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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즈미시키부 일기 ㅣ 지만지(지식을만드는지식) 수필비평선집
이즈미시키부 지음, 노선숙 옮김 / 지식을만드는지식 / 2014년 1월
평점 :
10세기 초 일본 고대 헤이안시대의 여류 일기문학 작품이다. 앞선 <청령일기>에 비하면 연대적으로 수십 년 후에 해당한다. 타이틀은 일기로 되어 있으나 역시 내용상으로는 회상록에 가깝다. 자연스레 선대와 후대의 유사한 일기문학과 비교되는데, 여류작가라는 점에서는 <청령일기>와 친근성을, 생애 전반이 아닌 특정 시기와 사건을 다룬다는 점에서는 <도사 일기>와 유사성을 지닌다. 이런 점에서 후대의 일기문학의 선구자라고 할 수 있다.
이 일기는 남녀 간의 따끈한 연애과정을 기술하고 있다. 여자는 작자인 이즈미시키부, 남자는 당대 천황의 아들인 아쓰미치 황자. 신분상 격차가 있는 남녀가 만나게 된 계기는 겉치레를 벗기고 보면 기실 불순하다. 여자는 남편이 있는 마당에 이미 황자의 형인 다메타카 황자와 내연의 관계를 유지하였는데, 황자의 죽음으로 실의에 빠져 있다. 남편과는 사실상 이혼 상태. 남자는 여자에 대한 소문을 듣고 가볍게 심심풀이 삼아 한때 유희의 상대로 생각한다. 여자에 대한 세간의 평은 그다지 좋은 편은 아니다.
일기에서 다루는 시기는 서기 1003년 4월에서 1004년 1월까지에 해당한다. 남녀 사이의 연애 코스가 흔히 그러하듯 만남, 탐색, 밀고 당기기, 다툼과 소원, 진심의 발견, 영원한 결합으로 이어지는 과정은 동일하다. 다만 시대적, 문화적 차이가 존재하는데, 연인의 마음을 상호간에 전달하고 확인하는 수단은 서신과 와카다. 이 점에서 우타 모노가타리로 장르 성격을 구분하기도 한다. 작자가 화자를 ‘여자’로 지칭하는 점, 후대에 회상 형식으로 쓰여져 다소간 작위적 요소가 존재한다는 점이 그러하다.
일기에는 매우 많은 와카가 등장한다. 해설에 따르면 145수로서 분량을 감안하면 일기문학 작품들 중에서는 가장 와카의 비중이 크다. 그녀는 와카의 뛰어난 명인이었던 듯하다. 와카 증답을 통해 그녀의 재주, 감정, 외로움 등을 알게 된 황자는 서서히 그녀에게 빠져들게 된다.
“여자의 섬세한 감각을 보신 황자님께서는 운치를 이해하는 여자의 멋스러움에 새삼 감탄하셨다.” (P.154)
그리고 황자의 신분 상 자주 찾기가 어려워 종내에는 자신의 집으로 들어올 것을 강권하는 단계에 이른다. 두 사람의 와카 중 압권은 ‘팔베개 소맷자락’이라는 문구를 마지막 시구로 사용한 일련의 와카들(18장과 19장)이다. 상기 문구는 두 사람 만의 사랑을 표시하는 비밀 암호라고 할 수 있으리라.
두 사람 사이를 가로막는 최대의 장애는 여자를 둘러싼 좋지 않은 풍문이다. 황자는 여자를 사랑하면서도 여자의 품행에 계속적으로 일말의 의혹을 품는다. 이 과정에서 교제와 소원이 반복된다.
“여자에 관한 소문을 전하자 황자님께서는 그녀가 참으로 경박한 여자라는 생각에 오랫동안 편지도 쓰지 않으셨다.” (P.76)
일기의 마지막은 망설이던 작자가 황자의 저택으로 들어가게 되고, 이에 격분한 황자비가 친정으로 돌아가는 장면으로 끝맺는다. 순전히 두 사람의 관계만으로 보면 사랑이 결실을 거둔 것이지만, 확대된 주변 관계의 시각에서 보자면 황자의 가정에 형용할 수 없는 파문을 일으킨 셈이다. 어쨌든 두 사람은 수 년 후 황자가 사망할 때까지 행복한 시절을 보내었으니 사랑 자체는 순수했음을 알 수 있다.
일기가 더 이상 나아가지 못한 연유는 분명하다. 더 이상 서신과 와카를 교환할 필요성이 사라졌다. 신분상 차이로 인해 작자는 황자의 궁인 자격으로 저택에 들어갔다. 애타게 그리워할 필요 없이 눈앞에서 서로를 바라볼 수 있게 되었지만, 연인의 사랑은 천상에서 지상으로 내려왔다.
이즈미시키부, 그녀는 미색과 재주를 겸비한 재인이었음에 틀림없다. 비록 본인은 부인하고 있지만 그녀를 둘러싼 무수한 염문들. 두 황자와의 실제적 사건. 작중에서도 역설적으로 알 수 있듯이 남편에 대한 철저한 외면. 이것들로 미루어 보면 그녀는 자유분방한 인물이었을 것이며, 이 점에서 한숨과 탄식으로 점철한 미치쓰나의 어머니와는 가는 길이 다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