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튼 동물기 3 시튼 동물기 3
어니스트 톰슨 시튼 글, 그림, 햇살과 나무꾼 옮김 / 논장 / 2000년 1월
평점 :
구판절판


시튼 동물기 전반을 관통하는 대체적 흐름을 복기해보자. 동물 대 동물의 자연 질서에 인간이 개입하여 인간 대 동물 간 대립이 발생한다. 잠시 저항을 해보지만 힘의 우열은 도저히 극복될 수 없기에 동물은 비극적 결말을 맞이하고 만다. 인간과 동물이 평화롭게 공존하는 길은 정녕 불가능할 것인지 안타깝기만 한데 이번 권의 이야기에서는 가능성과 한계가 동시에 제시된다.

 

<비둘기 아노스의 마지막 귀향>

아노스를 야생동물이라고 부를 수는 없다. 전서구로 훈육되고 인간의 보살핌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였을 테니. 매와 송골매보다 인간에게서 한층 유대감을 지녔을 것이다.

 

비둘기로서는 실패한 가정생활에도 그가 맹렬히 집을 그리워하고 독보적인 귀소 감각을 발휘한 것은 단지 본능이었을까? 아니면 적으로 가득한 사방을 둘러보았을 때 그나마 안전을 유지할 만한 곳은 집밖에 없다는 슬픈 진실을 깨달았을 수도 있다.

 

전서구를 애호하는 인간의 포획이 아니었다면 아노스의 곤경은 발생하지 않았다. 조금 양보해서 총알을 날린 사냥꾼만 없었어도 그는 매와 송골매를 우습게 여기며 가뿐하게 귀향에 성공했으리라. 인간과 천적의 위협에도 굴하지 않고 오로지 집을 향해 질주하는 비둘기를 무모하다 비판할 수 없다. 아노스의 귀향은 목숨을 각오한 행위다. 그러기에 작가는 고양된 정서로 아노스의 비행을 기술하고 찬미를 아끼지 않는다.

 

이 고귀한 새의 가슴 속에서 끊임없이 타오르는 집에 대한 사랑, 위대한 하느님이 씨를 뿌리고 인간이 가꾼 그 사랑은 아무리 강렬하게 표현해도 지나치지 않으며, 아무리 찬미하고 찬송해도 모자란다. (P.39)

 

<소년을 사랑한 늑대>

생물의 본성은 모두 동일하다. 자신에게 잘 대해주면 친근감과 애정을 느끼고 학대하고 괴롭히면 미워하며 증오심을 품게 된다. 사람들 사이의 관계에서는 이 원리를 잘 이해하면서도 사람과 동물 간에는 그다지 신경 쓰지 않는 일이 빈번한데 이는 인간들의 우월의식에 연유한다.

 

어린 늑대가 지미를 사랑하는 반면 술 냄새 풍기는 남자들과 개들을 증오하는 이유는 자명하다. 늑대를 죽이기 위해 다수의 사냥개와 총을 동원한 사람들의 유희는 그들에게 일개 심심풀이에 지나지 않지만 늑대와 사냥개들은 생사를 건 혈투를 벌여야 하는 지경이다. 이들을 향해 퍼부은 어린 지미의 욕은 기실 아이의 입을 빌려 비인간적인 인간에 대한 작가의 비난이 아니겠는가.

 

그렇다면 위니펙의 늑대를 떠나지 못하게 묶어 두었던 끈은 오직 하나다. 그것은 위니펙의 늑대를 온통 사로잡았던 간절한 요구이자 지상에서 가장 강력한 힘이었다. (P.81)

 

 

자유를 탈취한 늑대는 굳이 마을 근처의 숲에 머물 필요가 없었다. 사랑하던 지미도 이미 병들어 죽은 마당에 그가 인간들에게 미련을 둘 까닭이 있을 리 없다. 하지만 늑대는 떠나지 않았다. 사랑하는 지미 곁을 결코 떠날 수 없었던 것이다. 어릴 적에 고아가 된 늑대의 생에서 유일하게 따뜻한 정을 느끼게 해주었던 소년.

 

늑대는 자신의 삶을 스스로 선택했다. 숨 가쁜 사건들로 채워진 짧은 삶을. 오래도록 평화롭게 살 수도 있었지만 끊임없는 시련 속에서 3년 만에 생을 마감한 것이다. 위니펙의 늑대는 아무도 가지 않은 길을, 고귀하지만 짧은 길을 택했다. (P.80)

 

<하얀 순록의 전설>

하얀 순록 역시 위니펙의 늑대와 마찬가지로 한 사람에게 마음을 주었다. 스베굼 영감은 하얀 순록을 강압과 두려움이 아니라 온화함과 따뜻한 배려심으로 길들였다. 시간과 노력은 많이 이러한 사육 방식의 절대적 효과성은 다른 동물들을 길들일 때도 마찬가지로 적용된다.

 

이 편이 이색적인 것은 시튼의 주 무대인 북아메리카가 아닌 노르웨이를 배경으로 하고 있어서다. 게다가 하얀 순록을 노르웨이의 역사와 긴밀하게 연결시켜서 글자 그대로 전설화하고 있다. 노르웨이의 독립운동과 보르그레빙크에 관한 이야기가 역사적 사실인지 알지 못한다. 어쨌든 이 편에서는 배신자 보르그레빙크의 간악한 책략을 저지하기 위한 스베굼 영감과 하얀 순록의 활약이 두드러진다.

 

순록을 몰 때는 조심하라! 순록도 분노할 줄 안다. (P.108)

 

순록은 소와 말처럼 완전히 길들여진 동물이 아니라 본성은 야생이다. 앞서 롤도 그렇고 보르그레빙크도 자기중심적이어서 자신의 생각과 목적에만 관심을 둘 뿐 썰매를 끄는 순록이 살아 있는 생명체라는 점을 외면한다.

 

소처럼 순하던 순록의 눈동자가 붉게 빛났다. 하얀 순록은 화가 나서 씩씩대며 거대한 뿔을 흔들어 댔지만, 멈춰 서서 자기를 때린 사람에게 복수를 하지는 않았다. 더 중요한 복수가 남아 있었던 것이다. (P.122)

 

시튼은 요툰헤임, 트롤 같은 환상의 지명과 존재를 등장시켜 이야기 전체에 짙은 환상성을 불어넣고 있다. 실재적 역사와 가공의 옛날이야기가 혼재하여 진실인 듯 아닌 듯 전설을 이야기하고 있다.

 

<소년과 살쾡이>

인간은 지능과 도구 덕분에 야생동물을 압도할 수 있었다. 불과 총, 덫은 사나운 동물조차 인간을 두려워하게 만든다. 인간의 생존을 위협하는 맹수들은 서서히 또는 대대적 사냥을 통해 대부분 멸종의 단계로 접어들게 되었다. 누구를 탓하고 비난할 수 없다.

 

자신의 삶을 어렵게 만드는 인간을 향한 야생동물들의 증오는 정당하며, 가축을 습격하는 맹수를 보며 터뜨리는 인간의 분노 또한 응분의 타당성을 지니고 있다.

 

이 편에서는 인간과 동물의 정면대결이 손에 땀을 쥐게 한다. 시튼의 여타 이야기들과는 관점을 전혀 달리하고 있어 흥미진진하다. 연약하고 자신을 지킬 수단도 없는 인간은 맹수들에게는 그저 또 하나의 먹이에 불과하다.

 

살쾡이를 죽이지 않으면 자신이 죽을 것이다......토번은 살아 남기 위해 필사적으로 싸워야 했다. (P.160~161)

 

인간을 사냥하려드는 야수, 얼핏 잔인하지만 생존을 위해 필사적인 그들로서는 선택의 여지가 별로 없다. 그렇다고 인간이 무력하게 잡아먹힐 수는 없다. 사자와 호랑이도 아닌 고작 살쾡이한테 말이다.

 

토번과 자매들이 열병으로 앓아눕고 굶주리지 않았다면 대결 자체가 성사되지 않았을 것이다. 또 살쾡이 퇴치를 위해 혼신의 기력을 쏟아 결투를 벌이는 일도 없었으리라. 어쨌든 토번은 살아남았고 살쾡이 가족은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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