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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랜더스의 개 ㅣ 비룡소 클래식 12
위더 지음, 하이럼 반즈 외 그림, 노은정 옮김 / 비룡소 / 2004년 12월
평점 :
네로와 파트라슈. 주인공 이름만 들어도 어린 시절 가슴 쨍하게 보았던 애니메이션의 이름이 떠오른다. <플랜더스의 개>. 우연히 얻게 된 아동용 책을 두 아이들이 열심히 읽는다. 특히 글밥이 조금만 많아도 질색하던 둘째 녀석이 웬일인지 반복해서 읽는 모습이 신기하다. 그래 이 참에 제대로 된 원작을 보게 해줘야지 하고 주문한 게 이 책. 절반의 성공이다. 원작을 알 수 있게 된 점이 성공이라면, 원작이 오히려 더 분량이 적다는 점에서 당황. <플랜더스의 개>는 채 백 쪽이 되지 않는다. 중편 이야기 정도쯤. 내용 전개도 비교적 간단한 편이라 뭔지 모를 허전함을 느끼게 하는데, 애니메이션과 이를 토대로 한 시중 동화책의 부풀리기와 덧칠의 영향 탓이다. 게다가 파트라슈는 흰 털북숭이 또는 갈색과 흰색이 뒤섞인 개가 아니었다는 사실도 충격적이다.
파트라슈는 넬로의 보조적 존재가 아니다. 작중 주인공은 사람과 동물이 대등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인생 경험은 넬로보다 파트라슈가 더 많기에 넬로의 소망과 희망의 부질없음에 그는 안타까워한다. 기본적으로 인간이라는 존재가 갖는 잔인성과 이기심을 속속들이 알고 있는 그이므로.
“새 주인은 술주정뱅이에다가 짐승 같은 사람이었어요. 파트라슈의 하루하루는 지옥이었습니다. 하느님의 피조물인 동물에게 고통을 나눠 주는 건, 이 땅의 기독교도들이 신앙심을 보여 주는 한 방법이었어요.” (P.15)
이 작품은 ‘크리스마스 이야기’라는 부제를 달고 있듯이 크리스마스를 배경으로 삼고 있다. 흔히 기대하듯이 훈훈하고 흐뭇한 웃음 대신 서늘함과 뿌연 눈물을 자아낸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지만. 세계의 명절 크리스마스라고 해서 모두가 행복하고 즐거운 법은 아니라는 자명함에도 간과하기 쉬운 사실을 깨닫게 하면서. 크리스마스에 더 중요한 것은 물질이 아니라 마음이라는 점도. 비단 크리스마스뿐이랴.
“파트라슈에게는 오직 한 가지 생각뿐이었습니다. 넬로를 따라가야 한다는 생각이었죠. 사람이었다면 맛있는 음식, 원기를 되찾아줄 온기, 아늑한 잠자리를 위해 잠시 쉴 수도 있었겠지만 파트라슈의 우정은 그런 것과 달랐어요.” (P.88)
화자의 시각은 전지적 시점을 택하여 저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며 인물의 행위와 심경까지도 속속들이 들려준다. 어조는 담담하면서도 약간의 따스함과 동정심을 품고 넬로와 파트라슈를 바라본다. 자칫 값싼 감상에 빠지기 쉬울 텐데 휩쓸리지 않도록 꿋꿋하게 기조를 유지하는 작가의 인내심에 경탄한다. 반면 주변 인물에 대한 묘사는 시니컬하며 회의적이다. 작가는 기독교인들의 가식적이고 위선적인 행위에 냉소한다. 루벤스의 명작을 보여주는 대가로 돈을 요구하는 성당, 넬로의 순수성을 믿으면서도 마을의 유일한 부잣집에 비위를 맞추기 급급한 주민들.
우리가 이 이야기를 읽으면서 느끼는 감동은 복합적이다. 단순한 연민과 동정을 넘어 종을 뛰어넘는 사랑과 우정을 가슴을 찡하게 한다. 인간보다 더 나은. 그리고 부끄러움을 품게 만든다.
“넬로와 파트라슈에게는 길고 구차한 삶보다 차라리 죽음이 더 자비로운 일이었지요. 죽음은 충직한 사랑을 품었던 한 생명과 순진무구한 믿음을 지녔던 또 다른 생명을 데려갔습니다. 사랑에 대한 보상도 없고 믿음 또한 실현되지 않는 세상으로부터 말이지요.” (P.97)
<뉘른베르크 스토브>는 <플랜더스의 개> 작가의 다른 작품을 읽어볼 수 있는 유일한 기회다. 분량 면에서는 전편보다 오히려 더 길다. 전자가 사람과 동물의 교감이라면, 후자는 사람과 사물의 교감을 제재로 한다. 스토브가 그 대상이다. 그렇다, 난로! 못생기고 천편일률적인 난방도구를 연상하지 말자. 사면이 아름답게 장식되어 있고 자체로서도 예술품으로서 뛰어나게 제작된 커다란 난로다. 공장에서 찍어낸 게 아니라 장인이 수작업으로 만든 공예품. 아우구스트의 집은 가난하다. 빚을 지지 않으면 견디기 힘든 형편에 이러한 스토브는 일종의 사치다. 오래 전에 우연히 발견하여 대대로 내려온, 그래서 가족의 일원으로 인정받는 히르슈포겔. 히르슈포겔에 무한한 애정을 품는 아우구스트. 아버지는 감정을 제대로 헤아리지 못하고 돈에 급급하여 스토브를 팔아넘긴다.
“소년의 어린 시절은 이제 자신에게서 깡그리 사라져 버렸습니다. 명랑하고 구김살 없고 밝은 성격도 함께 사라져 버렸지요. 속으로 뜨거운 눈물을 삼키느라 소년의 말투는 퉁명스럽고 지쳐 있었어요. 자신에게는 이 일이 세상의 끝이나 다름없었으니까요.” (P.141)
이후 전개는 작품 대부분을 차지하는 아우구스트와 히르슈포겔의 여행담으로 이어진다. 아홉 살 난 어린이가 과감하게 집을 뛰쳐나가 스토브와 함께 있고자 추위와 허기, 공포를 무릅쓰고 온갖 고생을 같이한다. 그것은 존재의 양식을 뛰어넘은 순수한 사랑 덕분이리라.
작품 속에는 어른과 아이의 행동 간 극명한 대조가 묘한 긴장을 제공한다. 소중한 스토브를 팔아치운 아버지를 원망하기는 쉽지만 불가피성을 이해 못할 바는 아니다. 아버지를 비난하며 가출한 아들. 당대도 지금도 쉽사리 용서받거나 인정받기는 어려운 행위다. 물론 결과적으로 해피엔딩으로 끝났지만 현실 세계는 동화와는 다르므로. 왕을 속여 넘긴 신뢰하던 신하의 사기적 행위. 터무니없는 중간마진을 챙긴 골동품상 등. 이들과 전적으로 순수함으로 가득 찬 아이 아우구스트와는 헤아릴 길 없는 간극이 놓여있다.
사람과 사물이 상호 교감을 나누기 위해서 공감과 사랑이 깃들어야 한다. 사물은 이를 받아들일 영혼을 갖추어야 한다. 작가는 오로지 모작이나 위조품이 아닌 진품만이 영혼을 지닐 수 있다고 한다. 진실한 존재 간의 따스한 교감을 꿈인지 환상일지 모를 장면에서 뉘른베르크산 스토브는 이렇게 회상한다.
“그때 제 삶은, 속이 텅 빈 채 도시의 웅장한 방에 썰렁하게 서있는 것보다 훨씬 충만했습니다......진심으로 저를 사랑해 주는 사람들이 있던 그 초라한 집에서 나온 이상 외롭고 쓸쓸할 것입니다.” (P.19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