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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홉의 손, 은화 한 닢
마르그리트 유르스나르 / 책세상 / 1992년 2월
평점 :
절판
원제는 <꿈의 은화>이다. 1934년 처음 발표하였고, 1959년에 전면적으로 개작하였다. 따라서 초기작임에도 불구하고 작가의 원숙한 필치가 배어난다. 배경은 1930년대 이탈리아 로마. 실명은 거론하지 않지만 독재자 치하임을 밝히고 있어 무솔리니의 파시스트 집권 시기임을 알 수 있다.
작가는 은화 한 닢을 매개로 은화를 건네주고 건네받는 관계 설정을 통해 다종다양한 인간 군상의 삶의 행태를 차분하게 묘사하고 있다. 작가는 인물들에 지나친 감상을 부여하지 않는데 딱하고 동정 받을 만한 인물에도 덤덤하며 비난받을 여지가 충분한 인물의 경우에도 그들의 입장과 시각을 통해 독자로 하여금 한 번 더 생각해 볼 기회를 제공한다. 은화 한 닢의 구상은 작가에 따르면 상투적이지만 의도적이라는 측면에서 작위성이 강하다. 그것은 여러 인물들을 하나로 묶어주어 작품에 체계성을 부여하는 역할도 수행하는 동시에 그들의 삶이 비록 개별적이고 고립적인 삶이지만 세상과 완전히 동떨어진 삶은 아님을 드러낸다는 점에서 시사적이다.
소설은 마르첼라에 의한 독재자 암살 기도와 실패를 줄기로 한다. 독재자와 암살 기도를 제재로 했다고 해서 파시스트 독재 고발을 목적으로 했다고 여기면 지나친 의미 부여가 될 것이다. 암살 시도는 오히려 작품의 계기가 되었음직하다.
인물들 간에 어지럽게 뒤섞인 인간관계를 따라가 보자. 파올로 화리나는 여배우 안졸라 피데스와 창녀 리나 키아리와 연결된다. 화장품상점 주인 줄리오 로비지는 딸 조반나를 통해 사위 카를로 스테바와 관련되고 상점 점원 영국 아가씨 존스 양과 연결된다. 창녀 리나 키아리는 파올로 화리나, 애인 마시모, 의사 알렉산드로 사르테와 이어진다. 사르테는 암살 미수의 마르첼라의 남편이자 극장에서 여배우 안졸라 피데스와 마주친다. 안졸라 피데스는 누구인가? 그녀는 안졸라 디 크레도로 언니는 로잘리아 디 크레도로서 성당에서 양초 파는 아가씨다. 사르테의 아내 마르첼라는 카를로 스테바와 마시모로, 마시모는 리나 키아리와 나중에 늙은 화가 클레망 루와 인연이 있다. 꽃 파는 디다 할멈을 빼놓을 수 없다. 인색한 노파인 그녀는 사위 오레스테 마리눈치, 성당 주임 신부인 치카 신부, 클레망 루 등과 작중에서 연계된다.
로잘리아의 비난에도 불구하고 파올로 화리나를 나쁘게 보긴 어렵다. 그는 안졸라에 매혹되어 부푼 가슴을 안고 행복한 결혼 생활을 꿈꾸었다. 아내의 가출 후 그녀에 대한 환상을 좇으며 그녀는 창녀 리나 키아리와 지속적 관계를 맺는다. 그의 안온한 꿈은 현실의 처참함으로 깨어지고 말았다. 작가는 이렇게 말한다.
사랑은 돈으로 살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요컨대 자신을 파는 여자들은 남자들에게 자신을 빌려주는 행위를 할 뿐이다. 그러나 꿈은 살 수 있기에 이 만져볼 수 없는 상품은 온갖 다양한 형태로 팔리고 있다. 파올로 화리나는 매주 리나에게 건네주는 적은 돈으로 자기 뜻대로 되는 환상, 아마도 이 세상에서 속이지 않는 유일한 것인 환상의 대가를 치렀다. (P.18)
줄리오 로비지는 어떠한가? 늙은 아내와 유형에 처해진 사위로 눈물짓는 딸 때문에 그는 노심초사다. 하나뿐인 손녀마저 병약하다. 로잘리아와 안졸라는 이질적인 자매다. 로잘리아는 시칠리아의 평온을 그리워하지만, 안졸라는 시칠리아를 지긋지긋하게 여겼다. 전통과 부친에 얽매여 자신의 삶을 하염없이 쭈그러뜨리는 언니와 달리 안졸라는 배우로 대중적 성공을 거둔다. 하지만 그녀의 실제적 삶도 성공적인가? 거리에서 꽃 파는 인색한 노파 역시 눈부신 젊은 시절이 있었지만, 이제는 마음에 안 드는 자식들과 자신의 돈에 눈독 들이는 주정뱅이 사위가 골칫거리다.
전체적 비중과 의의로 보건대 그래도 이 작품의 핵심 인물은 마르첼라와 남편 사르테라고 할 수 있다. 그녀와 남편은 여러 모로 대척점에 놓인 인물이다. 급진파 대 보수파. 이상주의자 대현실주의자. 불행한 가족력을 지닌 여인 대 당대에 성공한 의사. 두 사람은 상이한 가치관에도 서로에 대한 사랑의 감정을 지니고 있다. 평범한 여인이었다면 나름대로 부족할 것 없는 행복한 결혼 생활을 누렸을 터이다. 그녀는 남편에게서 가면 속의 참 모습을 보았다.
의사 알렉산드로 사르테는 하나의 얼굴이라기보다는 일련의 가면들로 이루어진 무표정하면서 동시에 끊임없이 변하는 그런 얼굴을 가진 사람들 중의 하나였다. (......) 끝으로 알렉사드로 사르테가 자기 혼자 있다고 여기거나 혹은 누군가 보고 있지 않다고 여기는 드문 순간들에는 그의 진정한 모습, 즉 냉혹하고 무자비하며 황량한 표정을 띤 얼굴이 나타나는 것을 볼 수 있었다. (P.93~34)
그렇다고 사르테가 못된 유형의 인간은 아니다. 사실 모두가 가면을 쓰고 있으며 쓰지 않는 사람들은 극소수이며 대개 사회부적응자 내지 실패자들이다. 하지만 부모의 영향, 피억압인들에 대한 이상주의적 헌신으로 가득 차 있는 그녀에게 지극히 현실론자인 남편과의 생활을 견딜 수 없었던 것이다. 독재자 케사르를 저격하러 가는 마르첼라를 묘사하는 장면은 지극히 전사적인 그녀의 모습을 잘 드러낸다.
한바탕 폭풍이 몰아친 이후 독재자 케사르는 영혼의 평화를 얻으며, 줄리오와 알렉산드로는 잠들지 못한다. 돈 루제로, 리나 키아리, 클레망 루, 안졸라, 디다, 마시모 모두 나름대로 삶의 하루를 마치고 있다. 존스 양도 로마를 떠날 새벽 열차를 기다린다. 그리고 디다의 사위 오레스테는 술에 취해 죽은 사람처럼 행복한 채 쓰러진다.
인간의 삶은 겉으로 보여지는 모습과 실제 당사자의 관점에서 바라보는 실상은 판이하게 다를 수 있다. 이는 단지 관찰자의 시점 차이 이상의 것이다. 우리는 인물의 외관만으로 내면을 섣부르게 추론하고 시비를 예단하곤 한다. 우리가 제아무리 눈을 부릅뜨고 노려봤자 그것은 지각의 껍데기만 바라볼 뿐 지구의 핵은커녕 맨틀조차도 언감생심이다.
삶을 평가하는 잣대는 여럿 있다. 좋은 삶, 멋진 삶, 성공한 삶 등등. 하지만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한 일률적 평가는 불가능하다. 인생은 교과서에 나오듯 도식적이지 않다. 작가는 여러 인물의 삶을 하나하나 독자에게 제시한다. 성급하게 재단하지 않는다. 독재자로부터 저항투사에까지, 시장에서 꽃 파는 노파에서 유명 여배우에까지, 삶의 스펙트럼을 그저 보여줄 뿐이다. 그네들의 현실의 삶의 외양과, 내면 독백을 통한 진실한 목소리를. 판단은 독자의 몫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