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스페인의 비극 - 르네상스 고전드라마 총서 1
Thomas Kyd 지음, 최준기 옮김 / 학문사(학문출판주식회사) / 2006년 5월
평점 :
품절
<고보덕> 보다는 구성면과 사실성이 강화되었음을 금방 발견할 수 있다. 따라서 무대상연에 보다 적합하며 실제로 당대에 상당한 인기를 끌었다고 하는데 처절하고 각박한 유혈 복수극의
소재 덕도 보았을 것이다. 어쨌든 이 작품은 말로와 함께 문학사적, 희곡사적으로 후배 셰익스피어의 등장이 멀지 않았음을 예감케 한다.
<고보덕>과 마찬가지로 고전극과 세네카의 영향이 두드러지는데, 코러스의 존재, 막중 무언극의 상연과 함께 빈번한 라틴어 대사가 직접적으로 드러난다. 무엇보다 주요 사건 진행경과를 대사로 처리하여 넘기는 수법도 그러하다.
작품은 안드레아의 망령과 복수의 유령이 불러일으킨 복수극 형태를 띠고 있다. 초인간적 존재에 의한 거역할 수 없는 비극적 운명이 진행되는데 친구 호레이쇼와 연인 벨 임페리아의 죽음마저 초래하는 복수극이 안드레아의 입장에서 온당한지는 알 수 없다.
로렌조가 호레이쇼를 살해한 동기는 단순히 누이와의 사랑을 방해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발사자의 생포로 공을 다투는 제1막 제2장의 장면에서 로렌조와 호레이쇼의 갈등을 확인할 수 있고 로렌조는 원한 앙갚음과 정적 제거를 도모한 것으로 해석된다.
(벨 임페리아) 안드레아의 친구인 호레이쇼를 나는 사랑해야지. 안드레아를 죽음으로 이끈 왕자에게 복수하기 위해서도 더욱 사랑해야지. (제1막 제4장, P.32)
벨 임페리아는 이중적이다. 그녀는 연인 안드레아의 죽음에 대한 복수를 맹세하면서, 호레이쇼와 사랑에 빠지는 이율배반을 보여준다. 그녀는 정말로 충실한 연인이었을까? 그녀의 사랑이 위의 대사와는 달리 복수를 위한 의도적 사랑이 아님은 제2막 제2장의 달콤한 사랑의 대화에서 드러난다.
(벨 임페리아) 사랑의 편지를 쓰십시오. 나도 사랑의 편지로 답하겠습니다. 나에게 입맞춤을 해주세요. 나도 지지않고 당신의 입맞춤을 되돌려 보내리다. (P.45)
로렌조는 이 작품에서 간악한 음모꾼의 역할을 담당한다. 그는 초반부에서 호레이쇼의 전공을 가로채고, 호레이쇼를 살해하며, 이 사실을 드러날까 우려하여 페드린가노에게 사베린의 살해를 지시하며, 페드린가노가 교수형을 당하도록 음모를 꾸민다.
비극의 진정한 주인공은 호레이쇼의 아버지 히에로니모다. 아들의 죽음에 대한 슬픔과 복수는 이 희곡의 중심 플롯이자 핵심적 사건이라고 할 수 있다. 그는 확실한 복수를 위해 매사에 신중함을 유지한다. 벨 임페리아의 편지를 받고도 반신반의하며 망설이고 페드린가노의 편지를 통해 살인자의 정체를 확신하는데, 그럼에도 로렌조와는 외견상 화해를 하는 등 철저히 의도를 숨긴다.
그의 죽음에 복수하는 것은 나의 의무였다. 그렇다면 히에로니모 너 자신의 생명을 위태롭게 해서는 안 된다. (제3막 제2장, P.63)
복수를 위해서는 차분히 시간을 기다려야 한다......그들의 악행을 알고 있는 것을 보이지 않으며 아무것도 모르는 것처럼 그들에게 방심케 하는 거다. (제3막 제13장, P.94)
양새끼처럼 온화하게 있어라...” (제3막 제14장, P.105)
작품해설에 따르면 이 작품의 구성, 특히 히에로니모의 복수지연 동기의 미약함에 대한 비판이 있다고 하지만 나로서는 이해부득이다. 복수 지연에 대하여 아내가 자살하고 벨 임페리아는 비난한다. 왕을 향한 청원 시도가 잇따라 실패하자 히에로니모는 정신적 혼란을 겪기도 하는 등 그가 노력을 등한시 한 게 아니다. 상대방은 스페인 왕의 조카이며, 막강한 실력자를 아버지로 둔 인물이다. 섣불리 시도하다가는 자칫하면 역공을 받아 복수는커녕 오히려 멸문당할 판국이다.
어쨌든 복수의 유혈과 광풍이 지나간 후 안드레아의 망령이 등장하여 마무리를 짓는데, 사건 결과를 요약하고 선인은 구원을 받으며, 악인을 지옥에 빠지길 기원한다. 망령은 소망이 달성되었다고 기뻐하지만 그 대가는 너무나 크다.
번역본에서 호칭의 혼란이 두드러져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포르투갈의 지배자는 총독이라고 불리는데 아들 발사자는 왕자로 호칭된다. 발사자와 로렌조, 그리고 히에로니모 간에는 경칭과 하칭이 혼재한다. 히에로니모도 궁정귀족으로서 아무리 봐도 로렌조가 함부로 하칭을 쓸 신분은 아니다. 더구나 포로 신분인 발사자가 로렌조에게 하대를 하다니. 혼란의 극치는 로렌조와 벨 임페리아 간에 벌어진다. 제3막 제10장에서 둘의 대화를 듣노라면 누나와 남동생의 관계인지 아니면 오빠와 여동생의 관계인지 도대체 판별이 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