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년이 온다 - 2024 노벨문학상 수상작가
한강 지음 / 창비 / 201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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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 민주화 운동은 분명히 나와 동시대에 벌어진 사건이지만 낯설고도 먼 존재다. 광주 폭동, 광주 사태, 광주 민중 항쟁, 광주 민주화 운동 등 시간이 흐름에 따라 점차 달라지는 호칭을 통해 알 수 있듯이 이 사건을 바라보는 인식에도 커다란 변화가 있었다. 이 사건이 발생하였을 때 나는 작가만큼이나 어렸고 서울에 있었다. 신문이나 방송을 통해서는 정권의 일방적인 정보만 쏟아졌다. 그 후로도 한동안 암암리에 떠도는 풍문을 통해 뭔가가 있었음을 짐작할 뿐 성인이 되어서야 비로소 제대로 된 정보를 접할 수 있게 되었다.

 

광주 출신인 작가에게 이 사건의 의미와 파장을 남다를 것이다. 자신이 살던 지역과 사람들, 폭력과 유혈이 낭자한 처참한 현실. 멀리서 바라만 볼 수밖에 없던 자신에 대한 근거 없는 자괴감 등. 삼십여 년의 세월이 흘렀고, 이른바 명예회복도 되었지만 그네들이 겪었을 공포와 고통, 살아남은 자들의 신체적, 정신적 외상은 쉽사리 지워지지 못한다. 게다가 그들의 가해자는 엄연히 활개를 치며 세상을 활보하고 있는 판국이니.

 

나는 싸우고 있습니다. 날마다 혼자서 싸웁니다. 살아남았다는, 아직도 살아 있다는 치욕과 싸웁니다. 내가 인간이라는 사실과 싸웁니다.....선생은, 나와 같은 인간인 선생은 어떤 대답을 나에게 해줄 수 있습니까? (P.135)

 

작가는 1980년 광주에서 벌어진 상황을 살아있는 시각에서 재현하기 위하여 고심한다. 다큐나 역사소설이 아니므로 사건 전개의 상세하고 구체적 사실을 일일이 열거하지 않되, 당시의 참혹한 정경과 분위기를 잃어서는 안 된다. 작가는 특별히 시점, 인물과 시간의 구성을 통해 새롭게 당대를 조명한다. 작가는 특이하게도 이인칭 시점을 사용한다. 1인칭의 고백체는 사태를 협소한 시각에서 주관적으로만 전달하게 되어 보편적 공감을 얻지 못할 수 있다. 3인칭은 객관적의 장점이 자칫 사태와 거리감을 두어 감정적 공유를 자아내기 어려울 수 있다.

 

작품 전개를 특정 인물에만 의존하게 되면 사태의 광범하고 다채로운 층위를 제대로 반영하지 못하게 될까 봐 작가는 여러 명의 인물을 등장시켜 그들의 행동과 발언을 교차하여 제시한다. 작가가 특히 신경 쓴 부분은 사건 당시 주요 인물의 연령대가 중학생, 고등학생, 대학생 들이라는 점이다. 군부 세력의 날조된 유언처럼 그들을 빨갱이, 폭력배, 국가전복 세력으로 매도하기에는 그네들의 아직 어리거나 젊고 순수하다. 오히려 그들에게 최소한의 인간적 연민조차 보여주지 않고 냉혹하기 이를 데 없는 폭력 행위를 자행한 세력과 주어진 총마저 쏠 줄 모르는 그네들과 선명한 대조를 이룬다.

 

광주의 사건을 발생 몇 일 또는 몇 달이라는 단기간으로 파악하면 올바른 진상 이해를 할 수 없게 된다. 광주는 누적되고 억압된 갈등이 일시에 폭발한 현장이다. 뿌리는 신군부의 등장과 군인 대통령의 서거를 거슬러 올라가 군부 독재의 모순을 지나서 종내에는 4·19의거와 이승만 독재, 친일세력의 제거 실패라는 건국 초기의 실패에까지 이른다. 광주의 여파는 누구나 알 듯이 오늘날에도 여전히 딱지 진 상처를 드러내고 있다. 작가는 선주를 청계피복노조와 관련시킴으로써 과거와의 연계를 분명히 하며, 19805월 이후 삼십여 년의 세월 동안 참가자와 그 가족들이 겪은 고통과 현재까지 이어지는 상처를 섣불리 치료하지 않는다. 은숙, 선주, 진수와 이름이 밝히지 않은 진수보다 연상의 남성, 그리고 마지막으로 죽은 동호의 엄마...

 

인간은 무엇인가. 인간이 무엇이지 않기 위해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그녀는 인간을 믿지 않았다. (P.95)

 

이 작품을 통해 작가가 반복하여 던지는 중심적인 화두는 인간의 본성에 대한 근원적 의구심이다. 인간이 차마 어찌 이리 잔인할 수 있는가-

 

대다수의 평범한 시민들인 우리는 인간 본성의 순수성과 선함을 믿거나 믿으려고 애쓴다. 자고로 순자의 성악설과 고자의 성무선악설에 비해서 맹자의 선악설이 선호되는 연유도 인간 본성에 대한 세인들의 기대를 반영한 것이리라. 이런 기대가 헛되었음을 드러내는 현상들이 평시(사이코패스를 보라!)는 물론 전시사변이나 비상사태가 발발하면 너무나 자연스럽게 대두됨을 우리는 보게 된다. 군인과 일반인, 남녀와 노소 구분 없이 무차별적으로 잔인한 가혹행위와 대량학살 등. 그들은 별종의 전혀 다른 사람들이 아니다. 누군가의 선량한 아들이고 오빠이며 형이며 동생이자 애정에 넘치는 남편이며, 우정 깊은 친구이다. 방아쇠를 당긴 손으로 뺨을 후려친 손으로 자녀의 머리를 쓰다듬고 아내와 연인의 뺨을 어루만진다.

 

힘겨운 광주의 5월을 보낸 그네들도 평범함이라는 면에서는 마찬가지다. 그네들이 처음부터 작심하고 도청에 집결하고 농성을 하는 영웅적인 민주화 투사들이 아님은 작중 인물들의 면면을 통해 충분히 알 수 있다. 혼란스러운 상황 속에서 회피하지 않고 스스로가 옳다고 생각하는 마음의 행로를 좇다 보니 역사 속의 인물이 되고 말았다. 그로 인해 처절하고 고통스러운 죽음을 맞이한 사람들도 있으며, 죽지 못해 치욕적인 삶을 저주하고 감내하며 지금도 여전히 버티는 이들도 분명 있다. 죽은 자와 산 자 모두 아픔을 반복하고 싶은 마음은 추호도 없으리라. 하지만 만약에 다시 유사한 상황이 전개되어 선택의 기로에 섰을 때 많은 이들이 동일한 행보를 하지 않을까. 그것은 인간에 대한 한 가닥 신뢰가 여전히 마음속에 잔존해 있는 탓이다.

 

스스로가 용감하지도, 강하지도 않다는 것을 당신은 알고 있다......

하지만 동시에 당신은 안다. 그해 봄과 같은 순간이 다시 닥쳐온다면 비슷한 선택을 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것을. (P.175)

 

일각에서는 광주 이야기라면 넌더리를 내는 경우도 보았다. 다 지난 과거지사인데, 그걸 자꾸 파헤쳐서 무엇을 하겠냐고, 그걸 정치적 목적으로 이용하려는 게 아니냐며. 작가는 이렇게 말한다.

 

생각하고 또 생각했습니다.

이해하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어떻게든 내가 겪은 일들을 이해해야 했기 때문입니다. (P.120)

 

그렇다, 이해하기 위해서다. 어떻게든 당시에 벌어졌던 일들을, 그네들이 겪었던 일들을, 어쩌면 우리들이 겪었을 수도 있는 일들을 이해하고 싶기 때문이다. 일어나서는 안 될 일이 일어났다. 영문도 모른 채 지나갔으니 위안 삼고 손 놓고 있을 수는 없지 않겠는가. 2의 광주가 생길 가능성을 예방하고 그럴 경우 대비하기 위해서라도 이해를 해야 하지 않겠는가.

 

광주는 고립된 것, 힘으로 짓밟힌 것, 훼손된 것, 훼손되지 말았어야 했던 것의 다른 이름이었다. 피폭이 아직 끝나지 않았다. 광주가 수없이 되태어나 살해되었다. 덧나고 폭발하며 피투성이로 재건되었다. (P.207)

 

작가 한강은 <희랍어 시간>에서부터 묘사와 서술을 줄이고 시어의 비중을 높이고 있다. 원체부터 문장 자체가 정제되고 시적인 뉘앙스를 풍기던 그였지만, 정갈하다 못해 투명하게까지 느껴지는 문체는 이른바 시설(詩說)을 연상시킨다. 이 소설에서도 작가 특유의 성향은 여일하다. 더구나 이인칭 시점의 화자는 인물의 내면으로 다가서다가도 어느덧 훌쩍 몇 발짝 떨어져 주변을 둘러보는 등 대상과 인물의 이동이 자유로우면서도 나직하고 침잠하는 어조로 자칫 격동에 빠지기 쉬운 제재에 균형추의 역할을 하고 있다.

 

작가가 특별히 에필로그를 덧붙인 까닭은 작품을 벗어나 소설 속에서 말하지 못한 부분을 밝히고 싶어서이리라. 그것은 광주와 작가의 개인적 인연을, 그 사건의 현재적 연속성과 유효성을 확인시켜준다. 작가는 섣부른 동정도, 긍정도 드러내지 않는다. 그저 묵묵히 들여다보고 있을 뿐이다.

 

기도하지 않았다. 눈을 감고 묵념하지도 않았다......반투명한 날개처럼 파닥이는 불꽃의 가장자리를 나는 묵묵히 들여다보고 있었다. (P.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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