잭 대령
다니엘 디포 지음 / 고려대학교출판부 / 201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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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빈슨 크루소>의 작가 디포의 소설이다. 디포만큼 명성의 빛과 그늘이 두드러지는 작가도 드물 것이다. 어지간한 문학전집과 어린이용 동화전집에도 모두 수록될 만큼 유명한 대표작이 있는 반면 이를 제외한 대부분의 작품은 전적으로 외면 받고 있으니. 대표작의 위용이 드높은 만큼 읽는 와중에 자연스레 상호 비교 및 대조를 하게 된다.

 

떠돌이 부랑아로 태어나 소매치기로 살았고, 병사가 되었고, 탈영까지 저지른 인간이 바로 나였다. 이 넓은 세상에 안락한 집도 없고, 먹고 살 변변한 직업도 없고, 그저 날 때부터 한 짓이라고는 나쁜 짓거리뿐이었던 인간이 바로 나였다. (P.146)

 

피카레스크 소설 또는 악한소설로 분류되는 장르가 있다. 디포의 경우에는 <몰 플랜더스>가 여기에 속한다. 잭 대령의 전반부는 분명 피카레스크적 성격이 강하다. 불우한 환경에서 자라나 일찍부터 생계를 위해 도둑질의 길로 뛰어들어 출중한 실력을 발휘하고 유유상종이라고 비슷한 무리들과 어울려 전형적으로 타락의 나락으로 빠지기 직전의 잭. 여기서 한 가지 피카레스크 소설은 주인공의 나쁜 행위에만 초점을 두고 있지 않다는 점, 주인공이 그러할 수 밖에 없게 되었던 당대 사회 현실에 대한 엄정한 고발도 내포하고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작가의 대표작 <로빈슨 크루소>는 단순한 모험소설이 아니다. 근대인의 상업과 무역의 요소와 개척자적 정신이 주인공의 삶에 어우러져 있다. 이 요소를 더 극대화한 게 <잭 대령>의 후반에 해당한다. 주인공은 구세계(영국)에서 신세계(아메리카)로 추방되어 밑바닥에서 개과천선하여 성공의 가도를 달리게 된다. 식민지 농장과 유럽과의 교역, 카리브 해의 밀무역 등을 통해 목숨을 담보로 위험천만을 무릅쓰고 막대한 부를 쌓는다.

 

피카레스크 소설의 결말은 대개 비극이다. 인생의 나락에 놓인 주인공이 자신의 어둡고 비참한 일생을 회고하면서 자신의 삶을 본보기삼아 잘못을 되풀이하지 말라는 교훈을 남긴다. 반면 잭 대령의 후반기 생은 우여곡절을 겪었음에도 매우 성공적이다. 잘못된 출발을 하였지만 올바른 삶, 적극적인 노력을 통해 생의 행, 불행이 뒤바뀔 수 있음을 강조한다.

 

이 작품을 고리타분한 교훈을 의도한 따분한 소설로 오해할 필요는 없다. 교훈은 던져버리더라도 로빈스 크루소보다 훨씬 극적이고 치열한 삶을 살아가며 당대 사회의 밑바닥과 식민지 농장의 엄혹한 실정을 독자에게 생생하게 전달하고 있다. 게다가 그가 벌이는 스페인령과의 밀무역은 품목과 수량, 거래방법 등이 대단히 사실적이어서 새삼 작가인 디포의 풍부한 관련 지식에 놀라게 된다.

 

전반부의 잭 대령이라는 인물은 양면적이다. 그는 스스로를 천성적으로 착한 아이라고 주장하며 무수한 죄악을 범하면서도 이를 무지와 나쁜 환경의 탓이라고 되풀이하여 변호한다.

 

나는 선의에 대해서 아무것도 몰랐고 악의에 대해서도 그 기미조차 몰랐다. 다시 말하자면 내 관점에서 내가 영위하던 삶은 악의가 전혀 없는 삶이었다. (P.52)

 

앞서 말했듯이 배운 게 아무것도 없었던 어린 시절로 말미암아 나는 그저 무지했고, 함께 지내던 아이들의 무디어진 양심과 못된 심성의 영향으로 분별력을 가질 수 없었다. 그리고 그 이유에 더해서 내 무지는 내가 지금까지 쭉 해온 일들 탓이기도 했다. 결론적으로 나는 양심에 대해 그 어떤 의식도 없었고 일탈 범죄를 저지르는 일에 대해 그 어떤 가책도 느끼지 않았다. (P.76)

 

이런 그의 태도는 일생에 걸쳐 지속된다. 서두에서 글을 읽고 쓸 줄 안다고 했으면서도 후에 불리한 순간이 오면 글을 읽을 줄 모른다고 발뺌한다. (작가의 의도일까 아니 단순 실수일까?)

특정한 정치적 의식도 갖추지 못한 채 프랑스군 또는 스코틀랜드 군에 합류하여 모국인 영국군에 저항하는 일종의 반역행위도 서슴지 않는다. 여러 차례의 실패한 결혼생활도 자신과 무관한 전적으로 운명 또는 부인들의 귀책사유 탓이다. 이 작품 또한 <로빈슨 크루소>와 마찬가지로 남성 중심의 남성소설이다. 그럼에도 전작과는 달리 여성의 비중이 다소 늘어났으며, 국왕의 사면을 받기 위한 장면에서는 전적으로 부인에게 의존하는 주인공의 유약한 면모를 보여준다.

 

한편 잭 대령은 상업과 무역상 영리행위 추구에는 대단히 민감하다. 그는 성공한 농장주로서 농장 경영에 만족하거나 일부 양보하더라도 영국과의 교역으로도 충분한 부와 명예를 누릴 수 있었음에도 부의 맹목적 축적에 집착하는 모습을 보인다. 이것은 <로빈슨 크루소>에서도 일부 드러났듯 상업자본주의의 팽창에 따른 시대상을 반영한 것이리라. 다만 그것이 바람직한 인간상의 전형으로 제시된 것인지 여부는 분명하지 않다.

 

작가는 <로빈슨 크루소>와 마찬가지로 <잭 대령>에서도 종교적 심화에 큰 의미를 부여한다. 무인도에서 종교적 반성과 참된 신앙회복을 통해 꿋꿋하게 버텼던 것처럼 잭 대령도 지식인 노예와의 대화를 통해 죄와 회개의 의의를 인식하게 된다. 하지만 무인도의 로빈슨과는 달리 잭 대령은 종교적 각성이 사고와 행동을 이끄는 지배가치로 자리 잡지 못하였다. 이후에도 그는 잘못된 행위와 그릇된 판단을 무수히 반복한다. 이 점은 전작의 나이브함에 대한 인간성의 복잡 미묘함의 사실적 묘사에 가깝다.

 

이 소설에는 특히 시대를 앞서 간 디포의 사상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 있는데, 농장주의 흑인노예들에 대한 가혹한 처우와 체벌에 대한 비판적 인식이다. 후에 잭 대령은 농장관리인이 되고 농장주가 되어서 노예들에게 인도주의적 대우를 해준다. 스토 부인의 소설이 발표되기 백년도 훨씬 전에 작가는 사회적 문제의식을 품고 있었던 것이다.

 

잭 대령의 일생은 로빈슨 크루소보다 훨씬 다채롭고 극적이다. 양 대륙을 넘나들며 종횡무진하게 전개하는 그의 활동과 맞닥뜨리는 각종 사건들. 독자들은 잭 대령의 삶의 여정과 궤적을 뒤따라가기에도 숨이 벅차다. 왠지 작가가 서두르는 기미마저 느껴진다. 방대한 서사를 한 권에 무리하다시피 집어넣다보니 혼란스러움이 생겨난 것은 아닐까.

 

무심하게 전면을 주시하고 있는 천진한 소년 그림의 표지가 인상적이다. 어린 시절의 잭 대령의 모습을 연상시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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