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홍 글자 펭귄클래식 32
너새니얼 호손 지음, 김지원 외 옮김 / 펭귄클래식코리아 / 2009년 8월
평점 :
절판


세계문학사상 손꼽히는 명작을 이제 처음 읽는다. 내게는 다소간 편벽된 취향이 존재하는데 불륜의 여성이 주인공으로 나오는 소설은 기피한다. 일단 여성 주인공이라면 선뜻 이끌림이 덜 하는데 불륜을 저질렀다면 내용 자체가 식상하리라는 지레짐작이다. <보바리 부인><안나 카레니나>도 이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하였다. 그리고 이 작품도. 호손의 일련의 작품들을 읽어볼 순서가 되기도 하였고, 얼마 전에 읽은 고 장영희 교수의 책에서 이 소설에 대한 언급도 있어서 새삼 책장을 펼치게 되었다.

 

책의 플롯 자체는 널리 알려졌다시피 단순하다. 죄 지은 남과 여, 남자는 신분을 드러내기 어렵고 여자는 모든 수모를 감수하면서 함구한다. 여의 남편은 남자의 정체를 알아차리고 서서히 올가미를 죈다. 도덕적 양심의 기로에서 쇠락하는 남자. 복수에 혈안이 되어 인성이 타락하는 남편. 여자의 가슴에 아로새겨진 주홍 글자의 의미.

 

이 작품을 관통하는 키워드는 죄와 양심이다. 딤즈데일과 헤스터 사이의 간통은 요즘 관점에서라면 화젯거리도 되지 않는다. , 직업으로 인한 놀람은 존재하겠다. 더구나 헤스터의 경우 남편은 수년간 종적이 묘연한 처지이고 보면 동정표도 받을 만하다. 호손의 시기로부터 이백여 년을 거슬러간 미국 식민 초창기의 유난히도 엄격한 청교도주의가 지배하는 사회라는 점에서 둘 사이의 죄와 죄의 댓가로서의 주홍 글자가 심오한 의미를 지닌다. 모든 사회의 공통적 범죄 몇 가지, 예컨대 살인, 도둑, 강간 등을 제외하면 죄의 요건은 상대성을 지닌다. 특히 문화적, 종교적 죄는 편차가 심하다. 일순간의 잘못으로 인한 죄를 불구대천의 엄청난 범죄인 듯이 낙인찍는 사회의 부당성, 굴욕과 수모를 감수하면서 그 마을에서 살아가는 것만이 죄씻김을 받는 것으로 받아들이는 가치관. 이것은 오늘날 기준에서 보면 모두 이성적이지 못한 비정상에 해당한다.

 

딤즈데일이 목사가 아니었다면 양심의 고뇌는 한결 덜했을 것이다. 성인에 준할 정도로 당대에서 추앙받는 젊은 목사. 반면 내면에서는 죄를 범했으며 떳떳하게 고백하지도 못하였다. 한결 대범한 목사였다면 또 이래저래 넘어갔을 수도 있으련만 예민한 감성의 소유자인 그는 그러하지도 못하고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스스로를 학대한다. 그가 악한 인성을 지닌 이가 아니라는 점은 헤스터가 그를 원망하지 않으며, 끝끝내 그의 정체를 숨기고 감싸는 데서도 추측할 수 있다. 헤스터는 딤즈데일을 이해하고 용서해주었다. 오랜만에 마주친 그의 용모가 비길 데 없이 쇠락해진 데 충격을 받을 정도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녀는 여전히 그를 사랑한다.

 

비참한 운명의 두 연인 사이를 음울과 냉혹으로 갈라놓은 존재는 헤스터의 남편 칠링워스다. 그는 비록 신체적으로 불구의 몸이지만 드높은 학식과 고매한 지성을 지닌 것으로 기술된다. 자신이 헤스터를 사랑했는지 아니면 아내가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사실은 조금도 중요하지 않다. 오로지 가정의 이념적 평온과 안온을 기대하던 그는 복수만을 꿈꾼다. 화끈하게 단번에 정체를 폭로하고 가증스러운 가면을 벗겼다면 최소한 뭇사람(적어도 동병상련의 처지에 놓인 남편들)의 지지는 받았으련만 그는 딤즈데일을 고사시키는 방식을 택했다. 서서히 끊임없이 그의 연약하고 민감한 양심의 줄을 건드려 불안과 고뇌 속에 허덕이게 만들고 죄의식에 몸부림치게 만들면서. 법적 용어에서 과잉금지의 원칙이 있다. 칠링워스는 바로 이 점을 크게 위반하였다. 딤즈데일을 괴롭히면서 죽지 않을 만큼만 건강을 유지시켜주는 그의 모습은 외모뿐만 아니라 내면에서도 이미 악마에 가깝다.

 

지금의 내가 어떻게 변했는지 당신한테 이미 말했잖아! 난 악마야! 누가 나를 이렇게 만들었소? (P.228)

 

작품의 형식과 관련하여 시점 내지 화자가 다소 독특하다. 작가는 이야기의 창조자가 아니라 옛 두루마리에 적힌 이야기를 독자에게 들려주는 전달자의 역할을 자임한다. 작가는 이야기의 모든 것을 알고 있으며 독자에게 스스럼없이 드러낸다. 자신은 제삼자에 불과하므로 때로는 전달자, 또는 독자와 함께 이야기의 전개와 작중 인물에 대해서 주저 없이 개입하고 임의로 재단하며 심판하고 독자에게 권고하며 구구절절한 촌평을 주워섬기기도 한다. 주요 인물 세 사람의 주도적이고 능동적인 행위와 대화로 작품이 진행되지 않는다. 이야기의 진행과 휴지, 속도의 증감, 이야기 자체의 충실과 딴청부림 등은 오로지 화자를 가장한 작가의 전유한 특권이다. 사건과 대화 위주로 정신없이 흘러가는 유형의 소설에 익숙한 독자라면 매우 낯설고 답답함을 느낄 수도 있겠지만 의외로 책장을 넘기는데 별다른 어려움을 느끼지 않는 점에서 과연 명작이라고 하겠다.

 

헤스터 프린이 이 세상에서 자기보다 더 큰 죄를 지은 사람은 아무도 없다고 애써 믿으려한 사실이야말로, 자신의 연약한 천성과 인간 사회의 가혹한 규범의 희생양이 되어버린 그녀가, 완전히 타락하지 않은 증거라고 독자들은 받아들여 주기 바란다. (P.116)

 

목사는 교활하면서도 양심의 가책을 받고 있는 위선자였기에 그의 애매한 고백이 신도들 눈에 어떻게 비칠 것인지 잘 알고 있었다. 목사는 죄책감을 고백하는 것으로 제 자신을 속이려 했으나 자기기만에서 얻는 일시적인 안도감도 없이 도리어 수치스러운 자기 합리화라는 또 하나의 죄를 더했을 뿐이었다. (P.189)

 

작품의 또 다른 핵심 키워드는 진실이다. 그것이 삶이든 내면이든 진실은 소중하다. 세인에게 질타당하고 배척받더라도 진실을 가슴에 품었다면 외롭지 않고 당당할 수 있다. 진실이 무엇이고 어디에 있는지를 알면서도 공개할 수 없는데서 양심은 괴로움을 겪고 죄의식에 빠지게 된다. 목사는 반쪼가리 진실만을 간신히 붙들고 버틴다. 커다란 진실을 은폐한 그이지만 스스로를 해할 정도의 자책과 고뇌는 진실에서 영구 추방을 면하게 하였다.

 

헤스터는 죄를 인정하고 댓가를 순순히 감내하였다. 아무리 수치스럽고 모멸감을 안겨주는 처벌일지라도 그녀는 양심과 진실 앞에서는 거리낌을 갖지 않았다. 그녀가 타락의 길에 빠지지 않고 올바른 길을 갈 수 있었던 동력이 여기에 있다. 그녀는 진실한 삶을 살았다. 주홍 글자를 피하지 않고 직면한 용기를 통해.

 

진실하지 않은 자에게는 온 우주가 거짓이자 허무이며 붙잡기가 무섭게 줄어들어 아무 흔적도 남지 않는 법이다. (P.191)

 

나는 이 주홍 글자가 가르쳐준 덕분에 영혼 속까지 태우려 드는 시뻘건 불덩이 같은 진실을 깨달았어요. (P.229)

 

진실하라! 진실하라! 진실하라! (P.346)

 

작품이 해피엔딩으로 끝나지 못하리라는 점은 헤스터가 주홍글자를 벗어던지자 딸 펄이 가까이 다가오는 것을 거부하는 장면에서 암시하고 있다. 새로운 땅으로 떠나려는 계획도 틀어지자 목사에게는 신의 뜻으로 해석되었을 것이다. 타락한 목사의 허위로 가득 찬 삶에 대한 처벌. 더할 나위 없이 쇠약한 그가 처형대에 올라 숨겨왔던 진실을 토로하는 대목은 더없이 극적이며 감동적인 순간이다. 이로써 그는 죄를 인정하고 진실을 회복하였으며 양심의 가책을 벗어던질 수 있게 되었다. 피할 수 없더라도 그의 죽음의 양태는 분명 이전과 달라졌으리라.

 

헤스터, 우리가 이 세상에서 가장 사악한 죄인인 것은 아니오. 이 타락한 목사보다도 더 나쁜 놈이 있소. 그 노인네의 복수는 나의 죄보다 훨씬 더 흉측하오. 그 작자는 냉혹하게도 인간의 마음속에 있는 신성을 깨뜨렸소. 헤스터, 당신과 나는 결코 그런 죄는 범하지 않았소! (P.260)

 

우리가 깨뜨린 율법! 여기서 무섭게 폭로된 죄! 이것들을 늘 생각하시오! 나는 두렵소! 두려워요! 우리가 하나님을 잊었을 때, 우리가 서로 다른 사람의 영혼에 대한 존중을 저버렸을 때, 그때부터 우리가 내세에서 영원하고 순수한 결합을 하길 바랐던 희망은 깨지고 말았을 겁니다. (P.343)

 

주홍 글자는 외견상 헤스터 프린의 가슴에 덧붙여졌지만 사실은 딤즈데일과 칠링워스의 가슴 깊숙이 지울 수 없이 견고하게 새겨졌다. 각각 진실의 외면과, 그리고 마음 속 신성을 파괴한 댓가로서.

 

앞서 수록된 <세관>은 반쯤은 호손의 삶의 단편을 들여다보는 재미로써 나머지는 헤스터 프린 이야기의 발견 계기로 의미가 있다. 작가는 이를 통해 <주홍 글자>의 진술의 정당성과 진실성을 주장한다. 한편 말미의 작품 해설에서 호손 작품에서 진술자의 독특성과 진술의 모호성에 대한 설명은 무척 흥미롭다. 역자는 작가가 작품과 일부러 간격을 떨어뜨려놓고 서술자라는 간접적 존재의 등장으로 다양한 해석이 가능한 텍스트의 개방성을 목적하고 있다고 풀이한다. 그것이 작품의 위대성을 직접 대변하지는 못하더라도 음미해볼 가치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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