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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이름은 삐삐 롱스타킹 ㅣ 시공주니어 문고 2단계 15
아스트리드 린드그렌 지음, 햇살과나무꾼 옮김, 롤프 레티시 그림 / 시공주니어 / 2000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이 책을 초등학교 저학년인 큰아이한테 읽혀도 괜찮을지 막상 내가 읽고 나니 자신 없어진다. 어릴 적 TV를 통해 본 삐삐 이야기는 여전히 머릿속에 선명하게 각인되어 있다. 유쾌하고 통쾌한 천하장사 말괄량이 삐삐. 아이들과 재미와 추억을 공유할 의도로 삼부작을 구입했건만. 부모의 입장에서는 소심해진다.
삐삐의 언행이 통쾌함을 안겨주는 이유는 당연한 것으로 간주되는 사회적 상궤를 거부하고 도전하는 데 있다. 부모 없이 혼자 사는 아이, 학교도 가지 않고 괴상한 옷차림으로 다니는 아이를 자신의 아이가 친구로 여긴다면 대다수의 부모는 질겁할 것이다. 수업시간에 선생님의 말을 따르지 않고 토를 다니는 아이, 어른들이 대화를 하는데 함부로 끼어들어 주저리주저리 떠드는 아이를 좋아할 어른은 거의 없을 것이다. 예의 없는 아이, 버릇없는 아이, 이것이 어른들이 보는 삐삐의 모습이다.
어른들이 정해준 틀과 규범의 한계에 갇혀 있기를 거부하는 아이. 엉뚱하면서 과감한 발상을 아무 일 아닌 듯 생각하고 행동으로 나타내주는 아이. 아이들 입장에서는 매순간 흥미와 모험심을 유발하는 친구이므로 당연히 열렬한 환호를 아끼지 않을 것이다. 커다란 어른들보다 훨씬 힘이 커서 경찰들도 도둑들도 차력사도 단번에 제압하는 아이. 재빠른 몸놀림과 초인적인 대담성과 균형감, 운동신경으로 서커스단을 능가하는 재주를 보이는 아이. 이런 삐삐에게 열광하지 않은 또래 아이들이 과연 있을까.
삐삐는 문명의 아웃사이더다. 어릴 때부터 아빠를 따라 배를 타고 바다와 세계를 방랑하였다. 배에서는 학교도 없고, 사회의 정교한 예절과 도덕과 관습도 신경 쓸 필요 없다. 그런 아이가 어쩔 수 없이 육지 생활, 사회생활을 겪게 되었으니 혼란과 충돌은 일정 부분 불가피하였으리라. 삐삐 자신도 자각하고 있다.
“내가 아무리 잘 하려고 해도 다들 나더러 버릇이 없다고 해. 그런 적이 한두 번이 아니야. 바다에서는 그런 건 문제도 아니었는데 말이야.” (P.165)
“난 얌전해지기는 틀렸나 봐요. 아무리 애써도 안 되는 걸요. 앞으로도 절대 얌전해지지 못할 거예요. 그냥 바다에서 지낼 걸 그랬어요.” (P.180)
삐삐의 심성이 올바르다는 사실을 우리 모두는 알고 있다. 한 아이를 괴롭히는 여러 아이들을 혼내주거나, 도둑들을 상대로 밤새도록 폴카 춤을 춘 후 떳떳한 금화를 나눠주는 장면을 보자. 무엇보다 화재가 났을 때 아무도 손쓰지 못하는 건물에 갇힌 아이들을 구하는 대목을 보면 삐삐의 사려분별과 용기를 재평가하게 된다.
작가는 삐삐의 좌충우돌과 기행을 통해서 아이들의 눈을 붙잡아 맬 단순한 재미만을 추구하지는 않는다. 언뜻언뜻 내비치는 삐삐의 말에는 위선과 허식에 얽매인 사회에 대한 비판의식이 면면히 흐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다과회에서 부인들이 자기네 가정부들에 대한 험담을 늘어놓자 삐삐는 자기 할머니집의 가정부에 대한 어처구니없는 일화들을 계속 들려준다. 마지막으로 그럼에도 할머니는 그를 훌륭한 가정부라고 인정했다는 전언을 들려주면서 말이다.
그래도 내 아이가 삐삐와 같은 언행을 따라하거나 그런 아이를 친구로 어울린다면 흔쾌히 허용할 수 있을까. 구구단을 몰라도 잘 살 수 있고, 수학 교육을 바보 같은 장난으로 일소에 부치고 술래잡기나 하며 놀겠다고 선언하며, 예쁜 분홍빛 버섯을 덥석 베어 문다거나 가루 설탕을 바닥에 뿌리고 걷는 재미를 시연해 보인다면 말이다. 머리는 그래야 한다면서 가슴으로는 그러지 못하는 소심한 부모의 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