랄프 왈도 에머슨 : 자연 위대한 생각 시리즈 3
랄프 왈도 에머슨 지음, 서동석 옮김 / 은행나무 / 201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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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록작>

1. 자연

2. 자립

3. 보상

4. 경험

5. 운명

 

에머슨의 책을 다시금 꺼내든 이유는 제대로 확인해보고 싶어서였다. 애초 만만하게 시작했던 에머슨이 의외로 까다로워 많은 시간과 노력이 소요되었다. 특히 <자연론>. 덕분에 그의 글을 여러 번 읽은 점은 소득이지만 과연 제대로 읽어낸 점이 맞는지 그의 글이 실제로 난해한 지 여부를 정말로 확인하고 싶었다.

 

그런 면에서 결과적으로 에머슨 전공자가 번역하고 가장 최근에 출간된 이 책은 상당한 만족감을 주었다. 내용면에서 내가 이해한 개요가 크게 어긋나지 않았다는 안도감을 주었으며, 가독성 측면에서는 에머슨의 글이 철학적이고 난해한 용어와 표현을 굳이 사용하지 않았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용어에 관해서라면 심령영혼으로, ‘영혼정신으로 달리 번역하는 등 다른 곳과 차별성을 보이고 있는데, 통상적인 어휘가 사용되어 이해의 용이성에서는 유리하다.

 

이미 그의 글을 읽었기 때문인지 아니면 옮긴이의 번역이 매끄러운 연유인지 알 수 없지만 그의 <자연>을 읽어나가는데 별다른 어려움과 걸림돌 없이 책장을 술술 넘길 수 있었다는 점은 무척이나 고무적이다. 에머슨을 처음 대하는 독자라면 일순위로 이 책을 권할 만하다.

 

에머슨의 논의는 현대에도 여전히 유효하다. 인간이 순수한 영혼으로 자연과 교감을 갖고 통일성을 유지하는 것, 오성과 함께 이성을 갖고 인간 자신과 자연을 대할 때 인간과 자연의 관계는 정립될 수 있다. 이것이 마지막 장 전망에서 에머슨이 청자에게, 독자에게 들려주고 싶은 말이 아니었을까?

 

자신감또는 자기신뢰로 번역되곤 하는 <자립(Self-Reliance)><자연>과 마찬가지다. 불경에 나오는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는 말로 요지를 대변할 수 있을 것이다.

 

자신의 생각을 믿는 것, 자신의 마음 속에서 자기에게 옳은 것이 모든 사람들에게도 옳다고 믿는 것, 그것이 천재이다. 그대의 내면에 깃든 신념을 말하라. 그러면 그것은 보편적 의미가 될 것이다. (P.90)

 

위대한 사람은 바로 많은 사람들 한가운데에서도 참으로 부드럽게 고독의 독립을 유지하는 사람이다. (P.98)

 

에머슨은 교회에서 목사의 설교와 신도의 기도에서 현세 또는 내세에서의 보상을 갈구하는 경향에 매우 비판적이다. 만물은 양극성과 이원성을 띠고 있다. 동양의 음양론과 같은 이치다. 그리고 양자 간에는 종국적인 균형의 추가 작용한다.

 

모든 행위는 양면에서-첫째로는 그 자체, 즉 실제 본질에서, 둘째로는 그 상황 속에서, 즉 눈에 보이는 외면적 성질에서-보상되어, 말하자면 완전해진다. (P.147)

 

<보상>은 인생에는 항상 대가가 따른다는 점을 설파한다. 순간적인 이익과 쾌락은 이후 균형을 유지하는 뼈저린 의무와 보상을 치르게 된다. 속임수도 마찬가지다. 개인마다 천부의 재능은 획일적이지 않다. 장점은 겸손하게 이를 보전하고 계발하기 위해 노력할 것이며, 단점은 겸허하게 인정하고 이를 보완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현명한 자는 자신을 적에게 내던지는 법이다. 약점을 발견하는 것은 적의 이익이라기보다는 자신의 이익이다. (P.162)

 

보상 원칙의 배후에는 영혼의 본성에 대한 신뢰가 깔려 있다. 만물은 고립되고 단절된 것이 아니라 상호 연결되어 밀접한 연관성을 지니고 있다. 남의 이익과 나의 손해, 나의 장점과 남의 단점이 일방적인 우열 관계에 놓여 있지 않다. 나와 남, 나의 것과 그의 것은 상이하고 배척되지 않는다. 에머슨은 여기에서 사랑이라는 개념을 도입하여 통합을 시도한다.

 

에머슨은 인생이 충동적이며 예측불가능하다는 사실을 <경험>에서 주장한다. 자연은 고착되기를 거부한다. 고착과 정체는 곧 생명의 반대를 의미한다. 그렇기에 아이의 죽음이 저자에게 가져다 준 슬픔과 충격이 시간의 추이에 따라 희미해져 가는 현상은 사뭇 당연한 것이다.

 

삶은 지적이거나 비평적인 것이 아니라 억센 현실이다. (P.189)

 

하나의 경험에 매달려 과거에 얽매여 있는 것은 자연의 본성에 어긋난다. 자연은 무한한 다양성과 끝없는 변화를 추구한다. 현실에 충실한 모습을 자연은 좋아한다. 거기에서 사람은 행복을 느낀다. 우리는 모두 알고 있지 않은가? 삶의 행복은 거창한 데 있지 않고 일상의 소소함에서 비롯됨을.

 

극단의 행복과 불행은 존재하지 않으며, 찰나의 순간은 가능할지 모르지만 앞서 보았던 균형과 보상의 원칙이 곧 작동하기 시작한다. 행과 불행, 슬픔과 기쁨에서 중용의 자세를 가지려는 노력이 중요하다.

 

한편 마지막 수록작인 <운명>은 두 권의 에세이집에 실린 글이 아니다. 1860년에 발표된 <The Conduct of Life>(삶의 행위 또는 처세론)에 수록된 글 중 하나이다. 따라서 초기와 중기의 에머슨이 아닌 후기 에머슨 사상을 알아볼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된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운명이라고 부르는, 자연 전체를 관류하는 요소는 우리에게 한계로 알려져 있다. 우리를 제한하는 모든 것을 우리는 운명이라고 부른다. (P.236)

 

이 글은 일견 <보상>의 확장편이라고 하겠다. 인생과 자연의 양극성과 균형의 원칙을 에머슨은 인간의 운명에도 적용한다. 우리는 종종 팔자 내지 숙명이라는 표현을 사용한다. 현재 내게 지워진 삶의 굴레는 도저히 벗어날 수 없는 절대적인 것이므로 이를 감내하고 순응하며 살 수 밖에 없다는 자포자기적 삶의 태도다.

 

에머슨의 운명은 이러한 태도에 반기를 든다. 생명을 지닌 자연의 일 존재로서 인간은 자유 의지를 갖고 있음을 선언한다. 생명력은 자체의 본능과 원리에 따라 억압을 거부한다. 운명은 절대적이므로 완전한 회피는 불가능하다. 그렇지만 운명의 거미줄이 심신을 완전히 휘감기 전에 안간힘을 쓴다면 부분적이지만 속박에서 벗어날 수는 있을 것이다. 그것은 치열한 자유와 저항 정신으로만 가능하다.

 

운명은 개선을 포함한다. (P.251)

 

운명에 대한 해법으로 에머슨은 이중 의식의 개념을 제안한다. 그것은 만물의 연관성 내지 상호 의존 관계에 대한 인식에 기초한다. 운명에 맞닥뜨리면 그대로 주저앉아 좌절과 절망에 포기하지 말고 자연의 법칙과 보상의 원칙을 상기하자. 아울러 운명을 회피할 수 없다면 그 타격에 함몰되지 말고 훌훌 털고 일어나 다시금 새로이 출발하는 정신, 그것이 곧 이중 의식이다. 이는 생소한 개념이 아니라 에머슨이 과거부터 단편적으로 언급하고 논의하던 내용을 다듬어서 정리한 것이다.

 

<운명>은 본문을 읽을 때는 무슨 의미인지 금방 와 닿지가 않았는데, 역자 해설을 읽고서 비로소 대강의 뜻을 헤아릴 수 있게 되었다. 에머슨의 사상을 간명하면서 핵심적으로 짚어내는 점에서 확실히 전공자의 내공을 알게 된다.

 

역자에 따르면 에머슨 철학의 특징은 다음과 같다.

 

에머슨을 이해하기 어려운 것은 에머슨의 철학이 관념의 철학이 아니라 삶의 철학이기 때문이다......에머슨을 단편적으로 보고 판단하면 그를 온전히 평가할 수 없다. 에머슨은 삶을 총체적으로 보고 있다. (P.267)

 

이제 에머슨과 떠나는 시점에서 그의 사상을 반추해 본다. 다양성과 통일성, 자기신뢰에 기반한 자립정신, 자연과 영혼의 대응과 보편적 영혼으로서의 초령, 보상의 원칙과 현재중심 주의 등. 그의 사고는 서양 고전과 기독교를 바탕으로 하여 인도, 페르시아와 중국의 종교와 철학까지도 아우르는 폭넓은 사상적 맥락을 근거로 삼고 있다.

 

그의 사상이 현재까지도 공명을 갖는 연유는 물질문명의 시대에 인간이 주체성을 지니고 영위하는 삶의 자세를 절묘하게 설파하고 있어서이다. 문명과 과학이 발달할수록 인간은 왜소해지고 파편화된다. 인간이 능동태가 되지 못하고 피동체로 전락하는 상황에서 더구나 인간에 의한 자연 파괴가 가속화되는 시점에서 극단성을 배제하고 영혼과 자연의 교감과 균형을 중시하는 그의 태도는 생태학적 인식과도 상통한다고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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