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리 - 2010 제34회 오늘의 작가상 수상작 청춘 3부작
김혜나 지음 / 민음사 / 2010년 6월
평점 :
절판


작가의 이름을 처음으로 알게 된 계기는 정유정의 히말라야 여행기를 통해서이다. 선배 작가의 글 속에서 철저하게 보조적 역할 만을 묵묵히 수행하는 착한 후배 작가의 인상이 지배적이다. 여행을 좋아하고 요가를 수련하는. 문득 이 작가가 쓴 글을 읽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사람 스스로의 목소리로 자신의 문체로 자신을 보여줄 수 있는 작품들 말이다. 2010 오늘의 작가상 수상작이라는 화려한 타이틀이 붙어있다. ‘파괴적이고도 충격적이며 반도덕적인 소설이라는 뒤표지의 카피가 호기심을 자극한다. 도대체 어떻게 썼길래?

 

파격적인 작품이다. 예상보다도 더욱. 내용 자체는 간단하다. 앞날 어둡고 외롭고 소외된 불쌍한 청춘. 그들의 방황과 일탈, 좌충우돌. 차라리 진부하다. 이를 상쇄하는 게 제재와 문체와 묘사다. 먼저 포르노 못지않은 적나라한 성교 묘사. 근래 발표된 문학작품들에서 예전과 비교하면 충격적일 정도로 노골적인 성풍속과 성묘사가 빈번해지는 현상을 볼 수 있다. 김연수, 김이설 언뜻 떠오르는 면면이다. 그들도 이 대담한 작가에 비하면 약과다. 확실히 야설과 야동이 초등학생들한테도 일상적인 용어로 정착한 현 세태를 반영하는 듯하다.

 

작중 화자는 이십대 초반임에도 불구하고 남성과의 교합 경험이 제법이다. 오로지 과격한 섹스만을 위해 만나는 남자친구, 나이트클럽에서 술에 취해 기억도 나지 않는 남성, 노래방 호스트로 일하는 제리 등. 여성전용 노래방에서 도우미를 불러 선택하고 노는 풍습은 남녀의 성만 바뀌었을 뿐 남자들의 놀이문화와 판박이다. 제리의 입을 통해 호스트들의 나날도 알게 되었다. 피어싱에 대한 상세한 소개도 인상적이었다.

 

자칫하면 통속 소설 내지 수준 높은 야설에 그칠 작품을 수렁에서 구해낸 것은 무엇보다도 문체에 있다. 성적 감흥을 촉발하고 고조하고자 일부러 자극적인 묘사와 표현을 남발하는 야설과 달리 작가는 무미건조한 문장을 구사한다. 매우 외설적이지만 일상적인 사소한 행위인 양 감정을 배제한 건조한 묘사는 독자로 하여금 작중 장면에서 멀찍이 떨어져서 바라보게 만든다. 나와는 현실과는 무관한 이야기 속, 영화 속 한 장면인 듯.

 

작중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사회의 비주류이자 마이너리거들이다. 사회적 지위는 별 볼일 없는 지방 야간대학생들. 졸업 이후에 대한 환상과 희망이 없다. 공간적 배경은 서울에서 벗어난 수도권 변두리의 대학가와 노래방 등이다. 화자의 집은 서울이지만 서울은 그의 무대가 아니다. 주로 들르는 상점도 지하상가. 시간적 배경을 살펴보자. 이들은 모두 밤의 인물들이다. 술 마시고 노래방에 가고 섹스를 하는 때는 항상 밤이다. 낮은 밤의 활동을 예비하는 휴식과 보조적 시간에 불과하다.

 

내가 어디에 있건, 무엇을 하건, 나는 늘 뭐 하나 제대로 하지 못하는 문제아였고 인간쓰레기였다.” (P.106)

 

나야말로 아무런 기술도 능력도 가지지 못하고, 집에서건 학교에서건 사회에서건 평생 소외만 받으며 살아갈, 그야말로 글러 먹은 인생이었던 것이다.” (P.107)

 

화자의 개인과 가정에 어떤 문제가 있는지 구체적인 설명은 없다. 확실한 점은 가정사가 평탄치 않다는 점이다. 화자와 엄마 간에는 일절 대화가 없고, 서로 마주치는 것도 극히 꺼린다. 사생활에 관여하지 않는 단순한 동거인에 불과하다.

 

그게 다였다.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고, 아무것도 돌아보지 않고......나 자신이나 가족, 친구, 앞으로의 일......삶의 모든 불안정한 일들 따위가 하나도 생각나지 않았다.” (P.155)

 

누군가는 말한다. 아프니깐 청춘이라고. 아니다. 청춘이라고 아픈 게 아니다. 누구든지 아픈 법이다. 청춘은 아직 고통에 대응하는 수단과 참을성이 부족하다. 같은 고통도 청춘에게는 유달리 심한 열병으로 다가온다. 그게 청춘이다. 화자를 포함한 작중 인물들은 모두 소외된 존재들이다. 모든 현대인들도 마찬가지다. 소외를 달래기 위해 그들은 술을 마시고 정신없이 몸을 흔들며 섹스를 하고 웃음을 판다.

 

그때 불현듯, 그의 손을 잡고 싶었다. 절대......혼자 있고 싶지 않았다. 누구라도 좋으니 함께 있고 싶었다.” (P.54)

 

나는 그냥, 지금의 나만 좀 아니었으면, 누군가 내 옆에 좀 있었으면......하는 바람뿐이었다. 항상 사람들을 만나고 술을 마시고 잠을 자지만, 어느 누구와도 진정으로 함께였던 적이 없었다. 여럿이 술을 마시는 이 순간조차도 나는 혼자라는 소외감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P.80)

 

화자가 제리에게 매달리는 연유가 여기에 있는 것이리라. 웃음을 파는 가식에 불과하지만 똑바로 눈을 마주하고 이야기를 주고받을 수 있는 존재. 지불할 돈만 있다면 일체의 관계 형성이 어려움 없이 손쉽게 이루어질 수 있는 존재. 서늘하고 건조한 가슴에 따스한 한줄기를 기대하고 싶은 존재. 그것이 화자만의 일방적 기대이자 부질없는 소망이지만.

 

나는, 네가 내 곁에 있을 때, 그것이 비록 찰나에 불과했을지라도, 그 순간만큼은 제발 진심이었기를 바랐을 뿐이야. 다른 사람에게는 몰라도 나에게만큼은 제발, 진심으로 함께 있어 주었기를 바랐을 뿐이야.” (P.181)

 

부부 간에도, 가족 간에도, 사제 간에도 소통은 점차로 단절되고 있다. 우리는 점점 개체적 존재로 변모하고 있다. 세상은 현실은 단편화, 파편화되고 있음을 알고 여기에 익숙해지고 편안해하는 게 우리네들이다. 딱한 존재들이다, 우리 모두는.

 

수없이 많은 사람들과 술을 마시고, 수없이 많은 사람들과 섹스를 나누어도 내 본질을 결코 변하지 않았다. 나는 늘 혼자였고, 그런 내 곁에 어느 누구도 진정으로 머물러 주지 않았다.” (P.213)

 

문득 체온이 그리워진다. 따뜻한 마음 한구석을 몸서리치게 열망한다. 서로에게 손을 뻗치지 않으면서도 누가 자신의 손을 잡아주기를 고대한다. 영원한 불통과 단절. 아니면 대화와 소통. 작가는 마지막 장에서 선택을 암시하고 있다. 다음 작품에서 전개가 궁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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