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랄프 왈도 에머슨 ㅣ 19세기 미국명시 2
랄프 왈도 에머슨 지음, 김천봉 옮김 / 이담북스 / 2012년 7월
평점 :
절판
에머슨은 사상가이자 에세이스트 못지않게 당대의 저명한 시인이기도 하였다. 시인 에머슨의 면모를 확인할 수 있는 시 선집이 최초로 출간되었다. 영국과 미국 명시를 연달아 번역 출간하고 있는 김천봉의 스타일답게 짤막한 작가소개 겸 해설에 이어 주석조차 거의 덧붙이지 않은 시들이 영한 대역으로 수록되어 있다. 영한 대역을 실은 친절함에 가점, 원문과 번역문만 덩그러니 실어놓은 불친절함에는 감점. 군더더기 없이 작품 자체에 몰입하라는 좋은 의도로 해석하고 싶다.
시인은 보잘것없는 사물도 찬양하고 비천한 것들도 고양할 수 있어야 하고, 자연의 양극성을 조화시켜 다양성 속에서 통일을 추구해야 하며, 낡은 사상에서 인간을 해방시키고 새로운 사상을 고취시켜야 하고 인간과 우주의 관계를 제시할 수 있어야 한다. (P.12)
앞의 해설 부분에 에머슨의 시론이 소개되어 있는데, 참고할 데 없는 독자에게는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큰 도움이 된다. 본문에는 총 25편의 시가 수록되어 있다.
<각자와 모두>는 개인과 전체의 관계를 표현하고 있다. 비단 이 작품뿐만 아니라 대다수의 에머슨 시는 자신의 사상을 시 형태로 변환한 성격을 띠고 있다. 따라서 도덕적, 교훈적 어조가 강하게 드러나는 점은 특징인 동시에 단점으로 다가오기도 한다. 여기서 시인은 새둥지와 조개껍질을 집으로 가져왔지만 더 이상 자연의 아름다움을 느낄 수 없다. 새와 조개는 자연 속에 함께 존재하고 어울려야 비로소 전체의 아름다운 일원이 될 수 있다. 실망한 시인이 탄식하는 순간 생생하게 살아있는 자연이 완전한 전체의 모습으로 바로 자신 곁에 있음을 깨닫는다.
그대 역시 모른다, 그대의 삶이
그대 이웃의 신조에 어떤 변수를 덧붙였는지.
모두는 각자에게 필요하다.
홀로 바르거나 선한 것은 없다. (P.15)
에머슨은 인도와 동양 사상에도 깊은 관심을 지니고 있었다. 에머슨의 초령 개념도 순전히 독자적이기 보다는 특히 인도 철학과 연관성을 맺고 있다. 그런 에머슨의 일면을 이 <브라마>에서 보게 된다. 현상의 양극성과 이중성을 인식한다면 우리는 일희일비하지 않으며 중도를 택할 것이다. 그것이 시인이 말하는 “저 미묘한 길”(P.23)이 아닐런지.
먼 것도 잊힌 것도 내게는 가깝고,
그림자와 햇빛은 같은 것이다.
사라진 신들이 나에게 나타나고,
치욕도 명성도 나에게는 하나다. (P.23)
<사랑에게 다 주어라>는 시인으로서는 드물게 보는 순수시에 가깝다. 모든 것을 사랑에게 맡기라는 시인의 외침은 역설적으로 그러하지 못하는 자신에 대한 질책으로 다가온다. 무엇보다 사랑은 용기를 필요로 한다는 대목이 와 닿는다.
사랑은 비열한들을 위한 게 아니었다.
사랑은 굳센 용기를 요한다. (P.29)
<문제>는 자신의 종교적, 사상적 입장을 피력한 작품으로서 비교적 장시에 속한다. 목사직을 그만둔 이후 서양과 동양의 사상과 철학을 접목하여 독특한 초령 사상을 주창한다. 그는 기독교에 대한 믿음이 아무리 깊다 해도 두건 쓴 성직자와 선한 주교가 되고 싶은 마음은 없다고 술회한다. 고대 그리스의 제신, 견자들과 무녀들의 말은 동일하게 성령의 말씀이므로. 그래서 시인은 이렇게 밝힌다.
성령이 강조한 한 말씀
무관심한 세상이지만 길을 잃지는 않았다. (P.41)
<콩코드 찬가>는 명성에 비해서는 평범하다. 독립전쟁기념비 낙성식을 위한 시로서 자유를 찾아 후손에게 물려주기 위해 싸운 조상들을 기리고 있다.
에머슨의 정치관은 <정치>에서 확인할 수 있다.
교회가 사회적 가치일 때,
의사당이 따듯한 난로일 때,
그때라야 완전한 나라가 탄생한다.
공화국이 편안히 자리 잡는다. (P.55)
시인은 공포, 술책과 탐욕은 나라를 바로 세울 수 없다고 단언한다. 당대 미국의 정치 현실이 어떤지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시인의 실망과 분개가 여실히 느껴진다. 이는 단순히 머나먼 남의 나라 이야기는 아닐 것이다.
<세계-정신>은 맨 뒤의 <숲의 선율>을 제외하면 이 선집에서 가장 긴 시에 해당한다. 에머슨이 생각한 세계-정신은 무엇일지 궁금하다. 첫 번째 연과 두 번째 이하 연의 대조를 통해 독자는 시인이 자연을 예찬하고 도시와 문명사회에 비판적임을 대번에 알아차릴 수 있다. 메마르고 삭막한 도시에서도 자연은 경이를 포기하지 않는다.
어김없는 아침은
지하실에 있는 이들을 찾아내고,
필시 만물을 사랑하는 자연은
어느 공장에서 미소하리라. (P.61)
이 시의 후반부에서 서술하는 문장의 주체인 ‘그’가 누구를 지칭하는지 명확하지 않다. 앞서 ‘운명’이 언급되고 다음 문장에서 “인내심 강한 그 악의 화신”(P.65)이 등장하므로 ‘운명’을 가리키는 것으로 파악되는데, 올바른 이해인지 자신이 없다. 이럴 때 친절한 해설이 그리워진다.
낡은 세상이 메마르고
시대가 활력을 잃으면,
그가 파괴의 잔해와 앙금으로부터
더욱 아름다운 세상을 완성해주리라. (P.69)
그의 존재의 정체성이 어찌하든 그는 낡은 세상을 새로이 하는 역할을 맡을 것으로 시인은 기대를 품는다.
이하 몇 편의 단시들도 여전히 사상가-시인의 철학이 스며들어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우화>는 산의 비난에 응대하는 다람쥐의 어투가 자못 당돌하다.
재능이 다를 뿐, 만물이 적절히 슬기롭게 어우러져 있어. (P.73)
자연과 세계의 아름다움은 누구나 끄덕일만한 글자 그대로의 아름다운 대상에만 깃들어 있지 않다. 아름다운 것을 보고 아름다움을 찬미하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다. 시인이라면 범인들이 알아차리지 못한 세상의 숨어있는 아름다움을 발견하고 드러낼 수 있어야 한다. 추하고 더러운 사물과 현상들 사이에서. 그래서 시인은 노래가 “아주 음험하고 야비한 것들”(P.77)과 “사물들의 찌꺼기에도 더껑이”(P.79)에도 배어 있다고 <음악>에서 노래한다.
에머슨이 아서왕 신화 속의 멀린에 관심을 가진 연유는 알 수 없다. 멀린은 신화 속에서 아서왕과 왕국을 융성케 한 존재인 동시에 아서왕과 다소간 거리를 두고 있어 일부에서는 부정적으로도 평가받는 마법사다. 에머슨은 <멀린>과 <멀린의 노래>에서 마법사 멀린을 되살린다. 친숙하면서도 낯선 모습으로. 그런데 에머슨의 멀린은 단순한 마법사가 아니다. 마법적인 능력을 발휘하는 시인으로 변신한다. 진정한 시인, 독자를 단숨에 사로잡는 강력한 시인의 모습과 단숨에 드높은 곳으로 솟구쳐 핵심으로 진입할 수 있는 시의 자세, 그것은 에머슨이 마음에 품은 시인과 시의 이상이리라.
왕의 시인으로서
현들을 거칠게 맹렬하게 쳐야만 하리라, (P.85)
언제나 곧바로 솟구쳐
시의 정상에 이르리라. (P.87)
멀린의 강력한 시구,
자연의 극단들을 조화시키고,
폭군의 의지를 꺾고,
사자도 온순하게 길들였나니. (P.91)
천저 바닥에 친정 꼭대기까지
드높이 날아오를 수 있는 새,
뮤즈의 치솟는 궤도에 올라
단숨에 여정을 넘어서리라! (P.91) (<멀린>에서)
나직이 불러도 드높이 불러도,
강자들보다도 더 강력한 노래,
오만한 자들을 벌하는 노래를. (P.95, <멀린의 노래>에서)
한편 각박한 도시와 근대문명에 대한 시인의 거부감, 그리고 역으로 자연의 순수성과 미에 대한 편애는 아래 시들에서 확연하게 드러난다. <잘 있어라>는 오만한 세계에 작별을 고하고 숲속의 따뜻한 자신의 집으로 가겠다고 선언한다. 일종의 귀거래사라고 하겠다.
속된 발이 전혀 밟아보지 못한 곳,
사색에도 신에게도 신성한 곳으로.
......
인간의 지식과 긍지, 궤변학파들,
박식한 도당을 한껏 비웃어 주리라. (P.101)
시인은 집과 정원과 숲이면 더 이상 세상 부러울 것이 없다고 <월든>에서 말한다. 월든 호수가 어디던가? 소로의 명작이 탄생한 곳이다. 그곳은 또한 에머슨의 정원이기도 하다. 자신의 정원에 대한 시인의 자부심은 <나의 정원>에서 볼 수 있듯이 대단하다.
나의 숲에 노래 옷 입혀 거기서 누리는
즐거운 일들 전해줄 수 있다면,
뭇 사람들이 내 정원에 모여들어
도시들이 텅텅 비련만, (P.115)
화창한 봄날, 아름다운 정원 산책은 도시의 지루하고 칙칙한 학교 따위에 도저히 비할 수 없다(<사월>). 그러면서 시인은 독자와 지인에게 양해를 구한다. 자신이 숲속을 헤매고 게으름을 피우는 일상이 사실은 자연 속에 깃든 비밀과 신의 지혜를 알아내어 우리에 전해주고자 하는 노력의 소산임을.
숲의 신을 찾아 뵙고 그의 말씀
가져와 인류에게 전해주려 함이니,
......
하늘에 떠간 구름 조각 하나하나가
편지를 써주어 내 책에 담았나니.
......
내 손에 들린 과꽃 송이마다
생각 하나씩 싣고 집에 가는 길이니. (P.103, <변명>에서)
인간들은 자부한다. 인간이 만물의 영장이며, 자연의 지배자라고. 한없는 오만은 자연뿐만 아니라 인간 자신까지도 망친다. 시인의 눈에 비친 인간의 우쭐거림은 한치 앞도 내다보지 못하는 하루살이의 팔랑거림 또는 하룻강아지의 성마른 깨갱 소리와 다를 바 없다. 인간 속에 깃든 자연의 의미를 발견하는 게 곧 신과 조우하는 길임을 아는 시인은 마음이 급할 뿐이다.
가장 인간적인 것도 인간의 것이 아니라,
철에 또 돌에 깃든 원자들에게서 빌려왔을 뿐이고,
인간들이 자랑스러워하는 예술작품들에 담긴
대가의 솜씨도 여전히 자연의 요소일 따름이다. (P.139, <자연>에서)
숲의 속삭임, 새의 지절거림은 우리에게 자연의 지혜를 알려주지만 귀가 어두운 인간들은 알아듣지 못한다. 우리가 그 숲의 선율을 들을 수만 있다면, 모두가 시인이 되어 순수한 심령을 지니고 자연과 일체가 될 것이다. 신에 가까운 행복을 누릴 수 있을 터이다.
신들을 담아내고, 하나의 의미,
다양한 음색을 지닌 기적 같은 시,
그런 시들은 자기 집에 갇힌 인간에게
신들의 삶터에 깃든 행복을 노래한다. (P.121, <나의 정원>에서)
<숲의 선율>은 수록된 작품 중 가장 긴 장시인데, 자연과의 교감을 홀로 즐기는 시인에 대한 찬미가다.
살아있는 만물의 연인,
마주치는 모든 것에 경탄하는 사람,
무엇보다도 스스로 경탄하는 사람, (P.143)
시인의 본질은 만물을 사랑하고 경탄하는 사람이다. 시인은 견자이며, 음유시인, 예언자이자 찬미자다. 그것이 시인의 역할이다. 그런 의미에서 시인의 다른 명칭은 현명한 순례자이자 철학자인 것이다
그런 사람이 있었다, 숲속의 견자,
자연의 사계를 노래하는 음유시인,
봄 유전형질들의 예언자,
천물절기의 운행을 미리 알려주는 현자,
산골짝들이 전하는 갖가지 기쁨을
가슴으로 알았던 진실한 찬미자가. (P.145)
어느덧 마지막 시에 이르렀다. 이 <시>는 시인의 유언이다. 자신이 후세에 기억되기를 바라는 개인적 면모와 함께 세상의 교화와 개선에 대한 한 가닥 미련을 포기 못하는 시인이 안타깝기도 하다.
아 각자가 자기만의 온순하고 청렴한
의지에 따라서 세상에 꿋꿋이 맞설 수 있는
정신들의 친교가 바로 천국 아닐까? (P.159)
독자의 감성에 직접적으로 소구하는 문학 형식이 기본적으로 시라고 생각한다. 감성을 일체 배제하면 더 이상 시가 될 수 없지만, 감성의 비율을 줄이고 이성의 비중을 늘리면 소위 지적인 시가 될 수 있다. 이미 읽은 시인들 중에서 에머슨만큼 지성의 비중이 높은 시인이 있었던가? 상기해 보아도 텅 빈 메아리만 울린다. 블레이크와 번즈는커녕 워즈워스와 콜리지조차도 상대적으로 감성과 이성이 비교적 균형을 이루었다고 생각한다.
그럼에도 에머슨의 시는 칙칙하고 따분하지 않다. 자칫 사상 면이 강조되기 쉬운 교훈적, 계몽적 입장이지만 간결하면서 재치 있는 표현, 심오한 지혜를 담고 있는 듯 엄숙하지만 심각하지 않은 문구, 참된 길을 알지 못하는 답답한 현실을 향한 투정어린 한줄기 비판 등은 그의 시에 따스한 혈액이 흐르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