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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렐 차페크 평전
김규진 지음 / 행복한책읽기 / 2014년 7월
평점 :
카렐 차페크 평전이 나왔다는 소식을 뒤늦게 알고 부랴부랴 책을 펼쳐든다. 여전히 편향되고 척박한 출판계 풍토에 동구권의 그다지 인기 있는 작가도 아닌 카렐 차페크에 관한 책이라니! 차페크에 대한 책을 기대했다면 다소간 실망할 수 있겠다. 엄밀히 말하면 이 책은 ‘평전’이 아니다. 전체 12개의 장 가운데 그의 삶과 문학 전반을 소개한 것은 제1장 하나뿐이며 분량 상으로도 1/10에 불과하다. 그러면 나머지 장은 무슨 내용이냐고? 차페크의 주요 작품에 대한 작품론을 담고 있다. 고로 정확히 하자면 ‘카렐 차페크 연구’ 또는 ‘카렐 차페크의 문학’ 정도가 적합하다는 개인적 의견이다.
제2장부터 제12장까지의 작품론은 각각의 연구 논문을 다듬어 수록한 것으로 보여 차페크의 작품을 읽지 않은 초심자가 접근하기는 다소 어려운 편이다. 이 책을 통해 차페크의 세계에 다가가려는 독자보다는 그의 개별 작품을 읽은 독자가 종합적이고 전반적인 작품세계를 조망하기에 오히려 도움이 될 듯 하다. 다행하게도 소개된 작품들 가운데 국내에 번역 출간되지 않은 작품은 ‘위경 이야기들’과 ‘어머니’, 단 두 편뿐이다.
카렐 차페크가 얼마나 탁월한 작가인지 의심하는 시각이 분명 존재할 것이다. 프란츠 카프카와 동시대의 작가로서 카프카와는 달리 당대에서부터 전 유럽에서 각광을 받았으며 여러 차례에 걸쳐 노벨문학상 후보로 언급되었다고 한다. 일설에 따르면 나치독일과의 정치적 역학관계 때문에 수상을 하지 못하였다고 하며, 히틀러의 체코 침공 직전에 눈을 감았다고 하니 차라리 다행이라고 해야겠다. 수용소에서 세상을 떠난 형 요세프의 운명에 비한다면 말이다. 국내 출판계에서 산발적이지만 그의 작품들이 제법 여러 편 소개된 점은 정말로 다행이다. 야로슬라프 하셰크의 유명한 병사 슈베이크 이야기는 삼십년 전에 번역된 이후 감감무소식이다.
차페크 문학의 양대 축은 소설과 희곡이다. 사회적 메시지를 던지고자 할 경우 희곡을 통해 발표하였으며, 내적인 성찰과 모색에 중점을 두는 경우 소설 형식을 사용하였다. 양대 축의 접점이 바로 소설 <도롱뇽과의 전쟁>이다. 저자도 수차 지적하였듯이 차페크 문학의 테마는 인간성의 탐구와 옹호라고 할 수 있다. 전자는 그의 소위 철학소설 삼부작으로 결실을 맺었으며 후자는 일련의 희곡들과 도롱뇽을 제재로 한 소설에서 명백히 드러난다. 차페크는 상대주의적 인간관을 지녔다고 한다. 나와 남을 상이한 존재이므로 상대를 인정하고 존중해야 한다. 서로 간의 차이를 인정하지 아니하고 절대적 인간유형을 우상시하고 강요한다면 참다운 인간성은 종말을 맞이하게 된다. 인간성을 위협하는 요소는 도처에 편재하지만 차페크 당대에 그는 과학기술의 전례 없는 급속한 발전과, 고삐 풀린 망아지마냥 전 세계를 휘감는 자본주의의 심화, 나치독일을 필두로 한 전체주의 체제의 팽창에 커다란 경계심을 지녔다. <RUR>과 <도롱뇽과의 전쟁>에서 과학기술과 자본주의를 주로 삼고 전체주의를 부로 삼았다면, <하얀 역병>과 <어머니>는 전체주의 위협에 대한 각성을 주로 삼고 있음이 확연히 드러난다. <마크로풀로스의 비밀> 또한 영생의 묘약이라는 기술적 요소에서 전자와 이어진다고 하겠고, <곤충 극장>은 포괄적 인식을 개괄적으로 다루고 있다.
“인간과 인간의 생명 그리고 운명은 자연스럽고 주어진 한계를 가지고 있다, 그리고 그것을 초월하는 것은 인간의 본질을 훼손시킨다.” (P.211)
차페크는 일관되게 인간 본성의 발견과 회복을 주창한다. 그가 주목한 인간성은 거창하고 추상적인 특별한 철학적 의미가 아니다. 가장 평범하고 소박한 삶에 진실한 본성이 자리 잡고 있다. 작가가 살던 당시는 유럽 세계에서 전대미문의 혼란기였다. 제1차 세계대전이 종결되고 체코는 독립 국가를 이루었지만 정세는 여전히 어수선하고 세인들의 가치관도 붕괴되었다. 게다가 제2차 세계대전으로 이어지는 전체주의 세력이 사회적 혼란을 틈타 급속도로 세력을 팽창하고 있었다. 작가의 감각은 더 큰 인간성 말살이 도래할지 모르는 위험을 본능적으로 감지하고 있는 듯하다.
그의 작품 중 순문학적 관점에서 재삼 음미할 가치가 있는 것은 역시 <호르두발>, <별똥별>, <평범한 인생>으로 구성된 철학소설 삼부작이다. 각각은 자체로서도 매우 문학적 형상화가 탁월하지만 삼부작을 종합적으로 반추해보면 그의 뛰어남이 배가됨을 알게 된다. 호르두발은 철저하게 고독하고 소외된 인물이다. 미국에서도 그러하지만 귀향 후 가족과 이웃에게도 마찬가지다. 독자는 호르두발의 심경을 이해하려고 노력하지만 그는 자신의 속내를 쉽사리 용납하지 않는다. 죽은 이후에도 그의 진정한 사인을 알 수 없는 것처럼. 호르두발, 당신은 어떠한 사람인가?
<별똥별>에서 호르두발에 상응하는 인물은 비행기사고로 식물인간이 된 환자 X다. 그의 정체와 삶의 이력에 대해서 병원에 있는 사람들은 궁금해 하고 제각기 자신만의 방식을 통해 환자 X의 진실을 추론한다. 간호사 수녀는 꿈을 통해, 환자 천리안은 인식의 동화를 통해, 그리고 시인은 이야기의 창조를 통해. 여러 사람이 재구성한 그의 삶은 놀라울 정도로 유사성을 지닌다. 일말의 진실을 내포하지만 온전한 참은 아니며 진실과 진실이 아닌 수준과 경계를 아무도 알지 못한다. 환자 X, 당신의 진정한 모습은 무엇인가?
<평범한 인생>은 가장 심오하다. 화자는 자서전을 통해 스스로의 삶을 회상할 때 지극히 평범한 인생이었음을 고백한다. 돌연 후반부에서 소설을 소용돌이친다. 또 다른 내면의 목소리는 화자에 대립한다. 그에 따르면 화자의 삶은 전혀 평범하고 평탄하지 않았으며 무수한 갈등과 억압과 타협이 깃든 끔찍한 삶이었다는 것이다. 개인의 인생은 단일한 자아의 삶이 아니라 다수의 상이하고 가능한 삶들의 집합으로서 외관상 평범한 인생일지라도 기실은 총체적인 삶을 살고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이 차페크는 삶에 있어 진실은 무엇인가하고 질문을 던지고, 개인의 진정한 정체성의 존재와 발견 가능성을 탐문한다. 작가는 개인의 삶이, 표면적으로 평범하고 단순한 인생일지라도 자아의 무한한 가능성을 내포하고 구현한 실체임을 보여주고 있다. 우리는 자신은 물론 타인의 진정한 실체를 결코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편린이나마 그들의 삶을 이해하고 공감할 수 있는데 즉자와 타자를 연결하는 대자(對自)의 개념에 근접한다.
“진테제라고 하는 <평범한 인생>에 나타나는 인간 성격에는 단일성과 복합성이 존재한다. 그 진테제는 복합성 속의 단일성이며 우리들 안에 있는 그 인간의 복합성이 바로 다른 사람과의 관계를 가능하게 하는 것이다.” (P.115)
차페크의 작품에는 미스터리가 많이 반영되어 있으며, 특히 범죄의 수사와 재판에 관련된 소재를 선호하는 경향을 보인다. <호르두발>은 전형적이지만, 나머지 두 작품도 유사성이 깊고, <마크로풀로스 사건>도 재판과 관련된다. 그의 단편 모음집인 ‘두 호주머니 이야기’에 수록된 작품들도 이후 그의 작품 경향을 짐작케 할만한 요소들이 그득하다. 어떤 범죄적 사건이 발생할 때 수사와 재판과정에서 국외자는 표면화된 외양과 결과만을 가지고 사건을 판단한다. 객관적 증거는 내면적 심리관계를 간과하기 쉽다. 우리는 호르두발의 진심, 그의 아내와 하인 슈테판의 내면을 결코 알지 못한다. 진실은 어디에 있고 정의는 무엇인지 안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제1차 세계대전의 혼란기를 겪은 후 미국에서는 소위 ‘길잃은 세대’ 혹은 ‘잃어버린 세대’가 득세하였다. 혼란이라면 미국보다도 격심한 체험을 한 게 당대 유럽이다. 더욱이 그들에게 혼란은 완료형이 아니라 여전히 확대진행형이다. 기존의 가치관이 전복되고, 신뢰하였던 물질적, 정신적 토대가 뿌리째 흔들리면서 인간성 말살의 극단적 체제가 임박해 오는 현실에서 남달리 예민한 작가가 체득하고 지향한 글쓰기의 과제와 목표는 차페크에게서 뚜렷이 실현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