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뜬세상의 아름다움 ㅣ 태학산문선 105
정약용 지음, 박무영 옮김 / 태학사 / 2006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책의 구성을 먼저 언급한다. 판형치고는 300쪽에 가까운 제법 볼륨감이 느껴진다. 다만 227쪽부터는 한문 원본이다. 한문을 애호하는 독자라면 환영하겠지만 일반 독자에게는 관심 영역 밖이다. 결국 200쪽을 살짝 넘는 아담한 분량인 셈이다. 앞부분에 30쪽에 달하는 작가 해설이 상세하다. 각 글마다 친절한 작품 해설도 덧붙여 있으니 다산 정약용의 산문을 알리기 위해 무척이나 노력한 흔적이 역력하다.
다산은 조선 후기의 거인이다. 그의 장대한 학문세계에 기죽기 마련이지만 여기에 실린 글들을 읽다 보면 그도 새삼 평범한 인간이었음을 알게 되며 그의 희로애락에 공감하게 된다. 청년기에서 노년기에 이르는 전 생애를 포괄하는 글들은 명승 유람의 기행문에서 동병상련의 형에게 보내는 서신, 죽은 아이들을 기리는 글, 아들들을 훈계하고 당부하는 글 등 다양한 성격을 보여준다. 이는 옮긴이가 논설문을 배제하고 다산의 인간적 면모를 드러내는 서정적 글 위주로 선별한 취지에 따른 결과다.
1. <적벽, 물염정>과 <서석산 유람기>, <곡산 북쪽의 산수>는 기행문에 해당한다. 전자를 통해 화순 적벽의 존재를 처음 알게 되었고 언젠가는 꼭 가보고 싶다. 서석산은 오늘날의 무등산을 지칭한다. 여기서 다산의 감상은 단순히 풍경 자체에 대한 감흥을 뛰어넘는다.
조공은 이 산이 다른 모든 산보다 뛰어나다는 것을 홀로 알아보았으니, 그 산과 사람이 모두 위대하다고 하겠다. (P.45)
<금강산에 가는 까닭>에서는 우리가 자연을 애호함을 마음을 기르는 것으로 인식하여 그 가치와 중요성을 십분 강조한다.
마음을 기르는 것은 설령 탐닉하며 돌아 나올 줄 모르더라도 군자는 탐욕스럽다고 하지 않는다. (P.55)
2. 탄탄대로를 걷던 그의 관로는 정조의 죽음과 함께 끝나고, 서학 세력으로 몰려 가문이 몰락하고 그는 유배를 떠나게 됨은 대체로 알려진 사실이다. 이 과정에서 그가 많은 사색과 깊은 고뇌를 거듭했음은 당연하다. 자신의 비참한 현재 처지와 알 수 없는 앞날의 불안감 등은 새삼 자신을 돌아보게 하였다.
대체로 천하만물이 모두 지킬 필요가 없는데, 오직 ‘나’만은 지켜야 한다......유독 이른바 ‘나’라는 것은 그 성질이 달아나길 잘하며 들고남이 무상하다......나는 허술하게 간직하였다가 ‘나’를 잃어버린 자다. (P.94~95, <나를 지키는 집>)
망설이기를 겨울에 시내를 건너듯, 겁내기를 사방 이웃을 두려워하듯 한다. (P.87, <겨울에 시내를 건너듯>)
윗 대목에서는 그의 또 다른 유명한 호인 ‘여유당’의 출처와 의미를 알게 해주는데, 사방 누구도 믿을 수 없는 그의 처참한 심경을 그대로 드러낸다.
지금 천하가 온통 다 떠다닙니다......생각해보면, 떠다닌다는 것도 아름답지 않습니까? (P.109~111)
이 책의 표제이기도 한 <뜬세상의 아름다움>은 나산처사의 추상적인 ‘떠다니는 삶’을 구상으로서의 ‘뜬세상’으로 변용한다. 일종의 언어유희로 나산처사를 희롱하는 듯 하지만 실은 그에 동의를 하면서 뜬세상의 답답함을 표출하고 있다. 굴원의 고사를 상기시키는 듯 한 뉘앙스가 가슴에 스며든다.
3. 다산이 천주교도인지 아닌지는 명확하게 드러난 게 없다고 한다. 나는 여기에 수록된 글로써 그가 천주교도가 아님을 믿고 싶다. 그는 현세주의자 내지 현실주의자다. 그는 피안을 중시하지 않는다.
이미 가버린 것은 뒤쫓을 수 없고 앞으로 올 일은 기약할 수 없으니, 하늘 아래 지금 누리고 있는 처지처럼 즐거운 것이 없다. (P.67, <지금 여기서>)
그가 천주교도였다면 자식들에게 보낸 글에서 아래와 같은 훈계는 결단코 하지 못하였을 것이다. 그는 자신이 서학을 믿지 않았음을 처절하게 부정하였다.
사대부의 마음이란 비 갠 뒤의 바람이나 달과 같이 털끝만큼도 가리워진 곳이 없어야 한다. 하늘과 인간에게 부끄러울 일은 칼로 끊은 듯 범하지 말아라. (P.204, <입을 속이는 방법 – 가훈>)
4. 사상가 다산이 아닌 인간 다산의 면모는 그가 죽은 아이들을 위해 쓴 여러 편의 묘지명에서 우선 확인할 수 있다. 의학이 발달하지 못한 당대에 천연두와 홍역 등의 질병으로 목숨을 잃은 아이들이 한둘이 아닐 텐데 그들을 잊지 못하고 삶의 흔적을 기록으로 남기는 수고와 배려를 아끼지 않은 이가 또 누가 있겠는가? 다산의 애틋한 사랑을 느낄 수 있다.
아아, 내가 하늘에 죄를 지어 이처럼 잔혹한 일을 당하는 것이니, 어찌 하겠는가. (P.126, <소라껍질 두 개>)
형 정약전의 죽은 아들의 양자를 들이는 과정에서 벌어진 집안 내 갈등도 원칙과 예법보다 인정을 우선시하는 다산의 변모된 모습을 보여준다.
옛 경전을 고지식하게 지키느라고 화기를 상하게 할 수는 없습니다. (P.153, <예법과 인정 – 형님께 4>)
다산의 학문적 동지이자 정신적 의지자인 형 정약전의 죽음은 그에게 커다란 충격이었다. 형의 뛰어난 인품과 학식을 세상은 물론 가족들도 알아차리지 못하는 안타까움과 지음(知音)을 잃은 자신의 슬픔이 <나무나 돌도 눈물을 흘리는데>에서 절절히 드러난다. 앞서 정약전의 건강을 염려하여 개고기 요리법도 적어 보낸 다산이었지만, 오히려 다산의 참혹한 건강 상태가 두드러진다. 이런 처지를 무릅쓰고 그는 거작들을 완성해 냈던 것이다.
중풍은 병근이 이미 깊어져서 입가에는 항상 맑은 침이 흐르고, 왼쪽 다리에는 늘 마비증세가 느껴집니다. 머리 위에는 두미협에서 얼음 낚시 하는 늙은이들의 솜 모자가 늘 얹혀 있습니다. 게다가 근래에는 혀도 굳고 말도 엇갈립니다. 살 날이 길지 않음을 스스로도 알겠습니다. (P.145, <꽃 피자 바람이 부니 – 형님께 2>)
5. 유배 생활이 장기에 접어들고 사면에 포함되지 못함에 따라 다산은 귀향의 마음을 서서히 놓는다. <뜬세상의 아름다움>과 <은자의 거처>를 보면 다산이 자신의 유배지를 이모저모 아담하게 가꾸었음을 알게 하며, 그가 꿈꾸는 은자가 머물만한 거처의 모습과 요건을 상세히 밝히고 있다.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을 다하였는데도 끝내 돌아갈 수 없다면 이것도 운명인 것이다. (P.211, <세상의 두 가지 저울 – 연에게>)
하지만 제아무리 체념하고 이곳의 생활을 미화하고 포장하지만 인간인 이상 어찌 집으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없겠는가? <마음 속 계산 – 형님께 6>에서 대사면에 포함되지 못한 서운함을 여기가 낫다며 역설적으로 표현하지만, 돌아가고 싶은 ‘못나고 약한 마음’이야말로 인간의 본성이다.
6. 다산이 유배지에서 쓴 무수한 글은 자신의 두 아들을 위한 것이다. 졸지에 몰락한 집안, 아버지마저 죄명을 쓰고 머나먼 타지에서 귀양살이하는 형편에 놓인 두 아들. 그는 아들들이 올바로 자라지 못할까 노심초사한다. 엄격하게 훈계하고 때로는 당부와 애원도 마다하지 않는 다산의 부성애가 너무나 사실적이다.
내가 저술에 전념하는 것은 눈앞의 근심을 잊기 위해서만이 아니다. 남의 아비가 되어서 이처럼 누를 끼치고 있는 것이 부끄러워 이로써 속죄하려는 것이다. (P.166, <남의 아비가 되어>)
내 책이 전해지지 않는다면 후세의 사람들은 오로지 사헌부에서 올린 장계와 심문 기록으로만 나를 판단할 것이다. 그렇게 된다면 내가 어떤 사람이 되겠느냐? 너희들은 반드시 여기까지 생각해서 분발하여 학문에 힘써라. (P.172, <자포자기하지 말아라 – 아이들에게>)
그는 자식들을 통해 자신의 글이 세상과 후대에 전해져 자신이 진실로 어떤 사람이었는지를 올바로 평가받고 싶어 하였다. 그럼으로써 자기 자신과 자식들이 세상에 당당하게 설 수 있기를 바랐던 것이다.
이 책에 실린 다산의 글을 읽으며 새삼 그의 인간적 면모에 주목하게 된다. 자신의 약점과 단점을 솔직히 시인하며 더 나은 세상, 올바로 선 세상을 만들기 위하여 그리고 주변 사람들의 처지와 애환에 등 돌리지 않는 다산. 사상가를 넘어서 인간 정약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