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 내사랑 - 한권의시 63
ROBERT BURNS / 태학당 / 1994년 10월
평점 :
절판


앞서 로버트 번즈의 시 몇 편을 읽었는데, 이대로 떠나기에는 아쉬운 생각이 들어 그의 시 선집을 다시 찾아 읽는다. 이십 년 전에 초판이 인쇄되었고 진작 절판되어 시중에서 구하기는 용이하지 않다. 모두 25편의 주요 시작들이 영한 대역으로 실려 있어 그의 시세계를 조감하기에 적당하다.

 

번즈 시의 특징을 몇 가지로 추려보게 된다. 우선 주제 면에서 사랑을 노래하고 있다는 점이다. 시라면 당연히 사랑을 노래하는 게 아닌가하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정형화되고 관념화된 사랑이 아닌 개인적이고 생생하게 살아 숨 쉬는 사랑이 그에게 존재한다. 게다가 동시대의 블레이크와 워즈워스 등을 비교해 보면 그의 사랑이 갖는 의미가 보다 명료해진다. 그에게 블레이크 류의 고고한 이념과 거대담론은 관심 밖이다. 오직 피와 땀이 흐르는 구체적이며 개별적인 생명이 관심사다. 남녀 간의 사랑은 주로 남성의 애원하는 어조를 통해, 때로는 여성 화자의 호소를 통해 독자에게 절절히 다가온다.

 

바다가 모두 다 마를 때까지

바위가 햇빛에 녹을 때까지

내 몸에 목숨이 남아 있는 한

그대를 언제나 사랑하리라 (<오 내 사랑>에서, P.21)

 

또한 그의 시는 자연스레 노래로 연결된다. 두드러지는 반복구의 사용은 시에 리듬감을 부여하고 음악적 연상을 일으킨다. 유명한 <올드 랭 사인>이 대표적인 민요로 인식되지만 다른 작품들도 낭송해 보면 노래로 불리기에 용이한 구성으로 되어 있다. <찬 바람이 그대에게 불어온다면>, <, 문을 열어주세요>, <던컨 그레이> 등의 여러 시가 그러하다.

 

던컨 그레이가 사랑을 구하러 이곳에 왔었네,

하하, 그 구애라니 가관이었지.

모두 취해 흥겨웠던 성탄절 밤이었지.

하하, 그 구애라니 가관이었지.

매기는 콧대를 한껏 높이 쳐들고

곁눈으로 비껴보며 갖은 오만 다 떨면서

불쌍한 던컨을 물러서게 하였지,

하하, 그 구애라니 가관이었지. (<던컨 그레이>에서, P.104)

 

번즈의 시에서 향토색을 제외한다면 앙꼬 없는 찐빵 격이 되리라. 그가 최초에 명성을 얻은 시집이 스코틀랜드 방언을 사용했을 뿐만 아니라 그의 시 곳곳에서 드러나는 스코틀랜드의 지명과 정서 등은 그를 스코틀랜드의 국민시인으로 평가받게 하고 있다. 다만 이 점이 오히려 오늘날에는 그에게 불리하게 작용하고 있는데, 일단 방언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면 시의 묘미를 올바로 감상하기 어렵게 되어 스코틀랜드 이외의 영국인이나 타국인의 경우 접근이 녹녹치 않다. 이른바 영미시가 대중에게 비교적 친숙한 이유는 그래도 원시를 이해하기 쉽다는 장점인데 어휘를 읽기도 난감하고 뜻도 생경하면 아무래도 가까이하기 어렵다. 근년에 들어 번즈가 상대적으로 잊히는 연유도 여기에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번즈는 평민 내지 민중 지향적 시인이다. 그의 시에서 비속어가 심심치 않게 사용되는 것은 방언을 사용하는 당대 민중의 정서를 가감 없이 드러내려는 시인의 의도라 하겠다.

 

앙화가 있을지어다, 잔인한 영주여

당신과 가족을 해한 일이 없는

수 많은 가슴을 아프게 만든

당신은 진정 가혹한 사람이오 (<인베네스의 사랑스러운 아가씨>에서, P.15)

 

비단 이 작품뿐만이 아니다. <경건한 윌리의 기도><윌리가 보리술 한 통 담갔다>의 거리낌 없이 솔직하며 해학적인 윌리의 어조, <귀리 이랑>에서 귀리 이랑에서 여인과 함께 했던 사랑의 추억을 회상하는 화자, 재물을 추구하는 이들이야말로 속된 사람들이라며 아가씨들을 사랑하며 함께 지낸 때가 최고임을 당당히 표현하는 <갈대는 푸르게 자라네>의 화자 등 사회적 지위, 명예와 재화에 무관하고 초연한 민중들의 사고가 짙게 배어있다. 이는 곧바로 해학미를 가져오기도 하는데, 윌리를 다룬 두 편의 시가 대표적이며, <던컨 그레이>와 앞서 읽은 <이에게> 또한 마찬가지다.

 

또 하나의 특색은 여성 화자의 등장이다. 아직 여성이 제목소리를 내기 어려운 18세기 말, 시인은 대부분 남성들이었고 그들의 어조는 남성 또는 남자 어린이가 주류인데 반해 번즈는 이색적으로 몇 편의 시에서 여성의 목소리를 담고 있다. 이는 그가 개인적이고 민중적인 솔직함을 보여주는 증표이기도 하다.

 

오 휘파람을 불어요, 그럼 내가 나올께요;

오 휘파람을 불어요, 그럼 내가 나올께요;

아빠랑 엄마랑 모두 펄펄 뛰어도,

오 휘파람을 불어요, 그럼 내 나올께요. (<휘파람을 불어요>에서, P.27)

 

이제 겨우 영시 몇 편 읽은데 지나지 않지만, 이제껏 읽은 시인들 중에서 로버트 번즈의 작품이 가장 자연스럽고 솔직하게 감정에 와 닿는다. 그는 젠 척하지 않고 형이상학적 난해함으로 독자를 골치 아프게 하지도 않으며, 일상에 무언가 심오한 의미를 부여하려고 애쓰지도 않는다. 이런 그의 시가 좀 더 널리 알려졌으면 좋겠다.

 

다만, 이 책에 한해서라면 산재한 오타와 편집오류, 그리고 명백한 오역 등으로 좋은 점수를 주기 어렵다. 예를 들어 유명한 <올드 랭 사인>의 경우 원시는 여섯 개의 연인데, 역문은 일곱 개의 연으로 번역하였다. 이상해서 보니 원시의 세 번째 연과 네 번째 연을 짜깁기해서 별도의 연으로 추가 번역하였으니 이는 창작이라고 불릴 경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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