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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네자키 숲의 정사 ㅣ 일본명작총서 2
자카마쓰 몬자에몬 지음, 최관 옮김 / 고려대학교출판부 / 2007년 7월
평점 :
품절
지카마쓰 몬자에몬. 일본의 셰익스피어로 불리는 18세기 초 일본 근세 전기의 극작가. 그는 평생 조루리와 가부키 같은 무대상연용 작품을 많이 남겼다. 신주(心中)는 정사(情死)를 의미한다. 이루어지지 못하는 사랑에 절망한 연인의 동반자살. <로미오와 줄리엣>의 결말을 떠올리면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이 작품을 셰익스피어의 것에 비견하기도 한다. 본문 60쪽 정도의 짧은 분량이며, 권말에 원문을 수록하고 있다.
서민 대상의 인형극인 조루리로 쓰여진 만큼, 영국 작가와는 인물들의 사회적 신분이 다르다. 남자는 상점 종업원, 여자는 유녀(遊女)로 아무리 좋게 보아도 결코 사회적으로 우대받는 계층은 아니다. 상업이 활발히 전개되던 시대상을 반영하여 연인의 미래를 불행으로 만드는 사기 사건이 발생한다. 돈, 믿었던 이의 배신, 이것은 데릴사위 제안을 뿌리치고 사랑의 승리를 위해 나아가려던 도쿠베에게 치명타를 날린다.
일본 근세에서 유녀(遊女)의 지위는 이중적이다. 도덕적 가치 기준으로는 천시 받게 마련이지만, 사회적으로 공인되고 보편화되다 보니 실제적으로는 일개 직업의 하나로 당당히 간주되었다. 그렇더라도 인연과 기회만 주어지면 유곽을 떠나 평범한 여인네의 삶을 간구하는 희망을 버릴 수는 없었다. 오하쓰처럼 진실한 사랑을 찾은 경우라면야.
작품의 기본적 갈등구조는 의리와 인정의 상충이다. 도쿠베는 의리상 데릴사위가 되어 숙부의 가게를 물려받는 게 마땅하다. 어릴 때부터 보살펴주고 키워주다시피 한 은혜와 정해진 수순을 거부하는 순간 그는 의리를 저버린 셈이 되어 더 이상 숙부의 가게에 머물 수 없다. 인정(人情)은 남녀 간의 사랑이다. 의리를 끊고 인정을 선택했지만, 돈을 갚지 못하는 형편이 되고 오히려 죄를 뒤집어 쓸 지경에 놓이게 된 도쿠베. 의리도 인정도 불가능하게 된 순간, 그에게는 오직 하나의 길만이 가능하였던 것이다.
셰익스피어의 정사(情死)는 우발적 사건이었던 반면, 도쿠베와 오하쓰는 상호 동의에 따라 의식적으로 감행하였다. 두 사람은 현세에서는 맺어질 대안이 없음을 절감하고, 내세의 기약을 도모한다. 신주(心中)를 먼저 결심한 이는 의외로 오하쓰다. 툇마루 밑에서 오하쓰의 발을 통해 주고받는 그들의 무언의 대화는 실로 장엄한 비극미마저 느낄 수 있다.
“무슨 일이 있어도 도쿠베 님, 같이 죽어요! 저도 같이 죽을 거예요!”하고 발로 뜻을 전하니 툇마루 밑에서는 눈물을 흘리며 무릎을 끌어안고 애타게 운다. 여자도 본심이 드러나는 것을 감추기 어렵고, 서로 말은 못하지만 마음과 마음으로 주고받으며 남몰래 울고 또 울고 있다. ” (P.50)
사랑의 죽음, 죽음을 통한 사랑의 완성은 동서양의 문학과 예술에서 막론하고 마르지 않는 테마였다. 트리스탄과 이졸데, 펠레아스와 멜리장드 등은 표면상 비극으로 끝나지만 내면으로는 사랑의 불멸의 힘을 재확인하는 진군의 나팔 소리가 아니겠는가. 신주(心中)는 단순한 자살 행위를 초월한다. 불가항력의 사유로 이승에서 인연이 맺어지지 못하는 연인은 죽음의 시련과 경계를 넘어서 저승에서 부부로 영원한 결합이 가능하게 된다. 즉 신주는 내세의 결혼을 서약하는 행위인 것이다. 작중에서 도쿠베와 오하쓰를 지칭하는 호칭이 신주의 실행 직전에 돌연 달라지는 까닭이 여기에서 비롯한다.
극작품은 대개 극 상연과 분리하여 단독으로 읽으면 온전한 제 맛을 구현하는데 한계가 있기 마련이다. 무대에서 상연될 때 비로소 빛을 얻고 의미를 띠게 되는 대사나 행위, 배경 장치 등 때문이다. 이 작품을 조루리나 가부키로 실제 상연되는 장면을 보면 어떤 감흥을 느낄 수 있을지 궁금하다. 그럼에도 뛰어난 작품은 조건의 유·불리, 분량의 다소에 상관없이 어느 순간에도 자체의 생명력을 잃지 않는다, 바로 이 작품처럼.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이 발표된 후 청년들의 자살이 속출하였듯이 몬자에몬의 이 작품 또한 무수한 아류작과 아울러 신주를 양산하였다. 결국 당대인, 그리고 후대인들의 마음줄을 건드린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