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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케치북
워싱턴 어빙 지음, 박경서 옮김 / 문학수첩 / 2004년 11월
평점 :
절판
앞서 읽은 <슬리피 할로우의 전설>과 이 책을 읽으면 워싱턴 어빙의 <스케치북>에 수록된 주요 작품들은 대충 훑어보는 셈이다. 여기에는 모두 20편의 단편 및 에세이가 수록되어 있으며 절반가까이는 앞서 읽은 책과 중복된다. 여기서는 중복되지 않은 글들을 중심으로 간단히 언급한다.
<립 밴 윙클>과 <슬리피 할로우의 전설>은 중요 작품이니만치 약간 첨언한다. <립 밴 윙클>의 주인공이 돌아온 마을에서 아무도 자신을 알아보지 못하자 자신의 정체성을 의심하며 이렇게 외친다.
“모르겠어요!......나는 내 자신이 아니오. 나는 다른 사람이오. 저기 저 사람이 나요. 아니, 저 사람은 내 자리에 들어간 다른 사람이오......나는 내 이름이 무엇인지, 내가 누구인지 모르겠소.” (P.27)
가엾은 립. 하지만 자신의 정체성에 혼란을 겪는 사람이 어디 당신뿐이겠는가? 20년이 흐르지 않더라도 매분 매시마다 스스로를 확신하지 못하는 게 바로 오늘날의 자화상이다.
<슬리피 할로우의 전설>은 구성미가 탁월함을 새삼 깨닫는다. 슬리피 할로우에 대한 소개 후 이커보드에 대한 소개가 역시 이어지고 카트리나를 향한 이커보드의 장밋빛 몽상이 시작된다. 저녁파티에 가는 길의 행복한 심경은 돌아올 때 불행하고 불안한 심정과 대비를 이룬다. 목 없는 기사와의 대치 후 이커보드의 행방불명은 초반과 맞물려 전설 하나를 추가한다.
어빙은 자신의 방랑벽을 고백한다. 그는 낯선 장소와 인물을 관찰하는 것을 좋아하였지만, 단순한 엑조티시즘 차원이 아니다. 그는 아름다운 자연 풍광보다는 신생 미국에는 없는 오래된 역사적, 문화적 자취와 체취를 맡고 싶어 했다. 유물과 유적에 결부된 수백 년 동안 전해진 반쯤은 역사이고 절반은 전설과 설화가 되어버린 옛사람들의 흔적. 기원을 알 수 없는 오랜 옛적부터 내려온 소박하고 예스러운 관습과 풍습 등. 그것은 한편으로는 시적이고 낭만적인 취향의 반영인 동시에 또한 일천한 미국인들의 정신 체계에서 결여된 영역이며, 일종의 문화적 콤플렉스에 해당하는 것이라고 하겠다.
작가가 영국 체류 시 런던과 같은 대도시를 피하고 올드 타운이나 또는 시골에 시선을 돌리는 것은 당연하다. 시골에서는 아직 근대화와 도시화에 물들지 않은 영국인의 전통적 정서를 찾아볼 수 있다. 이 점은 세계 어디나 공통적인 사례다. 영국인은 전원생활을 더욱 선호한다고 한다.
“다른 나라의 목가적 작가들은 자연을 이따금 방문해 자연의 일반적 매력만 관조하지만, 영국의 시인들은 자연과 더불어 살며 즐긴다. 그들은 자연의 가장 내밀한 곳까지 파고들어 그것의 가장 세밀한 변덕까지 관찰한다.” (P.102)
작가는 영국 풍광의 가장 큰 매력은 고유한 미덕과 전원에 대한 애정을 계속 유지하는 그들의 도덕적 감정이며, 소박하고 아름다운 가정 풍경에서 드러나는 잔잔한 애정이 핵심 되는 모체라고 찬미한다.
어빙은 특히 시골 교회를 주목한다. 낯선 지역에 가면 가장 먼저 교회로 발걸음을 향하는 모습을 곳곳에서 볼 수 있다. <외진 마을에서 들은 슬픈 사랑에 걸음을 멈추고>, <저 세상의 사랑하는 남편과 아들 곁으로> 등.
“영국 사람들의 성격을 관찰하는 데 영국 시골 교회보다 더 좋은 곳은 없을 것이다.” (P.106, <시골 교회와 영국 신사의 풋풋한 교감>)
“나의 경우 시골 교회의 아름다운 자연의 고요함 속에서 내가 느끼는 것이 있다.” (P.149, <저 세상의 사랑하는 남편과 아들 곁으로>)
작가의 옛것에 대한 호기심은 런던 시내의 옛 수도원 유적에 대한 뜻밖의 탐사 장면을 잃어버린 미지의 문명의 사적을 발굴하는 듯한 과장된 드라마틱함으로 장식한다(<런던의 유물이 내는 신비의 소리들>). 리틀 브리튼에 대한 소개 문구는 어떠한가?
“리틀 브리튼은 런던의 심장부, 다시 말해 영국인 기질의 본거지로 알려져 있다. 이곳은 고풍스러운 사람들과 유행으로 가득 차 있던 과거의 전성기 시절처럼 지금도 런던의 일부를 구성하고 있다.” (P.190, <런던의 중심부 리틀 브리튼의 옛 영광들>)
여기에는 옛 놀이와 관습이 잘 지켜지고 있으며, 불가사의한 물건이나 명소들이 많으며, 현인들과 위인들이 많다. 약종상 스크림, 부유한 치즈장수, 선술집 주인 바그스탭 등. 두 개의 연례행사 성 바돌로매 장과 런던 시장 취임일은 어떻고.
“나는 이곳을 국민성이 황폐해지고 타락했을 때, 마치 종자벼처럼 저장되어 있던 강인한 영국인 기질의 원리가 되살아나 국민성을 부흥시킨 훌륭한 지역이라고 생각하니 기분이 참 좋았다. 나는 또한 이곳에 고루 퍼져 있는 일반적인 화합 정신에 감명을 받았다.” (P.198)
다소간의 과장과 유머와 예찬이 혼효된 작가의 리틀 브리튼 찬미는 곧이어 다가오는 변화와 몰락의 운기를 예감하기에 장엄한 회상미마저 풍긴다.
오래된 관습과 전통에 매혹되는 작가의 지적이며 정서적인 호기심은 브레이스브리지 가문의 저택에서 크리스마스를 보내면서 절정에 달한다. “옛날의 축제 풍습과 시골의 놀이”에 유달리 큰 관심을 지녔던 작가에게 크리스마스의 의미는 남다를 수밖에 없을 것이다. 기독교 문화 세계에서 가장 중요하고 커다란 축일이므로 축제의 규모와 화려함도 단연 으뜸일 테니까.
“하지만 모든 옛 축제 중에서 크리스마스야말로 가장 강렬하고 가장 가슴이 뛰는 연상을 불러일으킨다. 그것은 엄숙하고 신성한 느낌을 주는데, 흥겨움에 섞여 우리의 정신을 신성하고 고귀한 즐거움의 상태까지 끌어올려 준다.” (P.220, <옛 크리스마스는 사라진 것일까?>)
근대화에 따라 예부터의 진심어린 축제 관습이 소멸되는 현상을 관찰하며 작자는 탄식을 금할 수 없다. 따라서 즐거움과 흥분이 가족적인 감정과 더불어 여전한 행복한 풍경을 보면서 뭉클한 정서를 느끼게 된다.
작가는 놀라고 설레며 흥분되는 심정으로 브레이스브리지 가문에서 크리스마스이브와 축일 만찬을 함께 한다. 그것은 전혀 기대하지 못했던 영국 시골의 전통적 크리스마스 파티와 놀이 풍습을 생생하게 목도할 수 있는 자리였으니 작가의 심경이 어떠했을지 짐작 가는 일이다. 한마디로 “진정한 옛 영국식”(P.255)으로 일컫기에 부족함이 없는 완벽한 올드 스타일의 문화라고 하겠다.
국외자의 시각으로는 낯설고 이색적이며 신기하면서도 흥미로운 노신사 가문의 관습과 문화를 지켜보는 재미가 제법 적지 않다. 훌륭한 전통을 보존하고 계승하는 보수주의의 참된 사례로 이해될 수 있는 반면 사회와 시대의 흐름을 역행하고 옛것에 집착하는 묵수주의적 전형으로 간주될 수도 있다. 작자 또한 인식하고 있다. 이것이 보편적이 될 수 없음을, 그렇기에 더욱 소중하고 애틋한 것이 아니겠는가.
“나는 이 덧없는 관습들이 급속히 사라져 가고 있는 지금 내가 현재 머물고 있는 이 집이 어쩌면 영국에서 이런 관습들이 철저히 지켜지고 있는 유일한 가정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P.283, <영국 노신사의 환대와 에피소드 3>)
어빙의 따뜻한 인간미는 유럽과 앵글로 색슨계 인종 만에 국한되지 않는다. 앞서 읽은 책의 <포카노켓의 필립>과 마찬가지로 여기-<정열과 평원을 빼앗긴 한 늙은 인디언의 고백>-에서도 아메리카 인디언의 불행한 운명을 동정한다. 인디언에 대한 백인들의 편견과 박해를 솔직 과감하게 비판하며, 피쿼트 족의 운명과 최후를 기술하면서 그들의 고귀함과 숭고함을 고양한다. 어빙의 예상과는 달리 인디언들은 멸종되지 않았다, 다행히도. 하지만 정열과 평원을 빼앗긴 인디언을 더 이상 인디언으로 부르는 게 옳지 않을지도 모른다.
어빙은 자신의 스케치북에 엉성하고 시시한 메모만 들어있을 걸 우려하고 양해를 구하지만, 실은 자그마하고 예쁘장한 보석들이 잔뜩 숨어있다. 게다가 각 소품들은 작가가 대충 쓱쓱 그린 게 아니라 크레용(crayon)으로 한 획 한 획 정성들여 그린 가작으로서 전체가 수미일관하는 교묘하고 정교한 짜임새로 엮여있어 가치를 더해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