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짓펜샤 잇쿠 작품 선집 - 근세일본의 대중소설가
짓펜샤 잇쿠 지음, 강지현 옮김 / 소명출판 / 2010년 5월
평점 :
<수록 작품>
1. 동해도 도보 여행기 1편
2. 동해도 도보 여행기 2편
3. 유곽의 의리
4. 잇쿠, 겨우 창작하다
5. 미남 대할인 판매
짓펜샤 잇쿠라는 이름은 몇 번 스쳐지나가며 들었던 적이 있었는데, 근대일본 문학작품을 읽어나가던 중 이즈미 교카의 소설을 통해서 언젠가는 펼쳐들어야지 생각하였다. 막상 망설인 연유는 흥미로움에 대한 기대감에 못지않은 이질성과 실망감의 우려로 인한 것이었다.
잇쿠는 전형적인 대중소설가다. 도쿠가와 막부 집권 후 사회적 안정과 경제적 번영은 서민 대중, 특히 상인 계층의 급성장을 불러왔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여기서 근세일본 문학이 활성화되는 계기가 되었다. 옮긴이는 잇쿠의 희작들을 처음 국내에 소개하면서 그의 다양한 작품세계를 조망할 수 있도록 골계소설, 화류소설, 그림소설에서 골고루 추려내고 있다.
<동해도 도보 여행기>는 그의 대표작이다. 일단 전체 8편 중에서 두 편만 수록하고 있어 아쉽기 그지없다. 동해도는 근대 일본지명 중 도쿄에서 교토까지 이르는 지역의 명칭이자 동서로 관통하는 주요 도로를 가리킨다. 두 주인공 야지로베와 기타하치는 도로를 따라 교토와 오사카를 구경하기 위하여 도보 여행길에 나선다. 이들의 여정은 도로의 역참을 따라 진행되고 여행 중 겪는 사건과 일화 위주로 서술되어 있다. 자연 풍경 등은 거의 다루지 않으며, 무사와 서민, 유녀 등 마주치는 인물들의 생활상을 사실적이면서도 해학적으로 묘사하는데 특색을 보여준다.
여기에서 잇쿠가 제공하는 웃음의 방식은 우스꽝스러운 상황 설정과 행동도 있지만, 대부분은 언어유희에 의존하고 있다. 일본어의 동음이의어와 연상어구 등 언어 자체의 기발한 재치를 통한 맛을 보여주고 있어, 일본어가 아닌 번역된 언어로는 재미를 알아차리기가 매우 어렵다. 내용과 상황을 보면 굉장히 해학적이어서 웃음보가 터질 지경이 되어야 마땅한데도 각주를 읽어야지 그렇군! 하고 의미가 이해되는 경우가 속출한다.
1편은 이러한 난점에다 작가의 독특한 스타일이 아직 정립되지 않아서 약간은 어수선하고 산만한 인상마저 들어서 조금은 실망스러울 수도 있다. 반면 2편부터는 잇쿠 특유의 골계와 해학적 장면, 상황, 행동, 어조 등이 본격적으로 등장하여 작품 몰입이 가능하다. 한창 작품의 맛을 느껴보려고 하는 찰나에 중단되는 점이 섭섭하다.
<유곽의 의리>는 화류소설 장르에 속한다. 샤레본은 유곽과 유녀를 중심적 소재로 삼는다. 근세일본의 독특한 유곽문화는 이런 장르마저 낳을 정도다. 이 작품의 문제적 인물은 이사부로다. 그에 대해 작가는 호의적인 인물평으로 시작하면서도 방탕아, 흑심 등의 표현으로 훗날 사건의 복선을 깔아놓는다. 이사부로는 오나미와 부부의 연을 맺었으면서도 유녀 하나조노와 관계를 맺는데. 그녀는 집안의 가난 때문에 유녀가 된 오나미의 언니이다. 이사부로는 여색에 대한 욕심으로 두 자매를 희롱하는 우를 범하게 된 것이다. 사실을 알게 된 하나조노는 인정과 의리에서 갈등을 겪는다. 이사부로와 헤어져야만 하는 게 마땅한 도리임을 알지만 그에 대한 애정을 끊을 수 없는 유녀의 심정. 후편을 기약하며 작가는 여기서 그친다.
<잇쿠, 겨우 창작하다>와 <미남 대할인 판매>는 그림소설로 분류된다. 역자에 따른 삽화와 문장이 혼연일체가 된 성인을 위한 그림소설책이라고 한다. 확실히 삽화와 번역문을 비교해 보면 큼지막한 삽화가 중심을 이루고 여기에 지문과 인물의 대화가 여백에 쓰여진 방식임을 알 수 있다.
<잇쿠, 겨우 창작하다>는 잇쿠 자신의 창작과정을 소재로 삼아 해학적 전개를 하고 있다. 인물의 행위와 내용 전개가 비현실적이고 황당하지만 거침없는 상상력을 보여주고 있어 판타지적 요소도 다분하다. 배를 째어보니 각등 파편이 들어있다든가, 배 북을 치는 모습, 지혜가 몸에서 가출하고 쥐어짜는 대목, 문수보살과 장군의 지혜를 얻으려다가 실패하고 원숭이의 잔꾀를 빌려 겨우 하찮은 글이나마 쓰게 되었다는 등등. 특히 지혜가 가출한 동안 위기를 타개하기 위하여 농담, 잡담, 동음이의어, 서문 등이 대화를 나누는 장면에서는 잇쿠 특유의 골계미가 드러난다.
<미남 대할인 판매>는 사이카쿠의 <호색일대남>을 연상시킨다. 타고난 미남자 엔지로는 연애편지를 폐지장수에게 넘길 정도로 여인네들에 둘러싸여 방탕한 나날을 보내지만, 어느덧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미모도 서서히 퇴색한다. 가진 것, 배운 것 없는 그는 점차 초조함을 느껴 적당한 아내를 골라 정착생활을 하려고 하지만, 유녀와 과부에게 속임을 당하고 기껏 야반도주했더니 여자가 뒤바뀌는 등 만사가 여의치 않다. 그러다가 부지런한 시골여자와 인연을 맺고 부뚜막신의 조언을 받아 훗날 부자가 된다.
작가가 엔지로의 일생을 보여주면서 독자에게 교훈적 의도를 부여한다고 생각되지 않는다. 독자는 미남자 엔지로의 호색적인 일화와 장면을 보면서 외설적 흥미와 해학적 재미를 동시에 느낀다. 엔지로를 차지하기 위한 여인들의 절구공이 싸움 대목, 엔지로를 사이에 둔 자매의 치열한 경쟁 장면, 우산 같이 쓰기 작전으로 여인을 유혹하려다 오히려 무전취식 신세가 된 엔지로의 일화 등을 보고 읽으면서 당대 대중은 킬링타임과 동시에 일종의 대리만족을 느꼈을 듯하다. 서민과 대중의 기대와 취향에 전적으로 부합하는 것, 이것이 소위 에도 희작의 정신이 아니었을까.
국내 최초로 소개되는 작가와 작품이니만치 독자 입장에서는 아무래도 생경하다. 충실한 작가와 작품 해제가 뒤따르면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터인데 간단한 역자 서문 밖에는 없다. 내용과 번역, 만듦새 등 여러모로 좋은 책이지만 독자에 대한 자그마한 배려가 아쉽게 느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