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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백한 언덕 풍경 ㅣ 민음사 모던 클래식 61
가즈오 이시구로 지음, 김남주 옮김 / 민음사 / 2012년 11월
평점 :
금년도 노벨문학상 작가의 데뷔작이다. 일본계 영국작가로서 출간 당시 호평을 받았다고 한다. 배경은 전후 일본 나가사키, 원자폭탄이 투하된 두 곳 중 하나다. 이 작품은 원폭 투하를 직접적으로 다루고 있지만 작품 전체의 암묵적 배경과 분위기에 중요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
우리에게 태평양전쟁과 일본의 패전은 곧 식민지 해방과 광복으로 이어지므로 경축일로서 연결되지만, 일본인의 입장에서는 사뭇 다를 수밖에 없다. 한때 초강대국으로 전 세계 지배를 꿈꾸던 그네들에게 이는 가슴 아픈 상실로, 언젠가는 이루어야 할 꿈으로 다가온다. 오늘날 군국주의적 우경화가 일본 사회에서 득세하는 근저다.
이 소설은 전후 일본의 신구 세대와 이념의 대립을 잘 보여준다. 오가타상으로 대변되는 구세대는 일본의 패전은 힘의 대결에서 밀렸을 뿐으로 전전의 체제와 가치관을 유지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반면 지로와 마쓰다 시게오는 전전 일본의 억압적, 전제적 체제와 이념 수용을 거부한다. 마쓰다 시게오가 적극적으로 부정하는 데 반해 오가타상의 아들 지로는 아버지와의 갈등을 우려하여 표출에는 소극적일 뿐이다.
우리 사회도 한국전쟁 이후 어려운 시절 아메리칸 드림을 꿈꾸는 이들이 있었다. 동남아 여성들이 한국 남자와 결혼을 통해 구하고자 한 것과 동일한. 전후 재건 시절의 일본도 마찬가지다. 소설 속에는 마리코의 엄마 사치코가 대표적이며, 전쟁과 전후 상황을 현실로서 인정하고 감내하는 후지와라 부인과 대조된다. 모국에서 행복하다면 굳이 벗어나 타국에서 살려고 하는 사람이 얼마나 있겠는가.
[사치코] 에츠코, 당신은 이해해야 해요. 난 부끄러울 게 전혀 없어요. 사람들에게 숨겨야 할 게 전혀 없다고요. 알고 싶은 게 있으면 물어봐요. 수치스러울 게 없다니까요. (P.47)
[에츠코] 다만 난 개인적으로 현재 삶에 무척 만족해요. (P.59)
소설의 한 축이 오가타상이라면, 다른 한 축은 에츠코다. 사치코와 에츠코는 아바타 관계다. 딸 마리코와 게이코도 동일하다. 사치코의 미국행에 마리코의 행복을 들어 부정적이었던 에츠코. 정작 서양인과 재혼하여 영국 이주를 감행한 것은 에츠코였다. 그리고 마리코에게 아슬아슬하게 이어지던 근접한 죽음을 맞이한 것은 실제로 게이코였다. 사치코에게, 그리고 후지와라 부인에게 자신의 행복을 되풀이하여 표명한 에츠코의 변신. 그것은 후지와라 부인이 일찍이 간파한 에츠코의 진실과 잇닿아 있다.
[후지와라 부인] 넌 이제 바라던 모든 것 갖게 될 거다, 에츠코. 그런데 어째서 그렇게 불행한 거니?
[에츠코] 불행요? 전 전혀 불행하지 않은걸요. (P.102)
우리는 이 작품에서 등장인물 간 감정 및 의사교류가 원활하지 않음을 알아차린다. 대화 중 단번에 의사가 전달되는 경우 보다 수차례 이야기를 반복하는 경우가 다반사다. 서로는 한동안 자신들의 말만 일방적으로 되풀이할 뿐이다. 사치코, 그리고 훗날 에츠코도 마찬가지지만, 특징적인 행동 중 하나가 웃는 모습이다. 작가는 그들이 웃을 때마다 ‘웃음을 터뜨린다’고 꼭 집어서 반복적으로 적시한다. 여성 인물의 웃음이 미소도 아니고 상황에 어울리지 않는 폭소를 남발한다? 그것은 자연스럽지 못하며, 어색하고 인위적이다.
작가가 작품에서 드러내고자 하는 것이 전후 풍속도와 신구 세대의 단절만은 아니다. 후지와라 부인의 선택과 사치코의 시도는 방향이 다르지만 지향점은 똑같다. 에츠코가 외국인과 재혼하여 유럽에 정착한 것도 동일하다. 그것은 “삶을 바꾸려는 노력”(P.231)이다. 현실에 낙담하고 주저하기 보다는 어쨌든 돌파구를 찾고 타개책을 고민하며 삶다운 삶을 꾸려나가려는 의지다.
[사치코] 우리가 결코 미국에 갈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건 나도 알아요.....삼촌 댁에 가는 건 전혀 나를 위한 게 아니에요. 거긴 그저 빈방이 있을 뿐이에요. 그게 다예요. 난 그 방에 앉아서 늙어갈 거예요. 거긴 더 이상 아무것도 없어요. 그저 빈방들뿐이라고요. (P.223)
[에츠코] 나는 모든 걸 알았단다. 그 애가 여기서 행복하지 못하리라는 것을 알았어. 그런데도 그 애를 여기 데려오기로 한 거야. (P.230)
[에츠코] 니키. 넌 네가 최선이라고 생각하는 삶을 살아야 해. (P.237)
소설은 에츠코와 딸 니키의 대화, 그리고 에츠코의 회상으로 구성된다. 별다른 사건이 없는 전개가 구성의 단순성에 더해진다. 사치코의 미국행 시도, 오가타상과 마쓰다 시게오 정도. 작가의 어조도 차분하여 문장과 정서표현도 은근하다. 서양인의 눈에 비친 전형적인 일본적 내지 동양적 정감이라고 하겠다. 이러한 절제미가 유럽에서 극찬의 평을 받은 주요한 사유라고 볼 수 있겠다. 작가가 애초에 작품을 일본에서 발표하였다면 문학적 평가가 어떻게 달라졌을지 문득 궁금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