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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형의 집 ㅣ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48
헨릭 입센 지음, 안미란 옮김 / 민음사 / 2010년 6월
평점 :
책을 읽다가 주목할 만한 대목은 책장 끝을 살짝 접는데, 해설과 연보를 포함하여 140면이 채 되지 않는 얄팍한 책에 접힌 곳이 십여 군데에 달한다. 그나마도 나름 특히 인상 깊은 경우로 한정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고전은 역시 고전임을 새삼 알게 된다. 특히 마지막 대목에서 노라의 통렬한 웅변은 가슴 깊은 곳을 절절히 울린다.
여성해방 운동의 문학적 정전과도 작품. 페미니즘에 관심 없는 내 입장에서는 굳이 읽을 만한 동기부여를 갖지 못한다. 보봐르의 <제2의 성>과 마찬가지로. 섣부른 선입관은 그래서 무섭고 어리석은 법. 이 책에서 여성만을 주목하는 독자는 편협한 독서를 한 셈이다. 물론 여성해방도 무게 있는 주제다. 하지만 입센은 여기서 인간과 사회에 대한 본질적 질문을 제기하고 있음을 놓쳐서는 안 된다. 노라와 헬메르는 당대 노르웨이의 전형적인 부부상을 대표한다. 주체적이고 독립적이지 못하며 성숙한 일개 인격체로서 인정받지 못하는 제2의 성으로서의 여성. 노라는 내심 불만을 품고 있지만 그것은 표면화되지 못한 상태에 놓여 있다. 소소한 불만은 개인과 가정과 아이들의 행복과 평화를 위해서 꾹꾹 눌러 가라앉힌다. 대다수의 결혼한 여성들은 그러하다. 남성들도 그러하다. 결혼 생활에서 완전한 화합과 행복은 이념형에 불과하다.
독자적인 사회적, 법적 지위도 인정받지 못하고 언제나 남성(아버지와 남편)에게 의지하며, 그들을 기쁘게 하기 위해 인형처럼, 종달새와 다람쥐처럼 재롱을 피워야 하는 존재, 그러면서 이러한 현실과 처지를 당연하고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안주하는 여성들. 그것이 노라가 맞닥뜨린 사건을 통해 각성한 사회와 가정에서의 여성의 현실이다. 그녀는 자신이 행복하다고 믿지만 진실은 사랑과 행복을 세뇌시키려는 무의식적인 노력이었을 뿐이다. 노라에게 사건이 발생하지 않았다면 그녀의 삶은 어떻게 되었을까? 분명 가정을 떠나지는 않았을 것이지만, 위장된 행복은 감소하고 억눌린 자아에 대한 불만은 갈수록 팽배하였을 것을 짐작하기란 어렵지 않다.
“당신들은 나를 사랑한 적이 없어요. 당신들은 나에 대해 애정을 갖는 게 즐겁다고 생각했을 뿐이죠.” (P.115)
“아니요. 행복한 적은 없었어요. 행복한 줄 알았죠. 하지만 한 번도 행복한 적은 없었어요......
우리 집은 그저 놀이방에 지나지 않았어요. 나는 당신의 인형 아내였어요. 친정에서 아버지의 인형 아기였던 것이나 마찬가지로요. 그리고 아이들은 다시 내 인형들이었죠. 나는 당신이 나를 데리고 노는 게 즐겁다고 생각했어요. 내가 아이들을 데리고 놀면 아이들이 즐거워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로요. 토르발, 그게 우리의 결혼이었어요.” (P.116)
노라의 남편 헬메르의 입장에서는 청천벽력이었으리라. 기껏 있을 수 없는 사고를 친 아내를 아무 일도 없듯이 용서해주겠다고 했는데 가정을 떠나겠다고 선포하고 있으니. 당대적 관점에서 그는 지극히 평범한 타입의 남편에 해당한다. 오히려 모범적이라고 해야 할까. 아내를 더없이 사랑하고, 도덕적으로 올바르도록 애쓰며 사회적 지위와 명예에 높은 가치를 두고 있는. 다소간의 권위적 태도와 형식적인 친절, 지나칠 정도의 결벽이 인정되지만 이 정도를 가지고 인간성을 탓할 수는 없다. 그의 커다란 흠결이라면 결정의 순간 아내 대신에 사회를 선택했다는 점인데, 그로서는 아내의 사고와 행동은 상대적으로 가치가 덜한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면서 외견상 아무 일도 없는 양 보여주기 위한 위선적 태도를 보인다.
“당신에 관한 일은, 우선 우리 사이는 전과 똑같은 것처럼 보여야 해. 물론 세상의 눈에만 그렇다는 거지. 당신은 계속 이 집에 있어야 해. 당연히 그렇지. 하지만 당신에게 아이들을 키울 권리를 줄 수는 없어. 당신에게 그건 맡기지 못하겠어.” (P.110)
“자기 아내를 전심으로, 거짓 없이 용서했다는 것 말이야. 그럼으로써 여자는 두 배로 그의 소유물이 되니까. 그는 아내를 이 세상에 다시 낳아 준 거야. 아내는 어떻게 보면 그의 아내이면서 그의 아이이기도 하지. 힘없고 무력한 존재인 당신은 앞으로 나에게 그런 존재가 될 거야. 나에게 마음을 열기만 하면 나는 당신의 의지와 양심이 되겠소.” (P.113)
당대 노르웨이 사회에서는 여성은 남성의 부속물로 대우받았다고 하며 당연히 법적 권리도 지극히 제한된 것이었다. 아이와 남성 어른의 중간적 존재 정도. 이러한 제도와 관습 속에서 수많은 노라와 헬메르는 교육받고 세뇌 당한다. 그것이 그들에게 당연히 준수되어야 할 성 역할이자 의무로서 말이다. 이런 점에서 노라와 헬메르 부부는 모두가 피해자다. 미약한 한 개인으로서는 도저히 어찌해볼 도리가 없는 법률과 도덕과 종교 등의 거대한 체제의 위력. 입센은 노라로 하여금 계란을 던지도록 하였다. 노라는 성공하지 못하더라도 또 다른 노라가 줄줄이 뒤를 잇는다면 가능하리라. 그리고 그것은 사실로 판명되었다. 이 작품이 가정극으로 분류되지 않고 사회극으로 평가받는 이유다.
노라에게 남편과 아이들에 대한 책임은 소중하지만 그녀는 더 거룩한 의무가 있다. 그것은 주체적 자아로서 개인을 인식하는 일이다.
“나 자신에 대한 책임이에요......나는 내가 우선적으로 당신과 마찬가지로 인간이라고 믿어요. 최소한, 그러게 되려고 노력할 거예요.” (P.118)
입센은 상대적 소수자로서 여성의 입장에서 반론을 펴고 있지만, 헬메르에게도 동일하게 적용할 수 있다. 헬메르에게도 사회적 속박과 구속에서 온전한 자신을 재발견할 필요성은 절실하다, 남편과 아버지라는 책임과 의무를 초월한.
입센은 인물 간 대화와 지문을 통해서 뿐만 아니라 무대 배경을 이용해서 작중 분위기와 사건 전개를 암시하고 있어 연극적 장치를 잘 활용하고 있다. 1막의 무대는 “아늑하게 잘 꾸몄지만 수수한 거실”(P.9)이지만, 갈등이 심화된 2막의 무대에서는 더 이상 안온함이 느껴지지 않는다.
“피아노가 있는 구석에 크리스마스트리가 서 있다. 크리스마스트리는 이미 장식을 빼앗겼고, 초도 다 타버렸다.” (P.54)
노라와 헬메르는 영원히 화해할 수 없는 것일까? 작자는 한 가지 조건을 제시하고 있다. “진정한 결혼”(P.124)이 가능하다면. 작품에서는 기적에 대한 한 줌의 희망을 피력하고 있지만, 부부 간에 진정한 결혼이 가능할 것인가?
※ 제1막 중간에 도저히 요령부득인 대목(P.34)이 있다.
(노라) 아, 이제 정말 아주아주 행복해요. 이제 세상에서 간절한 소원은 딱 하나밖에 없어요.
(랑크) 그래요? 그게 뭔데요?
(노라) 토르발에게 들려주고 싶은 말이 하나 있어요.
(랑크) 그럼 왜 말을 안 하죠?
(노라) 용기가 안 나요. 나쁜 얘기니까요.
(린데 부인) 나쁜 얘기라고?
(랑크) 아, 그럼 이야기하지 않는 게 좋지요. 하지만 우리에게는 할 수 있잖아요? 토르발에게 그렇게 들려주고 싶은 얘기가 뭔가요?
(노라) 죽어 버리라고 너무너무 말하고 싶어요.
(랑크) 제정신이 아니군요!
(린데 부인) 아, 저런, 노라!
헬메르에 대한 노라의 숨겨진 감정이 표출되는 장면으로 이해되는데, 노라는 남편이 죽어버리기를 욕망하고 있었단 말인지 혼돈스럽다. 그래서 다른 번역본들을 찾아보았더니 제각기 개성적인 해석을 보여주고 있다.
“난 이렇게 말하고 싶어요. <모두 지옥으로 꺼져 버려!>” (김창화 옮김, 열린책들)
“나는 말하고 싶어 견딜 수가 없어요. “이 개자식아!”하고 말예요.” (김진욱 옮김, 범우사)
“저, 말하고 싶어서 근질근질해 죽겠어요. ‘뭐야, 빌어먹을’ 하고.” (곽복록 옮김, 신원문화사)
“저, 말하고 싶어서 견딜 수가 없어요. ‘뭐야, 빌어먹을!’ 하고.” (이경석 옮김, 홍신문화사)
“난 이렇게 말하고 싶어요. “지옥으로 꺼져 버려!”” (소두영 옮김, 동서문화동판)
내친 김에 영문판에서는 어떤 표현을 사용했는지 알아보았다.
“I should just love to say — Well, I’m damned!”
입센에 대한 본격 연구서인 <헨리크 입센> (김미혜 저)에서 해당 작품론을 확인해본다.
“남편이 자신의 이가 나빠질까봐 마카롱을 금지한다는 말을 한 후 노라는 꼭 남편 앞에서 “빌어먹을”이라고 말하고 싶다고 한다. 꼭 남편 앞에서 말하고 싶다는 이 한 단어는 모든 것을 남편의 기준에 맞춰 사는 것에서 행복을 느낀다는 노라가 자신의 내적 감정을 스스로 속이고 있는 것인데도 그 속임 자체를 의식하지 못하고 있음을 드러낸다.”
비로소 머릿속이 명쾌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