옮김 / 논장 / 2000년 1월
평점 :
구판절판
<충직한 양치기 개 울리>
울리의 묘한 성격을 작가는 모두에서 일종의 종 특성으로서 일차적으로 환기시키고 있으며 중간에도 괴팍함을 잊지 않고 언급한다. 헌신적인 사랑과 충성을 바쳤던 주인에게 배신당한 점은 더할 나위 없는 충격이었음을 인정하자. 그럼에도 버림받은 동물들이 새 주인을 만나 고통스런 나날을 벗어나 상대적으로 행복한 시절을 누리는 사례도 상당하다는 점도 기억해야 한다.
배반감과 분노에 일시적으로 본성을 잃을 수 있지만 그것이 영구적인 뒤바뀜으로 나타나 의도적이고 교묘한 살육과 속임수로 점철되었다면 개체의 예외성으로 바라봐야 하지 않을까. 그의 주야로 표변하는 충직한 개와 미친 여우간의 이중성은 자기가 설정한 경계선 내의 가축에 대한 헌신과 경계선 밖에 대한 냉혹함과 함께 충격적으로 다가온다. 특히나 자신의 정체가 탄로 나자 새 주인 가족을 향한 맹렬한 공격 행위는 새삼 모공을 서늘케 한다.
시튼의 글 중에서 가장 기막힌 반전을 가진 이야기로 생각되는데, 더구나 동물 본성의 순수성이 두드러진 동물기 중에서는 드물게 보는 예외적인 사례라고 하겠다. 총명하고 사납고 믿음직하면서도 세상에 대한 증오와 적개심으로 배반을 꿈꾸었던 사례는 비단 울리에 국한되지 않을 것이다. 세상에는 인간 울리가 득시글거린다.
<빈민가의 도둑고양이>
야생의 세계에서만 동물을 찾아볼 수 있는 건 더 이상 아니다. 인간 거주 영역이 팽창하면서 도시 생태계에도 여러 동물들이 자리 잡고 있다. 반려동물을 제외한 대부분은 인간에게 환영받지 못하는 존재지만. 우리 아파트 단지 내도 주인 없는 고양이 서너 마리가 돌아다닌 지 꽤 됐다.
이야기의 주인공인 키티의 어린 삶도 기구하기 이를 데 없다. 형제를 모두 잃고 간신히 목숨을 부지했지만 어미마저 졸지에 사라져 고아가 된 처지. 겨우겨우 연명하여 자라나 낳은 새끼들로 인한 행복도 찰나에 불과한 도둑고양이.
새옹지마는 인생뿐만 아니라 묘생에도 적용되는 원리인 듯. 뜻밖에 왕족 고양이가 되어 상류층의 고급 생활을 누리며 호화 별장에도 머물게 된 키티. 그에겐 이제 고생 끝 행복 시작의 찬란한 삶을 향유하기만 하면 된다. 너무나 행복하기 그지없을 것이다.
의외로 키티는 전혀 행복하지 않다. 굶주리고 지저분하지만 빈민가의 시절을 사무치게 그리워한다. 철이 덜 들었던지 아니면 고생에 찌들어서 행복의 판단 능력이 모호해진 탓일지도 모른다. 배부른 낭만주의자의 헛된 망상은 아닐까. 어쨌든 엄마 찾아 삼만 리처럼 빈민가의 집으로 돌아오기 위한 장도에 오른 키티.
그의 선택에 대한 정당화는 아마도 배부른 돼지에 대한 거부감 또는 통 속의 디오게네스와의 유사성에 가깝다고 하겠다.
키티는 예전에도 그랬듯이 언제까지나 지저분한 빈민가를 진정으로 사랑하는 도둑고양이로 살아갈 것이다. (P.105)
<목도리들꿩 레드러프의 비극>
야생 동물들한테는 도덕도, 권리도 없단 말인가? 말을 못한다고 해서 인간이 자기와 같은 동물들에게 그토록 오랫동안 끔찍한 고통을 주어도 괜찮단 말인가? (P.159)
작가의 어조에는 안타까움을 넘어 선열한 분개마저 담겨 있다. 목도리들꿩 모자의 이야기를 읽다 보면 작가의 심정에 무조건 동조할 수밖에 없다. 그들에게 무슨 잘못이 있던가, 아니면 인간이 그들을 멸족시킬 절박한 생존의 위협에 처해 있던가. 그들이 질병과 천적에 의해 목숨을 잃는 것은 자연의 법칙이라고 하겠다. 단지 재미 삼아서 아니면 탐욕만으로 그들을 최후의 일각까지 추격하는 인간의 행태를 정당화하는 것은 무엇인가?
이 편은 목도리들꿩의 낯설면서도 이국적 아름다움을 자아내는 생태를 잘 묘사한 글이다. 수컷 들꿩이 요란하게 북소리를 내는 대목과 광기의 달에 방랑 본능에 사로잡히는 장면 등은 신기하기조차 하다. 무엇보다도 월령에 따른 목도리들꿩의 삶을 흥미로운 카툰(P.132)과 함께 소개한 점은 시튼의 깊은 통찰력과 예리한 눈썰미를 짐작케 한다.
어미 목도리들꿩은 12마리의 새끼를 낳았는데, 천적과 기생충, 방랑(광기의 달)과 사냥꾼 커디 영감에 의해 레드러프만 남기고 모두 잃었다. 레드러프는 더 혹심하다. 아내와 새끼 10마리 중 5마리가 커디 영감에게 목숨을 빼앗겼다. 심지어 자신마저 커디 영감의 올가미 덫에 걸려들고 말았다. 목도리들꿩만을 추격하는 커디 영감에게는 광기마저 느껴진다. 레드러프의 고통을 끝내 준 부엉이에게 고마움을 느끼게 됨은 작가뿐만이 아닐 것이다.
동물들은 대개 본능에 충실하므로 행동이 예측 가능하다. 따뜻하게 대해주면 선의로 보답하고 학대하면 적대적이 된다. 시튼의 동물기에 수록된 이야기들 면면을 보더라도 야생 여부의 차이만 있을 뿐 대동소이하다.
가끔은 예외도 생기는 법인데, 양치기 개 울리와 도둑고양이 키티의 최종 선택은 인간의 판단기준으로서는 전혀 의외라고 할 만하다. 전자를 과도한 종 특성과 개체적 예외가 특이하게 결합된 드문 사례라고 치부할 수 있지만 과연 그럴지는 모르겠다. 반면 후자는 키티의 선택이 전혀 의외가 아님에 끄덕거리게 되는데 인간도 마찬가지 선택을 할 수 있음에 동의해서다.
목도리들꿩 레드러프의 경우는 인간 본성의 끝자락을 경험한다는 의미에서 역설적이다. 보기 드물게 작가의 분노를 느낄 수 있는 편이기도 하다. 독자는 쉽사리 커디 영감을 비난하겠지만 기실 그는 대다수의 평범한 인간들과 다르지 않다. 오히려 우리 자신도 개인적 욕심을 좇는 와중에 대상과 주변에 피해를 주지는 않는지 되돌아볼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