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록작품>

1. 왕표는 어떻게 구원되었나

2. 마르코의 미소

3. 죽음의 젖

4. 겐지 왕자의 마지막 사랑

5. 네레이데스를 사랑한 남자

6. 제비들의 노트르담

7. 과부 아프로디시아

8. 목잘린 칼리

9. 마르코 크랄리에비치의 최후

10. 코르넬리우스 베르그의 슬픔

 

이 작가의 이름을 최초로 알게 된 것은 창비세계문학 중 프랑스 편에 수록된 <어떻게 왕부는 구원받았는가>를 읽으면서부터다. 물론 <하드리아누스 황제의 회상록>이라는 작품이 민음사 세계문학전집으로 나왔다는 사실 정도는 알고 있었지만. 묘한 분위기의 이 단편을 읽고 수록된 작품집이 일찍이 번역 출간된 적이 있었지만 절판된 지 오래되었다는 점을 알게 되었고 중고서점을 수소문해서 겨우 구하게 된 나름 사연이 깃든 책이다.

 

유르스나르가 밝히는 동양은 스펙트럼이 광범위하다. 지역적 개념과 아울러 문화적 의미도 포함된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 지역적으로는 발칸반도 이동에서 인도를 거쳐 일본까지를 포괄하며, 문화적으로는 비 정통기독교 문명지역을 가리킨다. 정교와 힌두교, 불교와 같은. 구체적으로 보면 <왕표는 어떻게 구원되었나>는 중국, <겐지 왕자의 마지막 사랑>은 일본, 그리고 <목잘린 칼리>는 인도를 배경으로 한다. 나머지 작품들은 그리스와 발칸 지역의 전설과 민담들을 연원으로 삼는다. 마지막의 <코르넬리우스 베르그의 슬픔>만은 암스테르담이 배경이지만 기본 정서는 여타 단편들과 유사하다.

 

동방을 다룬 이야기들을 통해 작가는 우리에게 무슨 말을 하고 싶었던 것일까? 그리고 우리는 그와 작품들을 통해서 무엇을 깨달을 수 있을까?

 

먼저 이국적 정서다. 서구 주류문화에서 볼 때 지리적으로 멀리 떨어져 있고 문화적으로도 상이한 타국의 낯선 인물과 문물을 소재로 다루었으니 생경함이 주는 이국적 흥미를 무시할 수 없을 것이다. 이국적 요소는 신비함 내지 기이함과도 결부된다. 비일상적이고 비상식적인 사물과 현상들을 대할 때 우리들 가슴 속에는 낮선 두려움이 뭉실거린다. 두려움과 호기심은 신비함의 필수 구성요소다.

 

이 작가는 순전한 창작보다는 역사적 제재를 도구로 글쓰기를 행한다. 대표작은 물론 이 작품집에 실린 이야기들도 전설, 민담과 민요 등에서 영감을 얻었다고 자술하고 있듯이. 역사 이야기는 사실(史實)과 허구를 교묘하게 섞어서 독자들이 허구마저 사실인 마냥 받아들이게 할 수 있는 장점이 있다. 작가는 엄선한 사실을 통해, 그리고 스스로가 꾸며놓은 허구를 갖고 자신의 메시지에 역사의 권위를 더할 수 있다.

 

한편의 책으로 섣부른 판단은 곤란하지만, 유르스나르는 반전의 기교와 아이러니, 조소(차라리 암소(暗笑)라고 해도 좋을)적 태도를 선호하는 듯 보인다.

 

마르코를 주인공으로 한 두 단편의 경우 전자에서 이교도들의 온갖 수단에도 완벽하게 시체처럼 위장하여 탈출에 성공한 마르코가 후자에서는 작은 노인과의 충돌로 어이없는 죽음을 맞이한다. 역사적 에피소드인 동시에 삶과 죽음에 관한 우의적 이야기다. 겐지 왕자를 다룬 이야기에서는 花散里 여인의 울부짖음은 그녀의 헌신의 무게만큼이나 묵직한 울림을 전해주며, 네레이데스를 사랑한 남자가 대가로 이성을 상실했음에도 사람들은 오히려 그를 부러워한다. 과부 아프로디시아의 사랑의 죽음은 숭고함보다는 희극적으로 다가온다.

 

이 작품집이 발표된 해는 1938. 당시 유럽 정세는 제2차 세계대전 발발을 목전에 두고 어수선하기 이를 데 없었다. 양차 세계대전 사이 서구문명의 종말과 반성을 요구하는 여러 사상과 저작들이 지속적으로 제기되었다. 이 작품집도 서구문명의 반성이라는 관점에서 바라볼 수 있다. 올바른 자신의 이해는 타인의 시각에서 더 객관적이고 정확할 수 있음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그림에 비교할 때 추악한 현실을 인식한 황제의 추상같은 질책. 현실을 초월하여 물아일체가 되어버린 왕표의 사라짐. 예술의 절대성과 현실과의 관계에 대한 작가의 고민과 모색이 깃들여있다. 님프들을 사악한 존재로 여겨서 절멸시키려고 하는 수도사와 동정과 자비의 마음을 일깨우는 마리아, 순수한 인드라의 여신인 칼리가 추악한 창녀의 몸뚱이를 빌어 환생하여 영과 육의 갈등으로 고뇌하는 대목은 당대 유럽의 불안정하고 대립적인 정세와 이의 해소를 위한 작가의 나름대로의 해법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신은 위대한 화가며, 우주의 화가라는 말을 듣고 코르넬리우스 베르그는 씁쓸히 낮은 목소리로읊조린다.

 

얼마나 불행인가요, 신딕씨, 신이 풍경화로 그치지 못한 것은.” (P.129)

 

 

 

* 새로운 번역본이 출간되어 이제 독자들이 쉽게 구해 읽을 수 있게 되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