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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스코 부도리의 전기 (양장) ㅣ 사계절 1318 문고 37
이경옥 옮김, 이광익 그림 / 사계절 / 2006년 4월
평점 :
절판
수록된 두 편의 작품은 여러모로 대비된다. 전자는 창작시기 최만년의 작품인 반면 후자는 가장 초기 작품이다. 전자와 후자는 유사한 구성과 플롯을 지닌 쌍둥이 같은 작품인 점에서도 흥미롭다. 주인공의 이름도 매우 특이하다. 후자는 요괴 세계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처음엔 후자는 단순한 습작이며 후일 전자를 창작하기 위한 기초에 지나지 않을까 생각하였다. 물론 이러한 성격도 다분히 지니고 있지만 그보다는 좀 더 심화 발전시켜 작가의 주제의식을 치밀하게 반영하기 위한 의도적 변용에 가깝다.
미야자와 겐지는 단순한 글쟁이가 아니었다. 그의 삶을 돌이켜보면 가난한 농민들의 삶을 향상시키기 위해 비록 제한적이긴 하지만 나름대로 관심을 갖고 전념하였다. 작가가 굳이 ‘OOO의 전기’라는 표제의 작품을 썼던 것은 자신이 지향하는 삶과 지양해야 할 삶을 문학의 형식을 빌어 보여주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구스코 부도리와 펜넨넨넨넨 네네무는 둘 다 어린 시절에 부모를 잃고 동생과도 헤어진 후 힘겨운 삶을 보낸다. 어려운 가운데서도 둘 모두는 공부에 대한 강렬한 의지를 품는다. 다만 양자의 목적은 다르다. 부도리는 농부들이 재해를 입지 않고 행복하고 풍요로운 삶을 살 수 있도록 화산국에서 일하며 마지막에는 자신의 희생도 감내한다. 네네무는 자신의 입신출세와 안온한 삶에 만족한다. 그가 명재판관으로 명성을 날리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부수적인 결과일 뿐이다. 네네무의 몰락은 그래서 오히려 허무하다. 부도리가 화산국 기사라는 점에서 직업적 대비도 드러난다.
부도리와 네네무의 구성상 큰 차이는 부도리의 경우 숲을 빠져나온 후 붉은 수염 주인과 수렁논에서 수년 간 같이 농사를 지었다는 삽화가 제법 비중 있게 다뤄지고 있다. 수렁논 주인은 풍작을 거두려고 온갖 궁리를 다하는 성실한 농부이지만 결국은 반복되는 냉해와 가뭄에 파산하게 된다. 하지만 주인의 노력 분투는 부도리에게 강렬한 인상을 남기고 그의 삶의 목표를 설정하는 데 영향을 미치게 된다.
칼보나드 섬의 화산을 분화시켜 부도리가 잃은 것은 자신의 삶이었지만 얻은 것은 작품의 마지막 단락에 잘 드러나 있다. 그것이 부도리의 생의 의의다.
많은 부도리의 아버지와 어머니들은 많은 부도리와 네리와 함께 그 겨울을 따뜻한 음식과 밝은 장작불로 즐겁게 살 수 있었습니다. (P.79)
부도리가 화산국 기사가 되는 반면 네네무는 단번에 요괴세계 재판장으로 벼락출세를 한다. 수하에 서른 명의 부하도 거느리게 되어 위세도 당당하다. 네네무는 명판결로 명성을 떨치고 특히 성냥팔이를 다단계로 착취하는 서른 명의 요괴를 훈도하여 갱생의 길로 인도한다. 작품 중에서 네네무가 나쁜 짓을 하거나 인격적으로 흠잡힐 만한 일은 저지르지 않는다. 단 하나 인간세계에 실수로 출현하게 된 것밖에는.
작가는 각 장의 제목을 이렇게 짓는다. 네네무의 독립, 출세, 시찰, 안심, 출현. 네네무는 출세를 하고 무수한 명예도 쌓으며 점차 스스로의 삶에 안심을 하고 젖어들다가 종국에 득의와 방심을 하여 파멸로 이어지게 된다. 네네무의 출현이 이루어지는 배경이 산무토리 화산이라는 점은 역시 부도리와의 유사성을 떠올리게 한다.
지금 나는 훈장이 천이백 개
짚 오믈렛도 이젠 질렸어
내 결정에는 땅도 복종해
산무토리조차 수박처럼 갈라진다네 (P.149)
작가가 네네무에 유달리 가혹한 연유는 부도리와의 비교를 통해 명확해진다. 양자는 유사한 배경을 지니고 어려운 시절을 겪는다. 둘 다 분명 출세를 하지만 그 성격은 대조적이다. 부도리는 자신의 부귀와 안위보다는 세상의 평안과 행복을 더 중시한다. 반면 네네무는 순전히 개인주의적이다. 그의 소명의식은 자신의 출세와 연관된 한계 이내에서만 유효하다. 그는 자만에 빠져 절제를 잃었고 그 순간 나락으로 떨어지고 만다.
작가는 부도리와 네네무의 비슷하나 상반된 인물을 통해 자신이 생각한 바람직한 인간상을 제시하고 싶었던 것이리라. 이색적이지만 터무니없지 않은 독특한 유형의 작품으로 일독할 가치가 있다.
이 책은 단순히 작품 수록에 그치지 않고 삼십 쪽에 가까운 세밀한 작품해설을 통해 심화된 작품이해에 도움을 주고 있다. 주마간산에 지나지 않던 많은 의미들을 발견하고 반추할 수 있어 미야자와 겐지라는 작가 이해에도 유용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