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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지개 ㅣ 민음사 세계시인선 21
W.워즈워드 지음, 유종호 옮김 / 민음사 / 1974년 4월
평점 :
품절
블레이크와 번즈에 뒤이어 자연스레 워즈워스와 콜리지가 다가온다. 영국 낭만주의의 문을 본격적으로 열어젖힌 두 시인 중 먼저 워즈워스다. 선배들에 비교할 때 두드러진 특징은 바로 ‘자연’에 있다. 단지 짤막한 배경이 아닌 시상의 중심에 들어와서 시인의 심상에 깊은 영향을 미치는 자연. 그리고 자연을 바라보는 시인의 ‘관조’적인 태도. 블레이크의 강렬한 열정, 번즈의 진솔미와 해학과는 차별되는 워즈워스만의 독특한 미감이라고 할 만한다.
워즈워스는 자연의 아름다움을 예찬한다. 무심히 넘기기 쉬운 영국의 범상한 산하가 그에게는 더할나위 없이 소중한 풍경으로 다가온다. 자연의 미덕에 대한 감성을 끊임없이 자각하는 능력의 소중함, 그것이 없다면 시인은 죽은 것이나 다름없다고 단언한다.
하늘의 무지개를 볼 때마다
내 가슴 설레느니,
나 어린 시절에 그러했고
다 자란 오늘에도 매한가지,
쉰 예순에도 그렇지 못하다면
차라리 죽음이 나으리라.
어린이는 어른의 아버지
바라노니 나의 하루하루가
자연의 믿음에 매어지고자. (<무지개>에서, P.18)
자연은 시인에게 자체로 그치지 않는다. 자연의 풍경이 시인의 상념에 미친 감흥을 즉물적으로 반응하지 않는다. 차분한 관조와 사색의 결과로 자연은 우리에게 의미를 드리우게 된다. 워즈워스의 자연은 모두 다 이러하다.
무연히 홀로 생각에 잠겨
내 자리에 누우면
고독의 축복인 속눈으로
홀연 번뜩이는 수선화.
그때 내 가슴은 기쁨에 차고
수선화와 더불어 춤추노니. (<수선화>에서, P.12)
그런 연유로 시인은 체험 후 시간의 경과 또는 간접 경험으로도 시상을 구현하는데 어려움을 느끼지 않는 듯하다. <가을걷이하는 처녀>에서 간접경험을 통한 시적 영감의 발휘를 볼 수 있는데, 시인에게 직접적 자연의 생생함 보다는 자연을 통한 정서의 고조와 사념의 감흥이 중요함을 알 수 있다. <노고지리에게>와 <뻐꾸기에게 부쳐>에서도 자연물에 의탁하여 시인의 감정을 표현하고 있다.
너를 찾으려
숲속과 풀밭을
얼마나 헤매였던가
너는 여전히 내가 그리는
소망이요 사랑이었으나
끝내 보이지 않았다. (<뻐꾸기에게 부쳐>에서, P.44)
이러한 자연 사랑은 애국 정신으로 확장된다. 애호하는 자연과 돈독한 정을 쌓은 친우들이 있는 곳, 그곳을 사랑하지 않는다면 어디를 사랑할 수 있겠는가. <낯 모르는 사람 속을>, <웨스트민스터 다리 위에서>, <다시 고토에서>와 같은 시편에서 볼 수 있는 시인의 조국 예찬은 그러나 이념적, 추상적 조국이 아닌 구체적, 자연적 조국에 대해서다.
내 나라 영국이여!
얼마나 그대를 사랑하는가
그때 비로소 그것을 알았노라. (<낯 모르는 사람 속을>에서, P.22)
세상에 이보다 아름다운 것이 또 있을까.
이렇듯 뿌듯이 장엄한 정경을
그냥 지나치는 이는 바보이리.
런던은 지금 아침의 아름다움을
의상처럼 걸치고 있구나 (<웨스트민스터 다리 위에서>, P.62)
반면 사랑이 깊은 만큼 이상과 부합하지 않는 현실에 대한 실망감도 클 수 있다. 프랑스 혁명의 열기를 목도하고 돌아온 젊은 시인의 눈에 보수적, 복고적인 영국의 현실에 대한 실망감의 토로는 당연할 것이다.
영국은 썩은 물이 고인 웅덩이
제단도 칼도 붓도 노변도 웅장한 대청과 방도
내면의 행복이란 유서 깊은 유산을 잃었습니다.
우리는 모두 제 잇속만 차리는 무리 (<런던 1802년>에서, P.74)
장시 중에서 우선 <루시 그레이>가 흥미롭다. 명백히 발라드로 분류될 수 있는데, 일련의 루시 시편들과의 연관성이 궁금하다. <결의와 독립>이라는 이지적인 표제의 시는 폭우가 그친 후의 생기 넘치고 화창한 자연으로 개시한다. 황야의 나그네인 시인, 그는 자연의 기운에 힘입어 잠시 즐거움에 사로잡히지만 이내 두려움에 사로잡힌다. 시인이 두려움에 빠지는 연유는 명확하지 않다. 다만 불안정한 앞날에 대한 시인 자신의 심려가 반영된 것은 분명하다.
공포와 공상이 마구 육박해 왔다.
흐릿한 슬픔 – 아지도 못하였고
이름 붙일 수도 없는 마구잡이 망상이. (P.80)
그 전의 생각이 되돌아왔다.
섬뜩한 공포, 실현되기 어려운 희망,
추위, 고통, 노동, 모든 육체의 병,
그리고 비참하게 죽은 위대한 시인들. (P.94)
하지만 시인은 거머리잡이 노인을 보고 자성한다. 그리고 새로이 결의를 다진다.
그렇듯 노쇠한 노인에게 그처럼 강단 있는 정신이 있음을 보고
나는 자신을 비웃고 싶은 지경이었다. (P.98)
<틴터언 사원>은 워즈워스의 장시 중에서 가장 유명한 작품일 것이다. <루시 그레이>와 <결의와 독립>은 나름대로 가시적인 줄거리를 가지고 있어 시상의 흐름을 좇는 데 별다른 어려움이 없다. 이 작품은 5년만의 재회하는 경치의 아름다움을 되새기면서 세월의 추이가 시인에게 사상의 발전을 가져왔으며, 경치의 외면적 아름다움만을 인식하던 과거에서 벗어나 이제는 좀 더 깊이 사물의 본질을 바라볼 수 있게 되었음을 드러낸다. 시인이 ‘마음의 풍경’(P.108)을 인식하는 내적 단계는 작품 속에서 경치 → 정감 → 평안 → 기쁨 → 숭고 → 정화 → 사랑 → 사물의 얼(P.104~106)로 연결된다.
일변 조화의 힘과
기쁨의 크나큰 힘으로
안온해진 속눈으로
우리는 사물의 얼을 본다. (P.106)
나는 배웠다......
마음을 진정시키는 큰 힘을 지닌
고요하고 슬픈 인간성의 음악에
귀기울이며
자연을 바라보는 법을
그리고 나는
숭고한 생각의 기쁨으로
내 마음을 출렁이게 하는
한 존재를 느끼게 되었다. (P.112)
이렇듯 자연은
우리의 마음을 도야해주고
고요와 아름다움으로 감동을 주고
드높은 생각의 먹이를 준다. (P.118)
이러한 야성의 환희가 무르익어
차분한 기쁨이 되고,
그대의 마음이 온갖 아름다운
형상의 대궐이 되고 (P.120)
워즈워스 시는 단번에 독자의 눈과 마음을 잡아채지 못한다. 처음 읽어서는 그 온건한 사상과 심심한 표현에 납득이 안 가고 지루함마저 느낄 수 있다. 두세 번 되풀이 읽고 곰곰이 마음 속으로 되씹어볼 때 아 이것이 그의 시의 묘미구나임을 새삼 깨닫게 된다. 문학사적으로 볼 때 워즈워스의 가치는 앞선 귀족 중심의 시대와 달리 일반 사람들이 실제로 쓰는 말로 시를 쓰겠다고 표명한데 있다고 한다. 계급적 차별의 타파와 시의 본질에 대한 새로운 정의, 이것은 청년 시절 프랑스 대혁명의 정신적 영향임을 부인할 수 없다. 중년 이후의 그의 작품들이 비판의 대상마저 되지 못하는 범작에 그친 것은 스스로 삶의 테두리를 한계지어 넘쳐흘러야 할 강력한 감정이 고갈된 연유가 아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