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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색 매화 달력 - 학술명저번역총서 동양편 62
최관 옮김 / 소명출판 / 2005년 8월
평점 :
일본 근세문학의 전형적인 대중소설이다. 마치 한 편의 잘 짜여진 연극대본, 아니 드라마대본을 읽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TV 멜로드라마에서 시청자는 인물의 전형성과 구성의 상투성에 불만을 표출하지만 어느새 전개에 몰입하여 주인공을 따라 울고 웃기를 거듭한다. 더하여 어려움을 극복한 주인공의 장래는 사랑의 성취와 더불어 항상 해피엔딩이다.
연극 내지 드라마적 구성은 내용뿐만 아니라 형식에서도 두드러지는데, 전체 작품은 전 4편, 12권으로 이루어진다. 그리고 각 권은 2척으로 구성된다. 연극적 용어를 빌리면 권은 막에, 척은 장에 해당된다고 볼 수 있다. 작품은 인물간 대화로 전개되는데, 동시대의 연극 장르라고 할 수 있는 조루리의 영향이라는 평가다. 작품의 진행 동력으로서의 화자의 역할도 이색적이다. 작중 화자는 대개 작가로서 작중에 적극적으로 개입하여 독자와 직접적 대화를 모색하고 있다. 이 점에서 강담(講談)과 유사한데, 그 영향을 받았을 것으로 생각된다. 다소 차이는 있지만 우리네의 판소리와도 비슷한 면모가 있다고 하겠다.
<뜬구름>과 <금색야차> 등 일본 초기 근대문학 소설들을 읽다 보면 구성과 내용, 특히 정조 면에서 서구의 것과는 구별되는 독특한 맛을 느끼게 된다. 그동안은 작풍의 동질성과 시대적 속성의 공통 등에서 원인을 구했는데, 전통에 보다 뿌리를 두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변사로서의 화자의 역할, 명사구로 끝나는 문장 형태 등. 이 작품이 발표된 게 1832년이니 상기 작품들과는 약 40년 정도밖에 시대적 차이가 나지 않는다.
일본 근세문학의 여러 장르 중 이 작품은 ‘인정본(人情本)’으로 분류된다. 영웅과 무사들이 활약하지도 않으며, 괴담과 해학적 성격과도 거리가 있다. 남녀 간의 애정, 사람들 간의 인정과 세태, 당대 사회의 풍속을 주된 관심사로 삼고 있다. 여기에 유곽과 유녀가 작중 공간적 배경과 주요 인물들의 직업으로서 전면에 등장한다. 일본 근세 조닌문학의 독특성이 반영된 결과이며, 후에 히구치 이데요의 유명한 작품들에까지 연결된다.
전형적인 멜로드라마로서 주인공의 출생의 비밀, 남녀 주인공 간의 삼각관계, 주인공들의 역경과 시련이 점철되는 점은 현대와도 흡사하다. 아직 신분계급이 엄존하던 시절임은 그토록 당당하던 도베가 무사에게 바로 무릎 꿇고 절절 매는 장면을 통해서, 그리고 단지로가 무사 집안의 상속자로 일약 신분상승이 이루게 된다는 설정에서 확연히 드러난다.
오초와 요네하치는 단지로를 사이에 둔 연적의 관계다. 단지로와 오초, 단지로와 요네하치 커플은 저마다 상당한 사유를 지니는데, 사실상 정혼자와 현실적 부부와도 같은 설정이 그것이다. 요네하치는 게이샤이며, 오초도 단지로를 위해 게이샤가 된다는 공통점이 있다. 한 남성을 사이에 둔 처지이니만치 두 사람의 관계가 평온할 리 없다. 연적에 대한 서로간의 질투와 시기, 단지로에 대한 사랑의 갈구는 공통이다. 여기에 고노이토와 숨겨둔 애인, 도베와 여협 간의 사랑의 부가적 플롯으로 첨가되어 작중의 애정 분위기는 제법 훈훈하다. 주인공들이 내내 행복하다면 대부분이 여성인 시청자와 독자의 심금을 울릴 수 없다. 눈물샘을 자극하고 동정심을 불러일으킬 고난이 등장하여 주인공들을 괴롭혀야 한다. 처절하리만치 극단적인 고통으로. 이 악역을 여기에서는 유곽의 지배인 기헤와 한 통속인 마쓰베가 담당한다.
유곽을 배경으로 게이샤들이 등장하는 사랑 이야기를 하필 ‘인정본’이라는 명칭으로 불렀는지 궁금하다. 요네하치는 단지로에 대한 애정을 품고서 스스로 요시와라에서 쫓겨나 자유 게이샤가 되어 단지로를 구제하고 뒷바라지한다. 오초 또한 단지로를 구하기 위해 스스로 게이샤의 신분을 선택하고 후에는 유녀가 될 결심마저 품는다. 그러는 와중에도 단지로에 대한 일편단심은 유혹과 위협에도 변치 않는다. 요네하치를 돕는 유녀 고노이토의 인정과 숨겨둔 애인에 대한 헌신, 오초를 구하고 돌보는 여협 오요시. 쫓겨나는 고노이토에 대한 한 가닥 마음씀씀이를 보여주는 유곽 사람들. 여염집 여자들은 말할 것도 없고 신분상으로는 하층이라고 할 만한 유곽 사람들조차도 한구석에 진실한 정을 가지고 있다. 막부와 무사의 지배층의 엄격하고 권위적인 자세에 비하며 오히려 이들에게서 더욱 인간미를 느낄 수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스페인의 황금세기에 사회 밑바닥 인물을 주인공으로 내세운 피카레스크 소설이 등장한 것과도 무관하지 않다.
당대는 풍속에 대한 검열이 매우 강화되었다고 한다. 따라서 작자가 이를 피하기 위해 소설의 음란성 내지 풍속 저해에 대한 방어 문구를 반복적으로 삽입하고 있다. 이 작품은 비록 배경과 인물에서 시비가 될 수도 있지만, 오로지 정조와 절개를 지닌 여인들의 이야기로서 외설 자체를 목적으로 한 게 아니라 교훈성을 도모하고 있다는 것, 그래서 음란한 부녀자를 작중에 그리지 않았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장치에 불구하고 결국 막부의 처벌을 면하지 못했으니 딱할 따름이다.
TV 멜로드라마는 시청자의 눈과 귀를 집중시키는 매력이 있다. 이 작품도 시대적, 지역적, 문화적 간극에도 불구하고 독자에게 제법 읽는 재미를 안겨준다. 솔직히 책명만 보고는 읽을까말까 망설였다.
역자 서문에서와 같이, ‘춘색 매화’는 두 가지 뜻을 함의하고 있다. 엄동설한의 시련을 견디고 핀 여린 매화 한 줄기의 암향(暗香)은 오초, 요네하치, 오요시, 고노이토 등을 상징한다. ‘춘색’은 계절적으로 매화가 만개하는 봄철을 뜻하기도 하지만, ‘춘(春)’이라는 글자가 사춘기, 춘정, 매춘 등 성적 욕망을 나타내는 데 사용되기도 하는 것을 감안하면 유곽이라는 배경과도 연결된다.
여성 인물들에 비하면 남성 인물들, 특히 단지로는 뭇 여성들의 사랑을 받을만한 자격이 있는지 의문시된다. 작중 내에서 그는 시종일관 소극적이며 현상을 타개할만한 아무런 행동도 감행하지 못한다. 철저하게 요네하치와 오초 등의 도움에 생을 의존하는 무능력한 모습만 보일뿐이다. 게다가 두 여인들의 애정에도 불구하고 또 다른 유녀 아다키치와 정을 통한다. 혼자서만 끙끙 속앓이를 하다가 광기에 들리는 <뜬구름>의 인물, 여인의 배신에 스스로를 타락시키는 <금색야차>의 인물들과 상통하는 일본 근대의 소극적인 남성상이라고 하겠다.
책 만듦새는 전반적으로 탄탄하고 훌륭하다. 부가적 자료와 해제도 충실하다. 특히 약 30쪽에 가까운 앞부분의 컬러 도판은 당대 게이샤와 유녀들의 모습 및 복장, 생활 등을 엿볼 수 있어 매우 유익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