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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서 고든 핌의 모험 ㅣ 환상문학전집 3
에드거 앨런 포 지음, 김성곤 옮김 / 황금가지 / 2002년 7월
평점 :
품절
아문센과 스코트 대령에 의한 1911년 남극점 도달로 정점에 달한 남극대륙 탐험을 소재로 에드거 앨런 포가 모험소설을 발표한 것은 그보다 훨씬 이른 1838년이다. 쥘 베른도 아닌 에드거 앨런 포라니 놀랍기 이를 데 없다. 시는 물론이고 탐정소설, 환상문학에서도 선구자적인 역할을 했던 그가 모험문학 장르에서도 명작을 만들어냈다.
이 작품에서는 후대의 스티븐슨과 베른에서 찾아볼 수 있는 해양모험 소설의 요소가 모두 들어있다. 대양 항해, 폭풍우, 선상 반란 등. 어디 그뿐인가? 포의 전매특허인 공포와 괴기적 요소도 빠뜨릴 수 없다. 방랑하는 네덜란드인을 연상케 하는 유령선과의 마주침. 이것만으로도 부족하다고 생각했는지 작가는 후반부에서 남극대륙 탐험이라는 유례없는 대도전을 감행한다. 사실과 가상이 교묘히 뒤섞여 있어 흥미와 긴박감을 안겨주는 탐험일지. 미지의 땅에서 만나는 낯선 원주민들. 그는 선배인 디포도 잊지 않았다. 이어 종결부는 너무나도 아스라한 환상 자체를 보여준다.
약 이백년 가까이 경과한 옛 모험소설에 진부함을 느끼지 않고 오히려 깊이 매료된 것은 전적으로 작가의 뛰어난 글쓰기 덕택일 것이다. 한 치의 방심도 허락하지 않는 잇따른 사건의 연속과 긴장감 넘치는 팽팽한 구성, 고어적 폭력과 유혈을 상세히 묘사하여 끔찍한 처절감을 안겨주는 과감성. 언제 어떻게 쌓았는지 모르지만 해양 항해와 지리에 관한 풍부한 지식이 주는 사실감. 남극해 주변의 섬들의 방문과 위도와 경도의 제시 등이 창작인지 실제인지 궁금해서 구글 지도를 통해 자세히 살펴보았는데 사실에 근거한 자료임을 확인할 수 있었다. 작가의 순전한 상상력이 창조한 세계는 한계위도 이하에서부터이다.
그러자 탈출할 수 있으리라는 생각은 내 마음속에서 마치 그림자처럼 희미해졌다. 다음 순간 나는 떨어지고 싶은 강렬한 유혹에 빠졌다. 그것은 도저히 억제할 수 없는 욕망, 열망, 그리고 정열이었다. (P.219)
포라는 작가의 특색은 여일하다. 일상에 대한 비일상, 밝음에 대한 어둠, 평온 대신 불안, 인간의 어두운 내면에 대한 천착, 현실을 넘는 환상과 괴기스러움, 죽음을 향한 무의식적 본능. 이런 속성들이 유명한 단편들뿐만 아니라 이 장편에서도 명확히 드러난다. 그가 아니라면 감히 시체의 살을 뜯어먹는 거대한 갈매기의 피범벅된 부리와 완전히 썩어빠진 시체의 처참한 모습을 몸서리치게 묘사할 수 있겠는가. 그가 노리는 효과는 분명 공포이다.
<로빈슨 크루소> 이후 <산호섬> 등에서 인육을 먹는 식인종은 단골로 등장한다. 실제 사실의 반영인 동시에 독자들의 관심과 두려움을 자아내는 데 적절한 소재이며, 야만인에 대한 종교적, 문화적 우월성을 드러내는 효과도 지닌다. 그 점에서 포는 한걸음 더 나아간다. 극한상황에 도달했을 때 다수의 생명을 연장하기 위하여 소수의 생명과 육체를 희생하는 대목, 즉 문명인이 인육을 먹는 장면을 천연덕스럽게 툭 던져놓고 있다. 작가는 냉정하다. 화자인 아서 고든 핌과 동료 선원인 덕 피터스를 제외하고 그램퍼스 호배에 탔던 모든 이가 죽음을 맞이한다. 여기에는 선인도 악인도 구별을 두지 않는다. 이것은 그들을 구조하고 후에 남극 탐험에 나선 제인 호도 마찬가지의 운명에 처한다.
만년설과 빙산만이 가득한 남극해를 돌파하여 중심부로 깊숙이 들어갔더니 기후가 온화하며 기이한 자연현상을 보이는 낯선 섬에 도착하였다는 설정은 현대의 우리 눈으로는 코웃음만 나올 뿐이다. 하지만 우리가 아닌 당대의 독자들과 그들이 지닌 과학과 상식의 수준에서 볼 때 무리한 설정은 아닐 것이다. 게다가 포는 풀리지 않는 괴이한 복선을 반복하여 드리우고 있지 않은가. 모든 것이 어두운 검정색의 세계에 사는 원주민들은 흰색에 대해 병적인 공포심을 품는다. ‘테켈리 리’라는 단어 속에 내재된 미지의 신비한 공포는 극점 가까이 도달한 핌 일행이 마주친 하얀 가루의 소나기를 뿜어내는 하늘에서 바다로 이어지는 거대한 폭포에서 정점에 달한다. 마지막 장면은 두려움 보다는 신비함의 극치일 것이다.
3월 22일. 부쩍 어두워졌지만, 우리 앞의 하얀 휘장이 쏟아놓는 파도의 빛 때문에 그나마 좀 환했다. 거대하고 창백한 수많은 새들이 하얀 베일 너머로 끊임없이 날고 시야에서 사라져가면서 끝없이 <테켈리 리!>라고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그 소리에 누누가 보트 바닥에서 몸을 움직였으나, 만져보니 그는 이미 죽어 있었다. 이제 우리는 우리를 받아들이려고 활짝 벌리고 있는 폭포의 포옹 속으로 빨려들어 갔다. 그러나 우리의 길목에 갑자기 그 어떤 인간보다도 더 큰, 수의를 입은 사람의 형상이 물 속에서 솟아오르고 있었다. 그의 피부는 마치 눈처럼 완벽하게 흰색이었다. (P.230)
작가는 이 대목에서 핌의 수기를 중단시킨다, 매우 현명하게도. 더 이상의 진전은 자신에게도 부담스럽겠지만 한편 독자의 흥미와 상상력을 최고조로 끌어올린 시점에서 끝내는 극적 효과도 노리지 않았을까. 독자는 못다 한 결말에 대해 발을 동동 구를 뿐이다.
부록으로 수록된 단편 <빙원의 스핑크스>는 1897년에 쥘 베른이 미완결된 결말에 대한 나름대로 구상한 덧붙이기다. 역량 있는 작가이므로 제법 흥미롭고 그럴듯한 끝맺음을 보여주지만 포의 과감하고 치밀한 작품 성격과 스타일과는 판이함을 나타낸다. 자신만의 전개를 위해서 원작의 내용과 합치되지 않는 면도 존재하고 무엇보다 포가 그렇게 강조한 흰색에 대한 고려가 전적으로 배제되어 있어 단절된 인상을 준다. 무엇보다 주인공인 고든 핌이 그렇게 허무한 최후를 맞이하는 것은 산전수전 온갖 역경을 헤치고 살아남은 그에게 합당한 죽음으로서 인정할 수 없다는 독자로서의 내면의 반발심을 억누르기 어렵다. 분량 면에서도 그렇고 쥘 베른이라면 더 좋은 성과를 기대해도 좋았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역자의 해설은 인간 심리와 꿈과 무의식, 흑백의 대립과 인종 갈등까지 폭넓고 심층적으로 작품 분석을 하고 있어 포의 이 소설이 단순한 모험문학이 아님을 알려준다. “자아 발견과 탐색의 여행”(P.284)라는 분석에는 일부분 동감하지만, 지나치게 확대 해석하고 의미부여를 하는 건 아닐까 의구심이 들기도 한다.
단편소설과 몇몇 시 작품을 통해 문학계에 불후의 명성을 남긴 에드거 앨런 포. 이 작품은 상대적으로 무시되어 왔는데 잔인하고 어두운 작품 분위기와 모호함과 당혹감을 안겨주는 결말 부분 등 대중적 모험소설로서는 적합하지 않은 것으로 본 듯하다. 역으로 이런 점들이 그의 이 소설에만 존재하는 특색이자 장점으로 평가받아야 하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