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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온 기적 살아갈 기적 - 장영희 에세이
장영희 지음, 정일 그림 / 샘터사 / 2009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고 장영희 교수의 두 번째 에세이집이자 유작이다. 저자의 사망 뉴스와 함께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던 화제의 책인 동시에 내가 장영희란 인물에 대해서 비로소 듣게 된 계기가 되었다. 솔직히 처음엔 무슨 대단한 사람이기에 제도권 언론에서 그렇게 부음을 떠들썩하게 전하나 의아해하기도 하였다. 그러했던 내가 이것을 포함하여 저자의 책을 다섯 권째 읽는 셈이다. 그것도 모두 구입(신간은 아니고 중고이지만)해서 말이다.
장영희 선생의 글의 미덕은 새삼 느끼지만 가독성이 높다. 독자가 글을 읽는데 하등의 어려움과 불편도 느끼지 않고 쉽고 술술 읽히도록 글을 쓴다. 쉬운 글쓰기의 의미가 자칫 글의 수준이 낮다는 오해를 사기 쉽지만 과시적이고 현학적이지 않게 독자의 관심과 주의를 집중시키는 글쓰기는 아무나 가질 수 있는 능력이 아니다.
게다가 선생의 글은 가식 없이 솔직하다. 명문대 대학교수이자 인지도 높은 칼럼니스트로 고상하고 도도한 척 굴려고 하면 한없이 올라갈 수 있으려만 선생은 자신의 몸을 한껏 낮춘다. 신체적 장애와 관련하여 굳이 숨기지 않고 자연스레 기술하며, 부모와 가족에 얽힌 사연들, 학생들과 수업과 관련된 이러저러한 일화들을 가감 없이 서술한다. 자신의 생활 태도와 습관, 성격 등 때로는 약점이라고 치부될 만한 것도 감추지 않는다. 정리정돈에 약하고, 대단한 방향치에 길치라는 점, 게으르고 나태한 성격 등. 이런 솔직함은 대학교수이자 영문학자라는 딱딱한 껍데기에 지레 겁먹고 접근하지 못하는 대중들에게 단단한 외피를 벗어던지고 인간 장영희 본연의 모습을 볼 수 있고 스스럼없이 다가서게 만든다.
사랑을 버린 사람이든 사랑에 버림받은 사람이든, 다시 한 번 가슴 아프게 떠올리며 보석 같은 눈물을 흘릴 수 있는 사랑의 추억이 있다는 것은 이 가을에 한껏 누릴 수 있는 커다란 축복이다. (<사랑을 버린 죄>에서, P.47)
세상 사는 것이 만만치 않다고 느낄 때, 죽을 듯이 노력해도 내 맘대로 일이 풀리지 않는다고 생각될 때, 나는 내 마음속에서 작은 속삭임을 듣는다. 오래전 내 따뜻한 추억 속 골목길 안에서 들은 말. (<괜찮아>에서, P.132)
일반인들의 명사의 에세이를 통해 기대하는 것은 대단한 철학과 심오한 종교, 도덕적 가치의 함양 등이 아니다. 유명인들의 생활과 생각도 우리네 범상한 이들과 큰 차이가 없구나, 그들도 역시 우리랑 비슷한 족속이구나. 이와 같은 동질감 내지 공감이 아닐까. 그런 가운데 미처 환기하지 못했거나 간과했던 삶의 반짝거리는 깨우침과 지혜를 통해 그래도 조금 뛰어난 사람이군 하면서 거부감 없이 인정하게 된다. 그리고 작자 스스로는 어떻게 바라볼지 몰라도 독자들은 확실히 안다. 인간 장영희의 가슴은 더할 나위 없이 맑고 순수하며 게다가 따뜻하다는 것을.
이러저러한 내용 중에서 몇 군데는 특히 나의 일상과 비교하여 뜨끔하게 만들거나 좀 더 이모저모 생각하게 만든다.
가끔 내 마음속에는 이렇게 평화를 싫어하고 오히려 분란 일으키기를 좋아하는 도깨비 같은 게 살고 있는 것 같다......어쩌면 누구든지 마음속에는 작든 크든 그런 도깨비가 살고 있는지 모른다. (<마음 속의 도깨비>에서, P.40)
내 마음속 도깨비도 되돌아보면 남들 것 못지않게 커다랗고 짓궂은 녀석이다. 이 녀석은 화끈하게 자신의 존재감을 과시하지 않으면서 삐딱한 언사로 툭툭 내뱉는다. 속마음은 안 그런데 괜히 친절하고 부드럽게 하는 것은 약한 모습을 보인다고 생각해서인지 딱딱하고 퉁명스러움을 대놓고 표시한다.
어린 그들이 최선을 다해 치열하게 뼈아픈 고통과 긴장을 겪는 시간에 나는 단지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무위의 재능’만을 아낌없이 발휘하고 있는 것이었다. (<무위의 재능>에서, P.109)
글쎄, ‘무위’가 반드시 무가치한 악습이라고 생각되지는 않는다. 오히려 현대 사회는 과도한 ‘유위’를 계속하여 요구하고 있는데서 문제가 생기는 게 아닐까. 내가 싫어하는 용어 중 하나가 ‘시테크’이다. 한 치의 빈틈도 없이 빽빽하고 정신없는 일과를 살아가고 쉴 새 없는 약속과 과업 사이에서 허덕여야 유능하고 앞서가는 인재로 비친다. 가던 길 멈추어 서서 주위를 둘러 볼 수 있는 물리적, 정신적 여유를 가질 수 있도록 하는 ‘무위’는 참으로 유익한 재능이다.
그래도 지금 내가 여기서 왼쪽으로 가야 할지 오른쪽으로 가야 할지 결정하는 건 순전히 내 자유의지야. 여차하면 차 버리고 택시 타고 가면 되지. 길에서 끝없이 헤매는 것이 인생에서 끝없이 헤매는 것보다는 나으니까. (<새처럼 자유롭다>에서, P.204)
길에서는 잘 헤매지 않는 편이다. 애초 초행길의 경우는 사전에 포털 사이트의 지도서비스 등을 검색해서 대략적인 위치와 행로를 머릿속에 담아둔다. 반면 인생에서는 갈팡질팡 이다. 묵묵히 일관된 삶을 걸어간다고 남들은 알고 있지만, 실은 아무것도 선택하거나 결정하지 못하여 그냥 직진하는 인생이다. 그런 면에서 온갖 고초에도 도전을 포기하지 않아 꿈을 이루어낸 작자가 새삼 대단하다.
가난은 나라도 구제 못 한다는데 그깟 한 명 도와준다고 세상 달라질 것 있나 했던 생각은 ‘무더기 환자’ 가운데 한 사람으로 ‘무더기 학생’들을 가르치며 살아가는 데 익숙한 내가 한, 참으로 알량한 생각이었다. (<나의 불가사리>에서, P.229)
‘사랑의 리퀘스트’ 류의 프로그램을 거의 보지 않는다. 물론 TV 자체를 썩 보지 않는 연유도 있지만, 간만에 보더라도 굳이 어렵고 불우한 사람들의 삶은 보면서 마음을 불편하게 하고 싶은 생각이 없어서다. 길거리에서 구걸을 하거나 도움을 청하는 사람들에 대해서도 냉정하게 외면한다. 속마음으로 도와줄까 망설임도 있지만 그들이 진정 어려운 처지의 사람들인지 아니면 그런 척하면서 세인의 선의를 이용하는 경우가 아닌지 의심한다. 작자의 각성은 내 속 좁은 방어막을 위태롭게 두들긴다. 익명의 집단성에서 개체의 고유성과 개별성을 발견하는 것, 그것은 필요하지만 어려운 과제다. 이것이 나만의 흠결은 아니라고 스스로 위안을 삼는다.
‘어떻게 살 것인가?’는 인간의 영원한 화두다. 정답은 무엇인지 과연 정답은 존재하는지 아무도 알지 못하는 가운데 각자가 나름대로의 방식으로 자신의 삶을 살아간다. 그리고 대다수의 사람들은 생의 중도에서 혹은 마지막 길목에서 걸어온 삶을 반추하면서 뼈저린 후회를 하곤 한다. 오십대에 다다른 작자에게도 삶의 의미는 남다르게 다가오는 모양이다. 일찍이 가늘고 길게 이승에서 오래 살고 싶다는 속내를 밝혔지만 그래도 깨끗한 모습으로 가고자 하는 바람을 품는다.
생각해 보면 나도 내 인생의 가을 문턱에 서 있다. 삶에 대한 애착이야 남겠지만 그래도 있는 날까지 있다가 내 시간이 오면 나무처럼 풀처럼 미련을 버리고 아름답게 떠나고 싶은 마음은 있다. (<내가 살아보니까>에서, P.118)
에필로그에서 선생은 자신의 투병을 다시금 밝힌다. 벌써 세 번째 암 투병, 질기고도 독한 녀석이다. 듣는 말에 따르면 항암 치료는 암세포를 죽이는 동시에 정상세포마저도 죽인다고 한다. 수년간의 투병에서 벗어나 겨우 몸을 추스르고 정상적인 삶의 궤도를 밟기 시작한지 얼마 안 되었는데, 다시 내려오라는 성화가 극성이다. 가망 없을 줄 짐작하고 있으련만 한조각 희망의 위대한 힘을 믿고 새봄을 기다린다는 선생의 결의가 오히려 처연하게 다가온다.
아름다운 빚을 지고 떠나기 전에 여러분께 마지막으로 고백합니다. 여러분, 고맙습니다. 그리고 사랑합니다. (<아름다운 빚>에서, P.67)
두 번째 투병을 위해 칼럼 연재를 마치면서 선생이 독자에게 보내는 작별 인사다. 이것을 선생의 사세구(辭世句)로 받아들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