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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건축사 솔 네즈 - 헨릭입센 희곡전집 1
헨리 입센 지음, 이주상 옮김 / 예니 / 2002년 6월
평점 :
절판
입센의 작품세계를 거칠게 구분하여 볼 때, 대중적으로 유명한 희곡들은 중기 사실주의에 속한다. 가정과 사회에 만연한 왜곡과 부조리, 이의 개혁을 위해 과감하게 가정을 뛰쳐나가고 사회와 정면으로 대결을 벌이는 인물들에 우리는 갈채를 보내고 통쾌한 대리만족도 느낄 수 있다.
입센의 후기 작품들은 상징주의로 분류된다. 이 말은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바가 작중 인물의 대사나 행동, 배경 등에 교묘히 숨겨져 암시되고 있다는 뜻이다. 극의 구성도 결말을 향해 직선으로 향해 있지 않고 살짝살짝 변죽만 울리면서 독자를 감질나게 하며 갈짓자 행보를 거듭한다. 별 수 없다. 독자는 보물찾기를 하듯이 여기저기 뒤지고 다니고 이따금 멈춰 서서 자신의 위치를 재확인할 수밖에.
<대건축사 솔네즈>는 독특한 작품이다. 무엇보다도 입센 자신의 개인생활과 육성이 절절이 묻어난다. 그의 나이 이미 육십 대 중반. 세계적 명성을 얻은 입센이지만 서서히 육체적, 정신적 쇠약의 기미를 절감한다. 젊고 아름다운 여성과의 만남. 이것은 작중에서 힐다 봔겔과 솔네즈의 관계로 설정된다.
입센에게서 결혼 생활의 의미는 대부분 부정적이다. <바다에서 온 여인>에서 겨우 희망의 싹을 발견하지만, 대체로 불평등과 억압과, 소통 단절로 형식적 관계 유지 차원에만 머물고 있다. 의례적이 상투적인 대화만 거듭할 뿐 진실과 교감이 없는 부부 관계는 기실 남남이나 진배없다. 극중의 솔네즈와 그의 부인 알렌처럼.
작가는 여기에서 비로소 온전히 개인에 몰두한다. 솔네즈를 둘러싸고 위협을 가하는 존재는 종전처럼 사회와 관습이 아니다. 오직 자기 자신이다. 대건축사로 성공한 솔네즈, 그의 화려한 성공은 이면의 어둠과 함께한다. 그는 성공을 위해 주위의 인간관계를 계산적으로 관리한다. 자신에게 유리하도록 여직원 카쟈의 순정을 교묘히 이용할 줄도 안다. 그렇게 그는 스스로 소외의 길을 구한다. 그는 아내와의 관계에서도 이해와 공감을 거부한다. 솔네즈에게 아내는 아이를 잃은 충격으로 마음의 병을 갖게 된 환자일 따름이다, 적어도 그가 보기에는.
솔네즈에게 유일한 두려움은 젊은이다. 그는 자신보다 유능한 젊은 세대가 곧바로 등장하여 자신을 몰아낼 것에 대한 강박 관념에 시달린다. 프로이트의 정신분석이 체계화되고 세상에 드러나기 전에 벌써 입센은 인물의 이상 심리에 초점을 맞춘 극작품을 발표하였다. 오로지 성공만을 쫓으며 살아온 중년 세대. 이제 겨우 안정을 찾을 만한 시기에 자신의 명성과 지위를 노리며 무섭게 다가서는 이들에 대한 두려움과 적개심. 입센 자신의 처지에 비추어 볼 수도 있다. 기존 입센 작품에서 세대 간 갈등은 이념 갈등의 형태로 표출된 반면 이 작품에서는 직설적인 세대 간 이해 갈등으로 여과 없이 그려지고 있다.
“솔네즈: 결국 그랬었군요. 할바드 솔네즈! 젊은 세대들에게 기회를 주어라! 가장 젊은 사람에게 기회를 주어라! 그리고, 기회를 만들어라! 기회를! 기회를!” (P.24)
“솔네즈: 젊은 세대들이 날 노려보고 있습니다......언젠가 젊은 세대들이 절 찾아와 “기회를 달라”고 소리치며 내 방문을 두드릴 것이오. 그 소리가 점점 가까이 들려오고 있습니다. 그때는 할바드 솔네즈, 건축사는 끝장이오.” (P.34)
“솔네즈: 날더러 문을 열어주라고?......안돼. 그건 그럴 수 없어. 젊은 세대! 그건 새로운 변화요...내 삶의 한계는 젊은이들 때문이오. 그건 하늘이 내린 최후의 심판이기도 하오.” (P.46)
힐다 봔겔의 극중 역할은 다층적이다. 그녀는 솔네즈에게 용기와 희망을 불어넣는 한편 그를 죽음으로 몰고 가도록 무모함을 감수하게끔 충동한다. 높은 탑 위의 솔네즈를 본 소녀시절의 환상에 젖어 있는 그녀의 행동은 솔네즈의 이상을 고취하는 동시에 자신의 실현 불가능한 이상의 실현에 집착하는 병리적 속성을 보인다.
솔네즈의 아내 알렌은 어떠한가? 그녀의 정신적 외상은 혼란스럽다. 힐다와의 대화에서 그녀는 화재로 인한 아이들의 죽음은 오히려 담담하게 받아들인다. 그녀가 견딜 수 없는 것은 애지중지하던 인형들의 상실이다. 그녀는 회상하며 눈물마저 흘린다.
“알렌: (눈물을 흘리며) 내가 아끼던 예쁜 인형들......오, 가엾은 것들! 그걸 구해냈어야 하는 건데! 생각만 해도 가엾어서 견디질 못하겠어요.” (P.80)
솔네즈의 최후는 운명적이다. 삶의 진실을 내면에서도 가정에서도 세상에서도 찾을 수 없는 가난한 영혼. 그의 빈 마음을 이상에 대한 허상과 야망을 향한 과욕으로 대체시키는 역할을 바로 힐다가 맡는다. 힐다와 솔네즈는 이상의 갈구자라는 면에서 이상적인 파트너십을 이룰 수 있는 존재들이다. 반면 그것이 참다운 현실의 삶에 근거하지 못하고 환상 속에서만 발견할 수 있음은 그네들의 한계일 수밖에 없다.
솔네즈가 세우고 오르고자 하는 탑은 인간을 영역을 넘는 신의 영역이다. 구약성서에서 바벨탑을 자신에 대한 인간의 도전이라고 신이 인식하듯이. 인간이 사는 집에는 높은 탑이 필요 없다. 오직 신이 거처하는 곳에 높은 탑이 존재한다. 솔네즈는 망상에 사로잡힌 인물인가 아니면 금기를 깨뜨리려는 영웅인가. 힐다는 망상을 부추겨 파멸로 이끌고 가는 인물인가 아니면 인간이 자신의 한계를 뛰어넘도록 힘을 불어넣는 존재인가. 그런 의미에서 추락한 솔네즈를 두고 내뱉는 힐다의 마지막 대사는 작품의 말미를 장식하게 충분하다.
“힐다: 하지만 그분은 해내셨어요. 나의 위대한 건축사! 솔네즈! ...” (P.98)
입센은 이 작품에서 사건 전개와 같은 구성적 측면뿐만 아니라 인물의 대사와 행동을 통해서 여러 가지 암시적 효과를 부여하고 있다. 대사는 의미 자체가 아니라 앞뒤 문맥과 인물들의 행동, 어조, 조명 등의 무대 등과 같은 요소들의 영향을 통해 전혀 다른 뉘앙스를 지니게 되며, 그것이 작품 전체에 모호성과 신비성 내지 기이함을 배가시키고 있다.
“힐다: (분간할 수 없는 어조로 그러나 냉정하게) 대건축사 솔네즈의 새 집에 꽃을 달아요.
솔네즈: 그래, 인간들이 사는 집이 될 수 없는 새 집에...... (솔네즈는 정원문으로 퇴장)
힐다: (이상한 표정으로 창틀 옆에 선다. 잠시 후 조명이 어두워지면서) 신기한 일이지......대건축사 솔네즈......” (P.7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