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삐삐는 어른이 되기 싫어 ㅣ 시공주니어 문고 2단계 17
아스트리드 린드그렌 지음, 햇살과나무꾼 옮김, 롤프 레티시 그림 / 시공주니어 / 2000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삐삐 시리즈는 오래 지속되기 어려운 태생적 한계를 지닌 작품이다. 무엇보다도 삐삐라는 주인공의 캐릭터가 너무나 개성적이다. 빨간 머리, 주근깨투성이 얼굴, 짝짝이 긴 양말, 기다란 신발로 대표되는 외모는 물론 터무니없는 힘과 대담한 용기를 지닌 인물은 비현실적이다. 모든 동화의 궁극적 목적은 아이들의 사회화에 있다. 건전한 가치관을 지니고 가족, 사회, 국가에 적합한 인격의 형성. 이런 관점에서 보면 삐삐는 완전 낙제점이다. 부모 없이 홀로 사며, 학교에도 가지 않고 매일 같이 놀기만 하며 돈의 가치를 잘 알지 못하면서 펑펑 쓰기도 한다.
삐삐와 같은 비사회적 인물의 독특한 행위와 소위 정상 사회와 충돌하여 일으키는 충격과 불협화음은 당장의 흥미와 통쾌감을 독자에게 안겨줄 수 있으나, 갈등과 놀라움은 곧 식상해지기 마련이다. 이 위기를 벗어나는 방법 중 하나가 배경을 옮기는 것이다. 작가는 스웨덴의 작은 항구 마을에서 남태평양에 있는 삐삐의 아빠가 다스리는 식인종의 섬으로 삐삐와 친구들을 이동시킨다. 이 책의 후반부가 삐삐 일행이 섬으로 가는 여정과 섬에서 즐겁게 노는 장면들, 그리고 악당과의 대결 등으로 구성된 연유도 그렇게 이해된다. 게다가 미지의 낯선 곳으로의 여행, 천국과도 같은 행복한 시간 보내기, 가슴 졸이는 신나는 모험 등은 아이들은 물론이고 어른들도 가슴 설레게 하는 공통의 소재가 아니던가.
삐삐를 통해 작가가 보여주는 것은 어른들의 가식과 위선이다. 그럴듯한 외형을 한 꺼풀 벗겨보면 허위의 가면 속에 숨겨놓은 탐욕과 일그러진 영혼이 소위 어른이란 미명 하에 언행을 통해 아이들의 순수성에 상처를 주고 있다. 이것이 감추고 싶은 사회의 참된 현실이다. 여기에 반발하고 도전하고 거부하면 착하고 귀염 받는 아니가 아닌 나쁜 아이가 되고 만다. 그런 면에서 삐삐는 문제아다.
삐삐와 친구들의 남태평양 행은 현실도피의 성격을 띠고 있다. 사회적 굴레와 규범의 제약을 받지 않고 마냥 지낼 수 있다면 좋겠지만 애석하게도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 그들은 다시 사회로 복귀해야 한다. 토미와 아니카는 삐삐와의 즐거웠던 시절을 한때의 추억으로 삼고 어른이 되기 위한 정상 단계를 차근차근 밟아나가게 될 것이다. 그것은 참으로 재미없고 지루하며 되돌릴 수 없는 행복의 상실을 의미한다.
그들은 어른이 되고 싶지 않다. 그들은 어른이 되지 않게 해주는 약을 먹고 내일을 기약하며 헤어진다. 그러나 삐삐는 알고 있다. 그런 약은 가능하지 않음을. 자신이 토미와 아니카, 아니 독자들의 곁을 떠나야 할 때가 도래했음을. 어른의 세계를 거부하는 다른 문학 작품들의 주인공들처럼 자신이 비현실적 존재임을.
“삐삐는 머리에 손을 얹고 눈앞에 깜빡거리는 촛불의 작은 불꽃을 바라보고 있었다. 마치 꿈을 꾸고 있는 것 같았다......하지만 삐삐는 꿈꾸는 듯한 얼굴로 앞만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었다. 그리고 촛불을 훅 껐다.” (P.180~182)
화려했던 크리스마스 파티가 끝나듯이 즐겁고 행복했던 한바탕 꿈도 이제 끝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