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태자의 첫사랑
빌헬름 마이어푀르스터 지음, 염정용 옮김 / 로그아웃 / 2016년 9월
평점 :
절판


원작이 주인공의 이름을 따서 <카를 하인리히>이고, 희곡으로는 <알트 하이델베르크>인 이 작품은 여러모로 영화 <로마의 휴일>을 떠올린다. 남성 주인공이 등장하는 하이델베르크의 휴일이라면 너무 앞서 나간 셈인가.

 

늙은 대공의 말처럼 권좌는 외로운 자리다. 군주는 자신의 권력을 나눌 수도 괴로움을 공유할 수 없다. 혼자서 모든 것을 감당하고 인내해야 하며 모두를 지배해야 한다. 궁정에서 진정한 우의와 교분을 맺을 수 있을 것을 기대하면 안 된다. 군주의 삶은 공적인 영역이다.

 

모든 시민들의 삶은 비뚤비뚤 갈 수도 있고 아래위로 요동칠 수도 있었다. 그러나 군주의 삶은 앞으로 언제까지나 계산되어 있고, 정확히 측정되어 있었다. 그것은 확실하면서도 단조로웠다. (P.172)

 

태자와 박사의 궁정 삶이 답답하고 재미없을 것은 충분히 짐작된다. 태자는 다른 경험이 없어 그나마 나을지라도 태자의 교육을 담당하기 위해 고용된 박사의 경우는 다르다. 그는 이렇게 한탄한다. 두 사람이 카를부르크를 떠나 하이델베르크로 떠날 때 박사는 영원한 작별을 고한 셈이다. 결코 다시는 돌아올 생각이 없었으므로.

 

궁정으로 들어온 것이하고 그는 종종 말했다. “나의 불행이었어. 그토록 쾌활하고 자유롭던 내가 지금은 어떻게 변했단 말인가! 이상은 물거품이 되었고, 자유도 사라졌고, 건강마저 잃었어. 저 성에서 그들이 내 숨통을 조여 이렇게 만든 거야.” (P.8)

 

작중에서 박사와 루츠 씨는 대비적 인물이다. 루츠 씨는 궁정 생활에 최적화되어 그곳에서 자신의 가치를 찾을 수 있다. 하이델베르크에서 루츠 씨의 우스꽝스러움은 자기자리를 찾지 못한 데 연유한다. 반면 박사는 태자에게 탈 궁정 생활의 즐거움을 불어넣고 유혹한다. 교육자로서 박사의 역할에 대해서는 독자마다 다른 의견을 품을 수 있다. 그럼에도 그가 반복하여 태자에게 천명한 청춘과 자유로 가득한 삶의 중요성은 간과할 수 없다.

 

사랑하는 카를 하인츠, 넌 허비하고 있어. 더구나 인간이 가진 가장 소중한 걸 말이다. 바로 시간, 청춘이란다!......우리가 놓친 시간 하나하나는 지나간 것이고 다시 돌아오지 않아.” (P.122)

 

젊음을 소중히 간직하거라, 카를 하인리히. 그게 내가 너에게 바라는 전부다. 지금 이 상태로 남아 있고, 만약 그들이 널 다르게 변화시키려 한다면-다들 그렇게 하려 들 거야-거기에 맞서 싸워라. 젊은 기상을 지닌 그런 사람으로 남아야 한다, 카를 하인츠. (P.140)

 

태자는 하이델베르크 대학에서 지낼 나날의 실체를 미처 알지 못했다. 박사가 주입시킨 단편적 이미지, 그리고 막연한 동경뿐. 청춘의 끓어오르는 열정과 활기, 신분 차를 거리낌 없이 넘나드는 우정, 이성과의 자유롭고 솔직한 감정 교환 등에 맞닥뜨린 그가 어찌 보면 광란으로 점철된 시절을 보낸 것은 당연하다. 케티와의 첫사랑, 태자도 케티도 그것이 아름다운 결실로 맺어질 것을 기대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아니, 장래를 바라보기 보다는 당장 눈앞의 현재의 행복과 기쁨에 가슴 벅찼으리라. 시종 루츠 씨를 제외한 모두가.

 

내가 지금껏 살아오면서 이토록 행복한 적이 있었나? 결코 없었어! 어제와 오늘 나에게는 수많은 인상들이 걷잡을 수 없이 밀려들었지만, 거기에 불협화음은 전혀 섞여 있지 않았어. 그것들 모두가 조화롭게 합쳐져 단 하나의 행복의 화음으로 울려오고 있지. (P.72)

 

하지만 그것은 시한부의 행복일 따름이다, 길어야 1년인. 게다가 늙은 대공의 와병으로 그는 몇 개월 만에 귀국하게 된다. 빛나는 백일몽에서 깨어나 암울한 현실로. 하이델베르크의 기억은 가슴 한켠에 남아있을 뿐이다.

 

하이델베르크! 그 시절을 떠올리면 그의 가슴 주위가 마치 청동 죔쇠처럼 조여 와 그를 금방이라도 질식시킬 것만 같았다.

지난 일이야! 사라졌어! 영원히! (P.154)

 

여기서 끝이라면 이 작품은 청춘 찬가의 자격이 없다. 우연한 계기로 억눌렸던 추억이 되살아나고 그는 일탈을 감행한다. 마음을 위한 백신 처방이리라. 허겁지겁 귀국하는 바람에 그는 그 시절을 제대로 마무리 짓지 못하였다. 마음의 매듭을 영원히 품고 지낼 수는 없는 법.

 

달려라! 기차가 얼마나 빠른지! 더욱 멀리! 누구도 이 기차를 따라잡지 못해! 짖어 대는 사냥개들은 점점 더 뒤로 처지고 그는 자유로워졌다. (P.179)

 

잔뜩 기대를 품었던 재방문은 현실을 절감하는 순간이었다. 깨어난 백일몽은 다시 꿈꿀 수 없다. 잡힐 듯 말 듯한 아련한 추억으로 남기는 편이 더 행복할 수 있다. 하지만 우리는 미련을 포기 못한다. 한 가닥 허상에 불과함을 깨닫고 나서야 비로소 씁쓸한 미소를 짓게 되는 것이다. 태자 역시 그러하다. 그럼에도 그는 운이 좋은 편이다. 꺼진 줄 알았던 사랑의 불씨가 차디찬 잿더미 속에서 숨죽이고 있다가 돌발적 재회에 소생하였다. 각자의 갈 길이 서로 다르며 눈앞에서 헤어져야 한다는 사실이 서로를 향한 뜨거운 마음을 더욱 불어넣은 듯 싶다.

 

훗날 카를 하인리히가 문득 청춘 시절의 하이델베르크를 떠올릴 때 가슴 한켠이 시려올 것이다. 흐뭇함과 회한의 양가적 감정으로.

 

그는 이날을 후회하지 않을 것이다. 이날은 그에게 지나간 청춘 시절을 다시 한 번 보여주었다. 그렇지만 그것은 말할 필요도 없이 정점에 이른 찬란한 햇빛 아래서가 아니라 흐릿한 저녁놀 속에서 비치는 청춘이었다. (P.1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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