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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주반생기 ㅣ 범우문고 80
양주동 지음 / 범우사 / 1989년 5월
평점 :
품절
치옹(痴翁)이라면 여기에 실린 글들을 문학수필로 간주하지 않을 것이다. 저자의 반생 회고담에 불과하므로. 하지만 저자가 누구던가? 당대의 대학자로 명성을 날리고 자칭 타칭으로 ‘국보(國寶)’라고 불리던 인물이다. 그의 삶을 소싯적부터 되짚어 본다는 것은 일개인의 단순한 삶이 아니라 당대의 주요 사건과 인물을 오늘에 되살리는 역사적 의의마저 지니고 있음이다.
누구나 잘난 체하는 사람을 내켜하지 않는다. 이 글들에서 무애는 숱하게 자부심과 무용담을 대놓고 드러내는데 그게 그다지 밉지 않다. 그는 그럴만한 인물이다. 우선 그는 신라 향가 해석의 획기적 전환점을 제시한 뛰어난 국문학자였다. 최남선이 인정한 몇 안 되는 학문적 성취의 하나일 정도니. 그는 대단한 천재여서 소싯적에 한문에 정통하고 시문학에 두각을 나타내어 근대 초기 시단을 이끌 정도였다. 이렇게 우리글만 잘하기도 힘든 판국에 당대에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영문학자였다.
이런 생을 그는 문(文)과 주(酒), 두 가지의 기준으로 회상하고 있으니 일개 독자로서 읽는 재미가 쏠쏠함은 불문가지다. 특히 주(酒)의 측면에서는 수주(樹州)의 <명정 사십년>과 자웅을 다툴 정도다. 수주의 글은 시종여일하게 명정 광태의 소화를 쉴 틈 없이 쏟아 부음에 반해 무애는 몇 가닥 굵직하게 추려내어 당시의 언행을 상세하고 실감나게 회상한다.
<소년 塾長>에서는 그의 남다른 조숙한 천재기를 직접 확인할 수 있으며, 독학으로 영어 공부하는데 따른 해학적 재미를 느낄 수 있다. ‘新文學에의 轉身’과 ‘《金星》시대’는 무애가 문학청년이었던 시절의 보헤미안적 모습과 함께 당대 문단의 이면사까지 한꺼번에 흥미롭게 엿볼 수 있다. 특히 소설가 강경애와 시인 이장희와의 남다른 인연이 기억에 남는다.
무애에게 문(文)과 주(酒)는 뗄 수 없는 관계인 듯하다. 열 살에 삼일주(三日酒)로 시작한 주력은 문단 동지들과 교류하면서 염상섭, 이은상, 문일평, 최남선 등과의 술과 글과 학문으로 맺어진 교분을 소개한다. 오늘날 그들의 성명은 한 획을 그은 대가들임에도 무애의 글 속에서는 소박한 인간미가 두드러진다. 대미는 이장희와 함께 벌인 용두리(龍頭里) 춘사(椿事)로 장식하는데 동경 유학시절의 국제적 대음주와 쌍벽을 겨룰만한 주정이라고 할 만하다.
위트와 해학, 문학과 제 학문의 경지를 거리낌 없이 넘나드는 무애의 글을 호탕하기 그지없어 일단 몇 글자 눈을 가까이 하면 헤어날 길이 없다. 그의 비평의 칼끝은 춘원 같은 대가에서 신진 후배들에 이르기까지 차등 없이 날카롭게 춤춘다. 천재의 눈은 오연하기에 그만큼 외롭다. 모두의 작가론 표제가 ‘국보의 고독’임은 적절하다.
양 박사의 수필 세계– 아니다, 그의 인생이라고 해도 좋다 –를 한마디로 표현해 보자, 그것은 고독한 세계였다고 할 수 있으리라. (P.17)
* 내가 읽은 책은 현재 시중에 판매되는 것의 구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