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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의 숲을 거닐다 - 장영희 문학 에세이
장영희 지음 / 샘터사 / 2005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세계 고전 명작을 집중적으로 읽고 싶을 때 작가와 작품의 선택이 난감할 때가 많다. 손쉬운 방법으로 출판사별로 경쟁적으로 나오고 있는 세계문학전집을 무작정 읽어도 나쁘지 않다. 대개 열에 여섯, 일곱 정도는 검증된 작가와 작품 위주로 선정되고 나머지는 출판사별로 독자적인 기준으로 작품 선정을 하는 듯하다. 작가와 작품에 대해 일정 지식을 갖춘 상태라면 비판적 안목으로 접근할 수 있는 반면 초심자의 경우 편향될 우려도 있다. 또 하나 가이드북을 이용하는 방법이다. 개인적으로 <평생 독서 계획>과 <세계문학사 작은사전>을 참조하고 있다. 이런 책들의 장점이야 다 아는 사실이고 단점을 언급하자면 지침서, 실용서에 가까운 성격이라 그 자체의 재미는 별로 없다는 점이다.
문학가이드 성격을 지니면서도 자체로서도 흥미롭게 읽을 수 있어 초심자의 길잡이 구실을 할 수 있는 책, 이것이 바로 이 책을 기획한 의도라고 하겠다. 이런 유형의 책은 한둘이 아니다. 그 점에서 지은이가 장영희 선생이라는 것은 큰 장점이다. 그의 글을 읽는 이를 자연스레 문장에 몰입하게 만든다. 기발하고 세련되며 아름답기 그지없는 어휘와 문체를 구사하지 않는다. 언제나 소박하고 겸손하며 마음씨 좋은 고모 또는 이모가 곁에 앉아서 조근조근한 어투로 구수한 이야기를 들려주는 듯하다. 앉은 자리에서 한꺼번에 수십 쪽을 넘겨 읽어도 좋고 한두 장씩 천천히 읽어나가도 좋다.
언급된 작가와 작품들 중 상당수는 이미 읽어본 사례들이다. 예이츠, 위대한 개츠비, 카라마조프의 형제들, 돈키호테, 월든, 이방인 등등. 어렸을 때 청소년용으로만 읽거나 이름만 들어본 작품도 제법 있다. 주홍글씨, 세일즈맨의 죽음, 사일러스 마아너, 백경, 레미제라블, 음향과 분노, 허클베리 핀의 모험 등. 반면 이번에 처음 들어본 작가들도 존재한다. 영미시 시인들의 다수가 그러하며, 헨리 제임스, 손톤 와일더, 와인즈버그 오하이오 등이 그러하다.
아는 작가와 작품들을 장영희 선생이 자신의 개인적 일화와 감상 등을 섞어 차근차근 풀어나가는 솜씨에 빠져 새삼스레 반추해 보는 것도 재밌는 경험이다. 신문 칼럼용이라 분량, 독자층의 제한을 염두에 두는 만큼 심오하고 상세한 분석과 감상을 풀어놓는 것은 불가능하지만 읽은 독자는 추억을 되살리고 안 읽은 독자에게는 소개된 작가와 작품을 한 번 읽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도록 깔끔하게 글을 맺고 있다.
에세이 류의 글이 지나치게 딱딱하면 안 되므로 글을 부드럽게 만들기 위해 아무래도 지은이의 개인사가 많이 언급되어 있다. 대학교수로서 수업 관련한 일화 등도 솔깃하며 쏠쏠한 즐거움을 안겨주지만, 무엇보다도 심금을 울리는 것은 지은이의 신체적 장애와 관련된 내용들이다. 지은이 스스로 밝히고 있듯이 목발을 짚고 다녀야 하는 불편을 감내해야 하는 일상이다. 동정은 당연히 사양하겠지만 배려를 신경 쓰기는커녕 장애를 비웃고 손가락질하며 편견을 품고 박대하는 일화는 씁쓸함을 자아내며, 우리네들의 자화상이 여전히 아름답지 않음을 인식하게 한다.
여우가 어린 왕자에게 말하는 길들임은 서로 간에 의미 있는 존재가 되어야 함을 가리킨다. 그것이 마음의 진실한 교류를 통해 가능하다고 할 때, 장애를 장애 그 자체로 이해하는 노력이 필요할 것이다. 그것은 덧붙임 없이 사랑만을 위해 사랑해달라는 시인의 간절한 기원과도 상통한다. 브라우닝 부부의 러브스토리가 더없이 아름답고 가슴속을 저며 오는 연유이기도 하다. 모든 사랑이 브라우닝 부부와 같이 예쁜 결과를 가져오지는 못한다. 에밀리 디킨슨은 사랑은 “하나의 완전한 고통”이며, 아픈 경험이라고 토로한다. 지은이는 문학의 주제를 이렇게 말한다.
문학의 주제를 한마디로 축약한다면 ‘어떻게 사랑하며 사는가’에 귀착한다. 동서고금의 모든 작가들은 결국 이 한 가지 주제를 전하기 위해 글을 썼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P.66)
나중에 이 책에서 소개된 작품들을 읽을 때 지은이가 언급한 사랑과 삶의 시각에서 문학을 이해해보고 싶다. <세일즈맨의 죽음>에서 내세울 것 없는 소시민 아버지의 고독과 슬픔을 이해하고 싶다. 사회와 가족의 냉대에서 갈 곳 없이 방황하는 어깨 움츠린 아버지들은 남의 이야기가 아니리라. <위대한 개츠비>의 ‘위대한’은 여전히 불가해하여 다시 한 번 읽을 계획이지만 순수한 꿈과 희망이라는 설명에 이해의 단서를 찾는다. <안네의 일기>를 통해 지은이는 정의로운 전쟁은 없다고 단언한다. 명분과 이해관계를 위해서 일반론으로 접근하기 쉽지만 당사자가 본인 또는 가족이라고 생각하면 목숨을 바치라고 함부로 말하지 못한다. 내게 이름만 유명한 <황무지>가 쉬운 시가 아니라 현대문명에 대한 비판적 인식이라는 점이 오히려 호기심을 당긴다.
남보다 앞서고 뛰어나게 보여야 인정받고 대우받는 세상이다. 평범함은 죄악시되기 일쑤다. 우습다. 제아무리 그래봤자 인류의 대부분은 평범하기 그지없는 보통 사람들인데 말이다. 우리들은 자신의 정체성을 부인하는 거짓된 삶을 사는 셈이다. 실버스타인의 동화는 너무 확연한 주제에도 잊혀버린 진실을 깨우치는 힘이 있다.
인간의 가장 크고 중요한 덕목이 사랑이라고 할진대 사랑할 줄 모르는 마음이 가장 큰 결함이다. 신체적 결함만 장애는 아니다. 사지육신 멀쩡한데 마음과 영혼의 고갱이가 빠져있는 것보다 더 큰 장애는 없다. 그래서 지은이는 의연하다.
까짓, 동전 구하는 거지로 오인되고 예쁜 잠옷을 안 입으면 어떠랴. 온 세상이 풍비박산 나는 듯 왁자지껄 시끄러운데, 나는 이 아름다운 봄날 가던 길 멈춰 서서 나뭇가지에 돋는 새순을 한 번 만져 보고 하늘 한 번 올려다 볼 수 있는 여유가 있으니 이 얼마나 큰 축복인가. (P.202)
마지막 장에서 지은이는 충격적인 고백을 한다. 수년 전 가볍게 완치된 줄 알았던 암이 척추암으로 전이되었음을. 입원과 수술을 위해 학교도 칼럼도 더 이상 지속해 나갈 수 없음을 알린다. 담담한 듯 서술하지만 그 심경이 얼마나 참담할지는 겪어보지 않으면 절대로 공감할 수 없으리라. 수십 년을 괴롭힌 신체적 장애가 이제는 또 다른 극한을 요구하는 있으니 하늘을 쳐다보고 방성통곡을 하지 않으면 이상할 지경이다. 여기서 지은이는 생명의 원초적 귀중함을 생각한다. 어려움을 극복하고 그의 앞으로의 삶이 해피엔딩으로 이어지기를 기대하지만 우리는 나중의 일을 알고 있다. 그래서인지 아래의 글이 더욱 아프게 다가온다.
모든 삶의 과정은 영원하지 않다. 견딜 수 없는 슬픔, 고통, 기쁨, 영광과 오욕의 순간도 어차피 지나가게 마련이다. 모든 것이 회생하는 봄에 새삼 생명을 생각해 본다. 생명이 있는 한 이 고달픈 질곡의 삶 속에도 희망은 있다. (P.26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