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 물고기
다니엘 월러스 지음, 장영희 옮김 / 동아시아 / 2004년 2월
평점 :
절판


나의 아버지는 하나의 신화가 되었다. (P.7)

 

미소 짓는, 신비로운, 신화와 같은, 그리고 알 수 없는 나의 아버지. (P.200)

 

신화는 역사 이전, 인간이 아닌 신들의 이야기다. 신화로서의 아버지는 시간적, 물리적 거리감과 비일상성의 의미를 함축한다. 다름 아닌 아버지를 우리 자신에게서 구분 짓고 분리한다.

 

아버지의 권위 상실과 존재감 박탈은 근대를 거쳐 현대로 오면서 유독 두드러진 현상이다. 이는 아버지의 역할 변화와도 밀접한 관련을 지닌다. 아버지는 더 이상 존경하고 본받을 롤 모델이 아니다. 단지 가족의 생계를 책임진 주 수입원에 불과하다.

 

그가 집에 없을 때는 매혹적이고 신비로운 존재였지만 일단 집에 오면 그저 평범한 존재가 되어야 했다. (P.30)

 

작가는 신화가 된 아버지의 삶을 탐구하며 신화를 인간화한다. 에드워드 블룸의 경이로운 탄생, 동물과 이야기를 나누는 비상한 능력, 탁월한 박식함 등. 믿거나말거나 아이들의 성장 과정에서 사소한 일화라도 부모에게는 하나의 신화인 법이다. 거인 카알 길들이기와 거대한 메기에 끌려 호수 밑 세상을 구경하는 대목은 신화와 환상의 절묘한 결합이다. 물론 아이에게 부모는 신과 같은 절대적 존재이며, 부모에게 아이 역시 무한한 전능성을 가졌다는 의미에서 신과 마찬가지다.

 

나는 그것이 내 운명이라고 생각했어. 큰 연못에서 노는 큰 물고기, 그게 바로 내가 원했던 거란다. 처음부터 그랬어. (P.37)

 

어린 시절 장래의 꿈과 희망에 대하여 질문 받을 때 평범한 인생을 갈구하는 아이들은 없다. 누구나 위대한 사람을 꿈꾼다. 반면 아버지에게도 청춘이 있었을까? 그도 한때 청운의 꿈으로 가슴 부푼 시절이 있었을까? 우리는 의심하고 가능성을 일축한다. 우리에게 아버지는 가족 아닌 가족의 구성원, 엉거주춤하게 상석을 점유한 가정 내 이방인인 경우가 잦다.

 

윌리엄이 아버지 에드워드의 삶을 정면으로 인식한 계기는 역설적으로 죽음을 앞둔 아버지를 대면하면서였다. 전에는 그저 타인에 불과하였던 존재, 이제는 바로 옆에서 일상과 어머니를 불편하게 만드는 존재. 그럼에도 무관심할 수 없고 삶의 여정과 가치를 궁금하게 만드는 인물. 그렇기에 작품의 구조는 반복되는 아버지의 죽음 장면을 축으로 아버지의 개인사가 번갈아 현실로 불려온다.

 

이 작품은 에드워드와 아들 윌리엄의 대화와 관계 설정을 통해 일종의 성장소설을 지향한다. 특히 에드워드가 고향 애쉴랜드를 떠나는 장면은 매우 상징적이다. 수많은 사람들이 꿈을 실현하려고 큰 물고기가 되기 위하여 길을 나서나 모두 제자리에 주저앉고 만다. 꿈의 찌꺼기만을 남긴 채.

 

고향을 떠나 새로운 도시에 정착하고, 우여곡절 끝에 아내를 얻고 아이를 낳고 직업 생활을 꾸리며 아버지는 살아간다. 힘겹지만 사랑하는 이들과 이따금 누리는 행복을 위안 삼으며. 여기에 아들이 추억하는 아버지와의 단편적 일화들이 삽입된다. 하지만 생활에 매진할수록 아버지는 행복스럽지 않다. 가정이 낯설게 느껴지며 사랑과 애정이 의무와 부담, 그리고 속박으로 다가온다. 에드워드가 작은 마을 스펙터를 통째로 사들이며 즐거움을 느끼는 장면은 꽤 긴 분량을 차지하는데, 일종의 현실도피이자 안타까운 몸부림이라 할만하다.

 

아버지의 대단한 성공에도 불구하고 아무도 행복한 것 같지는 않았다. 엄마도 나도 그리고 분명히 아버지도 행복하지 않았다. 가족이 가족답지 않다는 생각에 차라리 아예 따로 살까 하는 말도 있었다. (P.216)

 

문득 궁금해진다. 모든 이로부터 존경과 찬사를 받고 부귀와 명예를 한 몸에 지닌 한 사람, 임종 무렵 가족으로부터 좋은 남편, 훌륭한 아버지로 인정받지 못한다면 그의 삶은 성공적이라고 말할 수 있는가. 반대로 그저 그런 평범한 삶을 살아가고 사회적으로도 별달리 두드러진 존재감이 없는 남자가 임종 무렵 가족으로부터 진실로 훌륭한 남편, 좋은 아버지라는 말을 들었을 때는 어떨지를.

 

나는 좋은 아버지였어.” ......

그래요, 아버지는 좋은 아버지예요.” ......

고맙다.” (P.117~118)

 

아들과 아버지는 서로를 이해하지 못한 채 영원히 소원하며 대립할 수밖에 없는 운명일까? 작가는 그렇지 않음을 보여주려고 애쓴다. 진지한 주제를 놓고 아버지와 못다 한 대화를 하고자 노력하는 아들, 반면 아버지는 농담만을 일삼는다. 아버지의 농담은 도피 아니면 거부인가, 또는 삶의 진지함을 정면으로 주시하는 다른 차원의 대응일까? 공고한 신화적 틀을 깨뜨리고 신비의 구름에서 일상의 대지로 하강할 때 아버지와 아들의 바람직한 관계가 이루어질 것임을 우리는 안다, 이성의 도움 없이 직관적으로.

 

나는 내가 아버지를 좀더 잘 알았더라면, 삶을 좀더 함께 보냈더라면, 그리고 그가 내게 그렇게 빌어먹을 완벽한 신비덩어리가 아니었다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P.261)

 

이 작품은 열린 결말로 끝맺는다. 죽음의 순간 물고기로 변신하는 아버지의 의미는 읽는 이의 자유로운 해석을 요구한다. 물고기를 되찾은 꿈으로 또는 죽음에 대비되는 생명으로 읽을 수 있다. 의무와 속박을 벗어난 자유의 표상으로 이해도 가능하다. 아니면 농담 아버지와 진지 아들 간 화해 불가능의 상징이라고 간주해도 좋다. 실제로 물고기가 되었다고 믿지만 않는다면 별 상관없다. 아니, 어차피 신화라면 물고기가 되었다고 한들 어떠하겠는가.

 

이제까지 나의 아버지는 물고기가 되고 있었다. (P.269)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