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사랑과, 사랑을 둘러싼 것들 - 그해, 내게 머문 순간들의 크로키, 개정판
한강 지음 / 열림원 / 2009년 12월
평점 :
절판
신진 작가 한강은 1998년에 아이오와 대학 주최의 국제창작 프로그램에 참가하기 위하여 수개월 간 미국에 머물렀다. 작가는 어떤 계기로 무슨 목적을 갖고 출국했는지 명확하게 밝히지 않는다. 뭔가에 쫓기듯 부랴부랴 떠난 듯한 인상으로 나는 작가가 창작과정에서 좌절을 겪었다든지 또는 창작욕의 고갈을 느꼈다든지 추측하였지만, 후의 내용으로 봐서는 섣부른 지레짐작이었다.
이 책은 사람과의 만남 글이다. 작가의 말 그대로 미국에서 마주친 사람들에 대한 스케치 혹은 크로키에 해당한다. 간결하고 소략한 글 속에서 전 세계 각국에서 온 작가들, 그네들의 일상 속에 감춰든 개성, 고통, 사랑, 삶 등이 작가의 시선과 마음을 통해 오롯이 드러난다. 소설을 쓰건, 시를 쓰건 작가이건 아니건 누구나 인간이기에 겪을 수밖에 없는 애환을 한둘 지니고 있다.
인디언인 살리달에게서는 진행형인 인디언 차별이 생생하게 떠오른다. 보통의 삶을 박탈당한 그녀는 자의반 타의반 스스로를 추방하여 유목의 삶을 선택한다. 그녀의 가슴 깊숙한 곳에 자리한 감정을 누가 섣불리 공감할 수 있겠는가.
작가가 아이오와에서 만났던 이들 중에서 마흐무드와 페이민이 유달리 언급됨을 알 수 있다. 아시아권이라는 지리적 공감대 탓일까. 팔레스타인의 유혈 역사와 불안한 정세, 미얀마의 군부독재 정권에 의해 투옥될지 모르는 불안 등이 작가는 물론 독자에게도 고스란히 전해온다. 그럼에도 우리는 받아들여야 한다. 마흐무드의 말처럼 그것이 인생이므로.
때로는 고통스럽고 때로는 받아들이기 힘든 것, 때로는 말로 할 수 없이 아름다운 것, 바로 그것들이 모두 인생이라는 듯이...... (P.74)
그럼에도 마흐무드는 사랑을 포기하지 않는다. 그에 따르면 사랑이 아니면 인생은 아무것도 아니다. 때로는 사랑 자체가 고통스러울 수도 있다는 작가의 의견에 숙연히 부정한다. 사랑이 아니라, 사랑을 둘러싼 것들이 고통스럽다며. 이별, 배신, 질투 같은 것들.
글쎄, 사랑을 둘러싼 것들도 사랑에 필수적으로 수반되는 본질이라고 봐야 하지 않을까. 사랑이 순전한 기쁨과 행복만을 뜻하지는 않으리라. 왠지 모를 한숨, 슬픔, 가슴 아픔 등이 없다면 사랑은 일면적이고 획일적으로 치우쳤을 것이다. 사랑하기에 질투의 감정이 발생하며, 이별의 쓰라림을 감내할 수 있을 것이다. 재회의 순간을 기다리면서. 이 모든 게 바로 사랑이다.
페이민이 위험을 감수하면서 고국으로 돌아가고자 결심한 동기 역시 같다. 자신의 뿌리이자 문화이고 언어가 있을 수 있는 자리가 그 땅이므로. 사랑이 있는 곳을 떠나서 그가 어떻게 살 수 있겠는가.
작가의 친구 미란의 결혼 스토리는 책을 더욱 아름답게 꾸미는데 일조한다. 장애와 장애인에 대한 편견은 오랜 연원을 지니기에 거의 본능에 가깝다. 마침 이 책 다음에 고 장영희 교수의 수필집을 읽고 있어서 그런지 새삼 반성하게 된다. 이런 편견에도 굴하지 않고 사랑을 쟁취해 나가는 그네들의 용기와 사랑이 대단하게 느껴진다.
시간은 흘러가고 우리는 일상에 부대낀다. 간신히 정신을 차릴 짬을 내지만 그저 멍하니 시간을 흘려보낼 따름이다. 그저 남들처럼 물 흐르듯이 살아갈 뿐 대단한 존재도 아닌 나 따위가 끙끙대봤자 하며 방기하는 때도 있다. 그럼에도 무역회사에서 일하며 늦은 밤에만 글을 쓸 수 있는 하이도 포기하지 않는다. 제아무리 피곤해도 그 시간은 결코 돌아오지 않는 소중한 순간이므로. 글쓰기뿐만 아니라 삶도 마찬가지다, 파비앙의 성당 이야기처럼. 나처럼 미미한 존재의 그나마 미미한 행위의 무의미성에 대해서. 우리는 끝을 알 수 없다. 결과를 보지 못한다. 우리는 단지 현재의 자신에 충실할 뿐이다.
우리들의 존재는 이 광활한 우주 속에서 하나의 먼지 같은 것이지만, 그 먼지 하나하나가 최선의 선의를 품고 존재하는 데에 그 미세한 에너지들의 힘이 있는 것 아닐까. 그렇게 해서, 그 보이지도 않을 만큼 조그만 개개의 존재들 속에 고요히 우주가 깃드는 것 아닐까. (P.36)
프로그램을 마친 후 참가자들은 저마다의 곳으로 돌아갔다. 이제 꿈에서 현실 세계로 돌아가야 한다. 비록 가끔씩 이메일을 주고받겠지만 그들은 모두 알고 있다. 서로 간에 앞으로 만날 가능성이 거의 없으리라는 사실을. 그걸 알면서도 그들은 아낌없이 서로의 마음을 주고받았다. 그리고 작가의 마음은 영원히 한없이 풍요로울 것임을 우리는 안다. 그가 아이오와에서 얻은 것은 값을 헤아릴 수 없을 만큼 소중한 것이었기에.
정말 귀중한 것은 값나가고 어려운 것들이 아니라, 숨쉬는 공기와도 같았던 것들, 가장 단순하고 값나가지 않는 것들, 평화, 우정, 따뜻함 같은 것들이었나 보았다. (P.226)
이 글의 진면모는 미국 체류를 전후하여 타국에서 만난 사람들, 그리고 그들의 삶과 내면, 일화 등을 통해 서른 즈음 작가에게 길게 드리워진 반향일 것이다. 어쩌면 작가의 청춘 시절과 (작가를 떠난) 수수한 일상에 대한 크로키라고 볼 수도 있다.
2003년에 초판으로 낸 책을 2009년에 개정판으로 새롭게 다듬었다. 장정, 지질, 편집이 내용과 어울려 정갈하면서도 예쁜 느낌을 자아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