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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함브라 1 ㅣ 기담문학 고딕총서 5
워싱턴 어빙 지음, 정지인 옮김 / 생각의나무 / 2007년 5월
평점 :
품절
이국적 지명과 ‘기담문학 고딕총서’ 성격으로 미루어 미스터리와 에로티시즘이 결합된 작품을 기대하며 책을 펼친다. 헛된 기대는 바로 저버림을 당하였지만 이야기는 흥미롭게 이어진다. 이 작품은 작가 워싱턴 어빙의 스페인 알함브라 체류기다. 잠시 머무르다 떠나는 주마간산의 여행기가 아니며, 낯설고 신기한 풍경과 인물, 문화를 소개하는 기행문과도 다르다.
작가가 알함브라에 관심을 가지게 된 연유는 스페인 주재 외교관이 된 계기가 크지만, 무엇보다도 작가 자신의 방랑벽 내지 모험벽이 주된 원인으로 작용하였을 것이다. 서두에 어빙은 알함브라를 방문하여 자리를 잡는 과정을 기술하고, 알함브라 궁전과 역사에 대한 개략적 소개와 인상을 적고 있다. 여기까지가 통상적 여행기에 부합하는 전부다. 이후로 어빙은 궁전에 머물고 주위를 산책하면서 만나는 에스파냐 사람들과 그들이 들려주는 이야기에 흠뻑 빠져든다. 그리고 알함브라의 진기한 매력을 독자들도 공유할 수 있기를 바란다.
기타 연주로도 널리 알려진 알함브라는 이베리아 반도의 마지막 이슬람 근거지인 그라나다 왕국의 왕궁이다. 15세기 말 기독교 세력의 수복 이후 잠시 궁전으로 사용되다가 어느덧 방치되어 쇠락한 상황이었던 듯하다. 오늘날 수많은 관광객들을 맞이하는 명소와는 전혀 다른 처지다. 어빙은 관리인의 배려로 궁전 안의 호젓한 홀에서 수 개월간 머물게 되는데, 이 점만 보더라도 당대에 유적에 대한 관심 및 관리가 매우 부실함을 짐작할 수 있다.
코마레스 탑, 린다락사 정원과 사자의 정원을 거닐면서 작가의 상념은 알함브라의 마지막 임금인 보압딜에게로 향한다. 그라나다 왕국의 마지막 임금, 이베리아를 영구히 기독교 세력에게 넘겨준 인물, 그에 대한 세인들의 평판은 왜곡과 악의가 증오와 결합하여 그를 희대의 폭군으로 간주하였다. 작자는 그것이 정당한 근거가 없음을 밝히고 있다. 보압딜은 쇠퇴하는 왕국을 지켜낼 영웅적 기개를 지니지 못한 평범한 인물이었을 따름이다.
이슬람 세력이 스페인을 점령한 지 거의 8백년, 그들은 이베리아를 알라 신이 지배하는 강토로 만들었고 무수한 세대를 거치면서 곳곳에 이슬람의 자취를 아로새겼다. 애초에 무어인들이 아프리카로 쫓겨났을 때 그것이 영원한 철수로 믿었던 이들은 별로 없었을 것이다. 잠시 사세 부득하여 후퇴한 것일 뿐 다시 힘을 회복하면 되찾으리라고 믿었다. 이베리아는 기독교인들에게도 무어인들에게도 모두 자신의 땅인 동시에 고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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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는 알함브라에 얽힌 전설에 주목한다. 사랑을 가로막는 종교, 사랑에 눈먼 이성, 사랑과 가족 간 갈등. 구구절절한 사연은 시대와 장소를 초월하여 동질적이다. 오랜 이교적 문화의 존재, 상당 기간 영토를 마주하고 대치하였던 역사, 정복이 완수된 지 3백년 남짓 경과한 시점, 해독할 수 없는 낯선 상징과 문자, 가난한 당대 서민들. 이런 요소들이 뒤섞여 알함브라는 마법에 걸린 채 모든 장소와 유적은 한층 신비스러운 전설과 설화를 품게 되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