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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픈 카페의 노래 ㅣ 열림원 이삭줍기 12
카슨 매컬러스 지음, 장영희 옮김 / 열림원 / 2005년 2월
평점 :
구판절판
정상적인 사랑과 비정상적인 사랑이라는 구분이 가능할까? 꽃다운 선남선녀들의 풋풋하고 산뜻한 사랑은 사람들의 마음을 흐뭇하게 하고 동정어린 격려를 받는다. 우리들은 이를 아름다운 사랑이라고 칭한다. 그럼 아름답지 못한 사랑도 있다는 말인데.
비정상적이니 아름답지 못하다니 하는 말들은 사랑의 당사자가 아닌 국외자의 시각에서 바라보는 표현이다. 두 당사자의 입장에서는 사랑은 오직 사랑 그 자체일 뿐이다. 거기에는 선악, 미추, 윤리와 도덕 등의 개념이 끼어들 여지가 없다. 그것은 사랑을 둘러싼 부차적 요소이며, 사랑이 아닌 사회가 덧붙인 것이다.
세 명의 주요 인물은 모두 비주류요 반사회적이다. 우선 아밀리아는 세상에서 기대하는 전형적인 상과 배치되는 여성이다. 장대한 기골에 괴팍한 성질, 남들과 어울리는 삶을 거부하는 태도 등등. 라이먼은 불치병에 걸린 꼽추로 출신과 배경 모두 미지의 인물로 아밀리아와 친척 간이라는 그의 주장을 믿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한편 마빈 메이시는 신체적 조건으로는 지극히 우월하지만 흉악한 범죄자다.
이런 세 명 간에 펼쳐지는 사랑과 애증의 삼각관계는 오히려 처연하다. 사랑의 이유는 당사자 외에는 알 수 없다. 아니 당사자조차도 진정한 이유는 알지 못한다. 사랑은 의도가 아니라 자연이다. 스스로도 통제할 수 없는 감정, 차라리 미워하는 편이 나은데 어찌할 수 없는 마음의 행로, 그것이 사랑이다. 독자는 라이먼에 대한 아밀리아, 마빈 메이시에 대한 라이먼의 감정을 폄하하지 못한다. 다만 안타까울 뿐이다.
작가의 어조는 일견 담담한 듯하면서 우울하다. 그는 아밀리아에게조차 일말의 동정적 면모를 보이지 않는다. 감정과 사건이 고조되면서 흥분이 터져 나올 시점에서도 그는 나직하면서 약간은 시니컬하게 상황을 묘사한다. 슬프고 애틋한데 오히려 실소가 나올 때의 처참한 심경을 겪어보았는가. 그런 면에서 작가는 전혀 친절하지 않다. 아밀리아가 마빈 메이시를 왜 쫓아냈는지 궁금하지만 아무 말도 해주지 않는다. 라이먼의 정체도 불투명하게 놓아둔다.
사랑의 힘으로 마빈 메이시는 선하고자 노력하였고 사랑의 배신으로 더욱 철저하게 악인이 되었다. 사랑의 작용으로 아밀리아도 온기와 활기가 넘치는 카페를 만들었으나 사랑이 떠나가자 카페는 폐허가 되었다. 더불어 마을도 다시금 황량하고 쓸쓸하게 퇴색되었다. 라이먼은 사랑받기보다는 사랑하기를 선택한다. 그 길이 제아무리 고통스럽고 굴욕적이라도 당사자는 행복할 것이다, 그것이 사랑의 힘이므로.
그로테스크. 짧지도 길지도 않은 이 소설의 내용과 느낌을 한 단어로 압축하면 위와 같다. 배경, 인물, 성격, 사건 어느 것 하나 낯설고 기이하지 않은 게 없다. 하물며 결말조차도 섣부른 기대를 저버린다. 무엇보다 작가가 민낯으로 드러내는 고독과 단절의 사랑 방정식이 더욱 황량하며 으스스하다. 그럼에도 차마 외면하지 못함은 그것이 일말의 진실을 담고 있음에서일 것이다.
진실이라? 작가가 그리고자 한, 그리고 아밀리아가 드러내지 않고자 한 진실은 무엇일까? 독자는 이것을 정확히는 알 수 없다. 다만 작가의 독특한 사랑관을 피력한 유명한 다음 대목이 이해에 단초를 제공한다.
우선 사랑이란 두 사람의 공동 경험이다. 그러나 여기서 공동 경험이라 함은 두 사람이 같은 경험을 한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사랑을 주는 사람과 사랑을 받는 사람이 있지만, 두 사람은 완전히 별개의 세계에 속한다. 사랑을 받는 사람은 사랑을 주는 사랑의 마음속에 오랜 시간에 걸쳐 조용히 쌓여 온 사랑을 일깨우는 역할을 하는 것에 불과한 경우가 많다. 사랑을 주는 사람들은 모두 본능적으로 이 사실을 알고 있다. 그는 자신의 사랑이 고독한 것임을 영혼 깊숙이 느낀다. 이 새롭고 이상한 외로움을 알게 된 그는 그래서 괴로워한다. 이런 이유로 사랑을 주는 사람이 해야 할 일이 딱 한 가지가 있다. 그는 온 힘을 다해 사랑을 자기 내면에만 머무르게 해야 한다. 자기 속에 완전히 새로운 세상, 강렬하면서 이상야릇하고, 그러면서도 완벽한 그런 세상을 만들어야 한다......이제 사랑을 받는 사람에 대해서도 얘기해 보자. 아주 이상하고 기이한 사람도 누군가의 마음에 사랑을 불 지를 수 있다......그래서 어떤 사랑이든지 그 가치나 질은 오로지 사랑하는 사람 자신만이 결정할 수 있다.
그래서 우리들은 대부분 사랑 받기보다는 사랑하기를 원한다. 거의 모든 사람들이 사랑을 주는 사람이 되고 싶어한다. 간단명료하게 말한다면, 사람들은 대부분 사랑 받는다는 사실을 마음속으로 힘들고 불편하게 느낀다. 사랑 받는 사람은 사랑하는 사람을 두려워하고 증오하게 되는데, 충분히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 사랑하는 사람은 자기의 연인을 속속들이 파헤쳐 알려고 들기 때문이다. 사랑하는 이는 아무리 고통을 수반할지라도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과 가능한 한 모든 관계를 맺기를 갈망한다. (P.49-51)
우리는 이 대목을 통해서 아밀리아가 마빈 메이시와의 결혼생활을 거부하게 된 연유를 추론할 수 있다. 보다 뒤에서 작가는 아밀리아의 결혼 이야기를 소개하면서 다음과 같이 덧붙인다.
그러나 이렇게 표면에 드러나 사랑 이야기는 서글프고 우스꽝스러울지언정, 진정 어떤 일이 일어났는가는 사랑하는 사람, 그 당사자의 영혼만이 알고 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그러므로 신 외에 그 누구도 이 같은 사랑, 아니, 다른 그 어떤 사랑에 대해서도 최종적인 판결을 내릴 수는 없다. (P.64)
더불어 아밀리아가 상식적으로 납득이 되지 않는 꼽추 라이먼과의 사랑을 유지하는 까닭도 해석 가능하다. 그녀는 꼽추를 통해서 사랑을 알게 되었고 사랑을 잃고 싶지 않았다. 후에 꼽추가 마빈 메이시와 함께 집을 떠났을 때도 그녀가 받은 충격은 금전적인 것보다 사랑의 상실이 더욱 컸기에 세상을 거부하였던 것이 아니겠는가.
아밀리아는 사랑을 알고 기쁘게 하기 위해 카페를 열었다. 카페에서 사람들은 서로 간에 교류를 함으로써 단조롭고 반복적인 일상을 탈피하여 인간다움의 가치를 재발견할 수 있었다. 카페의 폐쇄는 사랑의 단절과 소통의 부재를 원형처럼 소환하였다. 슬픈 카페의 노래는 열두 명의 쇠사슬에 묶인 죄수들의 노랫소리와 본질적으로 동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