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마토 모노가타리 지만지(지식을만드는지식) 시선집
지은이 미상 지음, 민병훈 옮김 / 지식을만드는지식 / 201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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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에 가는 길이라고는 들어 알고 있지만

어제오늘 일이라 생각도 못했는데 (165, P.283)

 

그날 공연히 다음에 또 보자고 약속했네요

오늘이 끝이라고 말해야 좋은 것을 (101, P.148)

 

죽음을 목전에 둔 인물의 체념과 회한에 짤막한 시구를 통해 애절하게 다가온다. 와카가 담고 있는 제재의 폭은 비단 사랑과 연애에만 그치지 않고 이렇듯이 삶의 전 영역을 포괄한다.

 

바쁜 중에도 저를 생각하시며 지냈다지만

이 지루한 하루를 무엇에 비할까요? (136, P.210)

 

오랜 세월을 연애도 않던 내가 저녁이 되면

까닭 없이 슬픈 건 무슨 연유일까요 (19, P.33)

 

사랑은 기쁨 못지않게 괴로움과 슬픔을 수반한다. 전에는 무심했던 연인의 일거수에도 예민하고 행여 나를 잊거나 소홀히 하지 않을까 전전반측한다.

 

헤이안 시대에는 다양한 인물이 온갖 소재로 와카를 짓는데, 먼저 주제 면에서는 월등히 많은 영역이 사랑이다. 아마도 인간 사회가 존속하는 한 모든 예술 작품의 불변하는 제일 주제는 사랑이 아니겠는가. 위로는 천황에서부터 귀족과 기녀에 이르기까지 남녀를 불문하고 이성에 대한 사랑에 가슴 벅차고 기대에 설렘을 품고 회한에 눈물 흘리며 원망을 그치지 않는다. 터무니없는 오해는 비극적 결과마저 야기하는 경우도 있어 시대와 장소를 달리하더라도 인간 본연의 면모는 전혀 낯설지 않음을 알게 한다. 당대의 연애 및 혼인 풍습 등에 대한 이해를 지니고 있으면 좀 더 공감을 하게 되지만 그렇지 않더라도 연면히 흐르는 감정에 둔감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이 책은 모노가타리 장르 중 <이세 이야기>와 함께 대표적인 우타모노가타리의 하나로 꼽힌다. <이세 이야기>와 구별되는 점은 전자가 특정 인물의 연대기 형식을 취하여 삶의 여정을 따라 와카가 불려지고 있어 노래와 이야기가 비교적 일관성이 있는 반면, 이 작품은 일종의 시화(詩話)집이라고 볼 수 있다.

 

173단으로 구성되어 있고, 헤이안시대 중기를 배경으로 당대의 천황과 지체 높은 귀족들이 읊은 유명한 와카와 그 노래의 창작 배경을 설명하는 형식이다. 따라서 일관된 주제의식과 체계성을 기대할 수는 없지만, 한편 여러 당대인들의 감정, 풍습 및 사회상을 미()의식과 함께 폭넓게 조망하는 장점을 지니고 있다.

 

작가는 여러 와카와 관련된 일화를 단지 수집하는데 그치지 않는다. 편집자의 단호함을 드러내는 대목이 곳곳에 있는데, 비판과 첨언의 대상은 천황도 비껴가지 않는다.

 

마음이 내키지 않아 노래도 어설프게 읊으셨다. (19, P.33)

 

“......그것을 보면 애써 노래로 읊어 부른 보람도 없다고 말씀하셨다. (32, P.50)

 

와카의 세계를 통해 본 헤이안 시대는 또는 풍류가 지배하는 사회라고 생각한다. 멋들어진 와카 한두 수를 즉석에서 읊을 줄 알아야 하며, 남녀가 만나서 여자 집에서 하룻밤을 보내면 다음날 아침 반드시 서신을 보내는 게 에티켓이었다. 여자들은 다채로운 색상의 옷소매로 미적 감각을 드러내었다. 물론 독특한 연애 방식에 따른 여자들의 불평등한 지위와 수동적 관계의 고착화, 백성들과는 무관한 귀족들만의 유희에 불과하다는 비판도 인정하지만 어쨌든 독자적인 아름다움의 존재는 인정할 필요가 있다.

 

그 미감은 때로 가냘픈 무상감마저 자아낸다. 그리고 이러한 정서가 사라짐을 우리네와 마찬가지로 작가는 안타까워한다.

 

이야기처럼 세상은 허무하니 마음에 품은

애절함을 어떻게 그대에게 전할까

 

이런 노래여서 아무도 반가를 읊지 못하고 둘러앉아서 소리를 높여 울었다. 이 속세에서는 신기할 정도로 사물의 정취를 이해하는 사람들이었다는 사실을 이제 와서야 실감하게 된다. (41, P.60~61)

 

전반부는 비교적 단편에 가까운 시화로서 노래가 중심이 되고 관련 일화가 부수된다. 반면 후반부로 갈수록 형세가 역전되어 일화가 장황하게 소개되어 자체로서 독자적인 읽을거리가 되고 있어 문예의 역사적 흐름이 느껴진다.

 

예컨대 147이쿠타 강은 두 남자를 똑같이 사랑한 여자 한쪽을 선택할 수 없어 고민 끝에 강에 몸을 던지는 내용이다. 두 남자도 같이 몸을 던지고 결국 강가에는 세 개의 무덤이 나란히 자리 잡는다. 이 일화를 제재로 여러 사람들이 번갈아 노래를 읊어 사랑의 비극적 결과를 애탄하지만, 유혈 낭자한 후일담으로 이야기는 끝맺는다.

 

168이끼 옷은 당대 저명한 와카시인이었던 인물이 천황의 붕어 후 세상을 등지고 출가하여 승려가 되고 나중에는 자식마저 중으로 만드는 절절한 사연을 소개한다. 각 단이 대개 한두 쪽에 그치는 데 비해 무려 여섯 장이 넘는 분량을 차지한다.

 

서사적 흥미와 감동이 상대적으로 미약한 시화 모음집이 오래전부터 나올 수 있게 된 연유는 무엇인지 궁금하였는데, 옮긴이가 말미의 해설에서 잘 밝혀주고 있다. 당대에 와카 읊기는 교양인의 필수 덕목이었다는 점, 모범적이고 유명한 와카에 대한 세인들의 관심이 컸다는 점, 단순히 와카뿐만 아니라 노래가 지어진 배경도 문맥적 차원에서 같이 언급할 필요가 있었다는 점 등이 이 책같은 유의 시화집이 나오게 된 까닭이다. 사실 황실 차원에서 와카집을 수집, 정리하는 노력도 빈번하였으니 와카 짓기는 상하를 막론한 중대 관심사였을 것이다.

 

문화적 이해의 장벽 외에도 시가 장르는 기법 면에서 역시 번역의 한계를 실감하게 되는데, 10세기 중엽, 고대 문학이면서도 적극적인 연관어와 가케코토바 등 언어유희를 통한 미묘한 뉘앙스는 가나 원어를 음미해야 절절해질 텐데 각주를 통해 이차적으로 이해하는데 그칠 수밖에 없어 아쉬움을 느낄 뿐이다. 그럼에도 헤이안 인들의 문화와 정서를 조금이나마 더 이해하는 계기가 될 수 있음은 여전한 소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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