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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 ㅣ (구) 문지 스펙트럼 2
랠프 왈도 에머슨 지음, 신문수 옮김 / 문학과지성사 / 1998년 1월
평점 :
품절
<수록 작품>
1. 자연
2. 미국의 학자
3. 초령(超靈)
4. 경험
에머슨의 저작집으로는 국내에서 가장 일찍이 출판된 책 중 하나다. 최근 에머슨의 잇따른 출판 행렬은 일종의 처세철학의 시각에 국한된 것이므로 순전한 에세이스트로서 미국 초기의 사상적 지도자로서의 에머슨의 모습을 제대로 볼 수 있는 좋은 기획이다. 특히나 <미국의 학자>는 이 책에서만 찾아볼 수 있다. 이하에서는 읽은 순서에 따른다.
1. 미국의 학자
‘미국의 지적 독립선언’으로 일컬어지는 역사적 의의가 있는 글이다. 정치적 독립을 이루어냈지만 문화와 사상 면으로는 여전히 유럽에 종속되어 있는 미국의 지성인들에 각성과 분발을 촉구하고 있다. ‘생각하는 사람’(Man Thinking)이기를 그만두는 학자는 그저 남의 생각을 흉내 내는 앵무새에 불과하다고 비판을 서슴지 않는다. 어디 미국뿐이겠는가? 주체적 사고 없이 소위 선진국의 문물이라면 무비판적으로 수용하는 국가, 사회, 개인 모두에게 적용될 수 있다.
참다운 학자를 교육하는 도구로서 에머슨은 자연, 책, 그리고 행동을 언급한다. 인간과 자연은 동일한 근원에서 나왔고 자연은 심령의 대응물이다. 따라서 자연과 자연의 법칙은 곧 자신과 자신의 정신의 법칙이라는 원리를 놓치지 말아야 한다. 이 대목은 그의 사상의 지속적이며 핵심적인 부분으로서 다른 글들에도 반복적으로 회자된다.
책은 과거의 영향 중에서 최상의 형태이다 (P.102)
에머슨은 책의 가치를 높이 평가한다. 그러면서도 책에 함몰되는 것을 경계한다. 단순한 책벌레는 피하라는 것이다. 독서는 자신의 사상을 심화하고 발현하는 도구로서 가치를 지닌다.
책은 오로지 영감을 불러일으키는 것으로써만 쓸모가 있는 것이다. (P.104)
책을 바르게 읽기 위해서는 창조적인 사람이 되어야 한다......창조적인 글쓰기와 마찬가지로 창조적인 독서가 필요한 것이다. (P.108)
행동 없는 학자는 창백한 지성인이자 역사의 비겁자로 전락하고 만다. “행동이 없으면 사상은 숙성하여 진리가 되지 못한다.”(P.110). 에머슨에 따르면 사고는 부분적 행위에 불과하며, 행동과 결합해야 총체적 행위가 된다.
학자의 책무는 사람들에게 현상 가운데에서 사실을 보여줌으로써 그들을 고양시키고, 분발시키고, 지도하는 데 있다. (P.115)
대중이 언제나 학자와 진리를 이해해주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에 가깝다. 학자는 외압에 굴복해서는 안 된다. 투명한 정신으로 영혼의 근원을 탐구한 후 철저히 자기 신뢰를 해야 한다. 그래서 “학자는 자유롭고 용감해야 한다.”(P.119).
이 글의 마지막 대목은 웅변적이며 자못 계시적이다. 감정의 고조를 이끌어내는 강연이나 연설의 말미로서는 훌륭하지만 이렇게 글로 읽으면 조금 당혹스럽다.
에머슨의 사상에 따르면 자연과 인간은 동일한 법칙에 연원한다. 우주와 세상을 올바로 이해하고 싶다면 무엇보다도 인간 자신의 내면에 대한 탐구를 할 필요가 있다. 이 매우 중대하면서도 미지의 영역에 미국의 학자들이 나서야 한다고 주장함으로써 끝을 맺는다.
2. 초령
제1 에세이집에 수록된 글이다. 초령은 영어의 over-soul을 번역한 어휘다. ‘초영혼’ 또는 ‘대령(大靈)’으로 번역하기도 한다. 초령 개념은 에머슨의 사상 전반을 관통하는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에머슨은 기본적으로 외면보다는 내면을 중시한다. 인간이란 존재의 외양은 그에게 있어 심령이 작용하는 기관에 불과하다고 본다.
인간을 신체적으로 뿐만 아니라 정신적으로 작동시키는 원리, 그것이 곧 심령으로서 모든 사람에게 존재하며 자체로 고유하며 자율적으로 기능한다. 심령은 개개인마다 상이하지만 한편으로 보편성을 지닌다. 즉 심령마다 존재하는 공통적인 본성이 초령이다. 초령과 심령은 통일성과 다양성의 관계를 지닌다. 초령을 통해서 인간은 개체로서의 독립성과 사회 구성원으로서의 집단성 사이에서 절묘한 균형을 얻게 된다.
인간의 심중에는 만유의 심령, 현명한 침묵, 모든 부분과 분자가 균등하게 상호 연관되어 있는 보편적 미, 혹은 저 영원한 하나가 들어 있다. 우리가 그 속에서 존재하고, 그 모든 지복을 우리에게 허용하는 이 심원한 힘은 어느 순간에나 자족적이고 완전할 뿐만 아니라, 보는 작용과 보이는 것, 보는 주체와 객체, 주관과 객관이 하나로 합치된 것이다. (P.137)
그리고 에머슨은 초령을 신과 동일시한다. 그의 초령 개념이 통상적인 관념과 철학 체계와 달리 종교적 성향이 강하게 드러나는 연유다.
그 제삼자 혹은 공통적인 본성은 사회적인 것이 아니라 몰인간적인 것이다. 곧 신 자체이다. (P.146)
심령은 초령과 인간을 연결하는 중계적 위치에 있다. 우리는 심령을 통해서 공통의 보편성의 일단을 접할 수 있을 따름이다. 근원적 진리의 단편이 이따금씩 찰나적으로 드러날 때 우리는 그것을 계시라는 개념으로 받아들인다. 에머슨은 따라서 심령을 진리의 인식자이자 계시자(P.148)로 파악한다.
자신의 내면이 황량하고 공허하지 않음을 깨달을 때 우리의 순수한 본성이 우주적 통일성과 잇닿아 있음을 자각할 때 우리는 본성이 더럽혀지는 것을 막고자 노력할 것이며 자신의 심령에 대한 신뢰의 끈을 놓지 않게 된다. 이처럼 자기 신뢰의 주장은 초령 사상에 근거한 것이다.
3. 경험
이 글은 에머슨의 제2 에세이집에 수록되었다. 어린 아들의 죽음을 겪은 후 자신의 감정을 뿌리에서부터 되짚어보고 있다.
아이의 죽음은 글자 그대로 그에게 커다란 슬픔과 충격을 안겨주었다. 누구나 마찬가지일 것이다. 하지만 시간의 경과에 따라 슬픔의 그림자는 희미하게 퇴색하고 얼마 후 우리는 아무 일도 없었던 듯 일상으로 복귀한다. 고통과 비애에 잠겨 삶과 죽음의 비극적 역설에 깊이 상념을 품고, 이제는 새로운 나날과 삶의 태도를 다짐하던 때의 기억은 흔적도 없이 스러졌다. 일견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현상이지만 에머슨은 여기에 천착한다.
나는 슬픔이 나에게 아무것도 가르쳐주지 않고, 나를 단 한 발자국도 더 참된 자연 속으로 데려다주지 않는 것이 슬프다. (P.174)
우리는 미래를 계산하고 예측할 수 없다. 비약적이고 충동적인 자연은 따라서 자발적이다. 우리는 인생의 결과를 추산할 수 없으며, 우연적 사건의 조우의 결과로 경험을 갖게 될 뿐이다. 이런 자연과 인생의 속성에 순응하는 삶의 자세, 그것은 삶의 영위 그 자체이다.
인생은 지적인 것도 비판적인 것도 아니고 완강한 것이다. (P.186)
관망과 계산을 포기하고 순간과 시간에 충실한 삶, 순간을 충만하게 하여 행복을 누리는 것, 이것을 아는 것이 삶의 지혜이다. 미래를 알 수 없기에 섣부른 기대와 실망을 품지 않는다. 현재의 우리 자신의 삶의 행복에 감사하면 충분하다.
일견 비관적이고 허무하게 보이지만 철저한 현재중심의 삶의 자세임을 알 수 있다. 인생 행로에 다가오는 비극과 고통을 짐작하고 대비하는 것은 가능하지 않다. 슬픔과 고통의 존재를 외면하지는 않지만 거기에 함몰되어서도 안 된다. 자연과 인생이 요구하는 삶의 방식은 순간과 현재에 최선을 다하고 충만하기 위해 노력하는 삶이다. 이것이 에머슨이 주장하는 현세적 인생관이다.
4. 자연
에머슨 최초의 저작물이다. 초기의 글이지만 그의 사상의 핵심을 관통하는 기본적 태도와 개념들은 여기에서 이미 뚜렷한 맥락을 구비하고 있다. 범상하게 넘기기 마련인 자연에 대한 인식을 새롭게 하고 인간과 자연의 관계를 재정립하고자 하는 저자의 의욕이 문장마다 배어있다.
철학적인 견지에서 보면 우주는 자연과 심령으로 구성되어 있다. (P.16)
에머슨에게 자연과 심령은 대립되는 개념이 아니다. 자연은 심령의 대응물이며, 심령은 자연이 내면화된 존재이다. 에머슨의 자연은 혼합적이다. 순수한 자연과 관념적 자연이 혼재되어 있다. 그의 글에서는 영국 낭만주의 시인, 특히 워즈워스의 그림자가 언뜻 비친다. 그렇지만 보다 영적인 요소의 강조로 그만의 독자성을 내비치고 있다.
에머슨은 자연이 우리에게 제공하는 여러 편익들을 제시하고 하나하나 살펴본다. 먼저 아름다움이다. 아름다운 자연은 보는 것 자체만으로도 충분한 아름다움을 베푼다. 여기에 영적인 요소, 즉 인간의 의지와 결합되면 한층 뜻깊고 신성한 자연의 풍광이 완성된다. 나아가 아름다움을 지적 대상으로 삼는 경우도 소개한다. 지성과 예술이다. 지성은 사물의 절대적 질서를 탐구하며, 인간에 의한 아름다움의 창조가 곧 예술이다(P.36).
자연은 언어에도 깊은 연관을 맺고 있다. 자연적 사실의 즉각적 대응물로서 언어 표현이 있음은 쉽사리 알 수 있으며, 저자가 보다 주목하는 것은 특정한 자연적 사실이 특정한 정신적 사실의 상징이 되는 사례이다. 여기서 에머슨은 이성과 영혼의 개념을 등장시킨다. 한편 자연은 영혼의 상징이므로 정신과 물질 사이에는 아래와 같은 관계가 성립한다.
자연 전체가 인간 정신의 은유이기 때문이다. 도덕적 자연의 법칙은, 마치 거울 속의 얼굴이 실제의 얼굴과 대응하듯이, 물질적 법칙과 대응한다. (P.45-46)
자연은 또한 오성의 훈련을 위한 학교이기도 하다. 자연과의 부단한 접촉을 통해 감각적 진리에 대한 오성은 강화된다. 여기에 이성과 양심이 추가로 반영되면, 자연은 돌연 도덕적, 윤리적 성격을 띠게 된다.
이상과 같은 자연에 대한 고찰은 자연의 실체적 존재성을 의심할 수 없도록 만든다. 감각과 오성의 인식에서 자연은 명확한 실체성을 지닌다. 반면 자연의 실체성에 대한 믿음을 흔들고 부정하는 의론이 관념론이다. 어떤 의미에서는 관점이 매우 부정적인 사상이라고 할 수 있다. 관념론은 자연에 대한 이성의 우위를 내세운다. 시인과 철학자는 모두 자연을 유동적이고 가변적인 존재로 파악하여 심령의 우위성을 주장한다. 반면 관념은 영속적이며 불변적인 존재이다. 자연은 덧없으며 관념은 이데아다.
관념론은 세계를 신 속에서 본다. 그것은 인간과 사물, 행동과 사건, 나라와 종교를 하나의 전체적 순환 속에서 바라본다. (P.76)
에머슨은 자연을 자체로서 이해하지 않는다. 자연은 보편적 영혼과 개인을 연결하는 중간 통로이자 창구의 역할을 수행한다. 아직 심령과 초령의 개념을 구체화하지 않은 시기이지만 인간의 영혼 속에 있는 고귀한 존재, 즉 심령과 심령들 간에 존재하는 보편적 영혼으로서의 초령의 본질을 명확히 인식하고 있다.
우리는 지고의 존재가 인간의 영혼 속에 존재함을 알고 있다. 우리는 또한 그 영혼이 지혜도 아니고, 사랑도 아니고, 미도 아니고, 힘도 아니면서, 그 모두가 일체를 이루고 있고, 만물이 그 때문에 그리고 그에 의해서 존재는 어떤 보편적 본질을 창조한다는 것을 안다. (P.79)
이상과 같은 자연론의 입장에서 에머슨은 당대 사회가 자연을 오성만으로 정복하려 든다고 비판한다. 그러한 사람을 “이기적인 야만인”(P.89)이라고 혹평한다. 부단한 자기 수양과 겸허한 마음가짐을 통해 보편적 영혼의 존재와 의의를 깨달을 때 진정한 자연주의자가 될 수 있다고 기술한다.
이상으로 에머슨의 4편의 에세이를 읽은 후의 단상을 마치고자 한다. 대개의 경우 일독에 그치는 경우가 일반적이지만 이 책은 삼독을 하였다. 마지막 삼독 째는 책상에 정좌하여 메모해 가면서 교과서를 공부하는 자세로 임하였다.
그의 사상이 심오한가? 개성 있지만 심오한 편은 아니다. 그의 문장이 어려운가? 그렇지 않다. 그의 문장들을 따로 떼어놓고 보면 자체로서 격언이나 금언집에 수록되기에 충분할 정도로 재치가 반짝이며 촌철의 지혜가 넘친다. 그렇다면 삼독을 할 정도로 이해에 어려움을 겪은 이유는 무엇인가? 그건 정확히 알 수 없다. 에머슨은 통일적이며 체계적인 사상가는 아니다. 그의 본질은 도덕가로서 에세이스트다. 여기에 문학적, 철학적 어휘와 표현이 전체 맥락을 이해하는데 어려움을 가중하였을 수도 있다. 물론 외서의 경우 언제나 그러하듯 번역의 문제일수도 있다.
비록 난관을 겪기는 했지만 그의 글을 반복적으로 읽는 자체는 매번 새로운 즐거움을 주었다. 참으로 독창적인 사상과 표현에 항상 감탄을 금하지 못하였다. 조만간 에머슨의 다른 에세이집을 다시 읽어볼 생각이다. 내가 어려움을 겪은 게 혹시나 이 책 자체에 귀인하는 것은 아닌지 확인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