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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 끼호떼 2 - 기발한 기사 라 만차의 ㅣ 창비세계문학 4
미겔 데 세르반테스 지음, 민용태 옮김 / 창비 / 2012년 10월
평점 :
돈 키호테 1권을 읽은 후 별다른 재미와 감흥을 느끼지 못한 데 대하여 독자로서의 지적 능력 한계에 대한 고백과 아울러 혹시 번역상의 원인은 없는지 의구심을 토로한 적이 있다. 좋지 않은 느낌은 항상 적중하는 법. 제 2권을 읽으면서 감동은 아니더라도 상당한 재미를 느꼈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옮긴이는 번역 문투에서 고상함과 비속함을 대비하여 보여주고자 하는 고심이 역력하다. 돈키호테와 귀족들의 품위 있고 잘난 체하는 지적인 대목에서는 괜스레 현학적인 표현으로 분위기를 고조시킨다. 반면 산초와 서민들의 일상적 대화에서는 평민과 하인들의 어투답게 시골풍의 어수룩함마저 가미하여 속되지만 가식 없이 진솔한 어조를 그려낸다. 그것이 이 작품 특유의 이야기로서의 성격과 묘하게 일치하여 작품을 막힘없이 술술 흘러가게 하면서 독자들이 작품 속에서 길을 잃지 않도록 도와준다.
물론 다소간 논란의 여지도 존재한다. 독자들 이해 수준을 고려하여 당대 관직과 계급명을 그대로 사용하지 않고 ‘양반’이나 ‘선비’처럼 우리네 전통 용어로 대치시킨 점에 대해 불만을 가질 수 있다. 스페인 특유의 속담 표현처럼 제 맛을 도저히 살릴 수 없는 경우 유사한 우리말 속담으로 대치한 것도 엄격한 번역 비평가라면 마뜩찮을 수 있다. 세상에 완벽한 번역은 없다. 이 점을 인정한다면 그런대로 봐줄 수 있지 않을까.
제2부에서 돈키호테는 다양한 모험을 감행하는데, 특징적인 대목은 돈키호테가 공작의 성에서 머물기 전의 모험들을 별도로 한다면 공작의 성에서 머물면서 생긴 에피소드들, 산초가 총독으로 부임하여 겪게 되는 애환들이 주된 흐름을 이룬다. 여기에 돈키호테 아류작에 대한 작가의 불편한 심기와 비판이 끊임없이 독자의 주의를 환기시킨다.
흥미롭지 않은가? 돈키호테와 산초는 자신들의 모험 행각이 담긴 책이 대대적인 인기를 끌어 모든 이들이 자신들과 행적에 대해 알고 있음에 놀란다. 그들의 모험은 훗날의 역사가 아닌 당대의 실시간적 기록으로 남겨진 것이다. 더욱이 가짜 돈키호테 2권이 나와서 자신들의 인물과 행동이 왜곡되었음에 분노하고 허위성을 입증하기 위하여 그라나다로 향하던 여정을 바르셀로나로 변경하기까지 한다. 작가와 인물, 독자는 각자 고립된 존재가 아니라 상호간에 긴밀한 영향을 주고받는 밀접한 관계에 놓여 있다. 그런 면에서 포스트모던 적이라고 하겠다.
판타지 장르적 속성은 어떠한지? 특히 돈키호테의 몬떼시노스 동굴 체험은 단순히 돈키호테의 상상력이 창조해 낸 공상에 불과하다고 속단하기 어렵다. 신기한 동굴로 인근에 명성이 자자하다는 것은 자연경관 이외의 불가사의한 요소가 동굴에 존재한다는 의미로 이해된다. 따라서 때마침 돈키호테가 그 초자연적 현상을 목도하고 자신의 개인적 광기와 어울려 남다른 체험을 했을 것으로 생각하는 게 자연스럽다. 그런 면에서 판타지적 속성이 충분하다.
둘시네아가 마법으로 인해 농사꾼 여자로 변했다고 산초는 돈키호테를 속인다. 공작부인은 오히려 실제로 둘시네아는 마법에 걸렸고 산초가 속임을 당한 것이라고 속인다. 공작부인은 산초의 순박성과 순진성을 역이용한 것이다. 여기서 장자의 나비와도 유사한 근본적 의문이 제기된다. 공작부인의 논리는 진실과 허위 사이의 명확한 경계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둘시네아는 귀부인일 수도 있고 농사꾼 여자일 수도 있다. 마법에 걸린 인물은 둘시네아가 아니라 사실은 돈키호테 또는 산초일 수도 있다. 공작부인은 산초가 돈키호테에게 구사했듯이 거짓말로 속인 것이지만 모르는 사이에 오히려 진실을 말한 경우일 가능성을 배제할 수 있다. 그렇다면 속인 사람은 누구고 속임을 당한 사람을 누구란 말인가? 우리가 명확히 알고 있다는 진실의 기반이 확고하지 않고 이성이 오락가락할 수 있다면 공상이 실체가 되고 초자연이 일상으로 넘어올 수 있다면 그것이 판타지가 아니고 무엇일까?
“싼초께서도 팔짝팔짝 뛰던 그 여자가 엘 또보소의 둘시네아였고 둘시네아 그 사람이며 무엇보다 확실하게 마법에 걸려 있다는 걸 믿으세요. 그러면 생각지도 않은 순간에 우리는 그녀의 원래 모습을 보게 될 것이고, 그리되면 그제야 싼초도 자기가 속아 살았구나 하는 걸 깨닫게 될 거예요.” (P.408)
<미쳐야 산다>라는 경영 관련 처세술 책이 인기를 끈 적이 있다. 책소개를 보면 신념을 가지고 열정으로 매진하면 높은 성과를 거둘 수 있다는 내용이란다. <미쳐야 미친다>라는 인문학 책도 있다. 조선시대 선비들의 알려지지 않았던 매니아적 열정과 광기의 일화를 알려주고 이다. 예나 지금이나 미쳤다는 의미의 광기는 이중적 의미를 지닌다. 의학적으로 이성을 잃었다는 병리학적 증상과 아울러 좋아하는 것에 전적으로 집중하여 이외에는 일체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 마음의 상태.
돈키호테는 단순히 미친 늙은이가 아니다. 그는 호기심이 많고 항상 새로운 사실들을 알고 싶은 욕망에 시달리는(P.301) 인물이며 기사 모험담에 푹 빠진 매니아다. 그의 의상과 행동은 이른바 코스프레가 아니겠는가. 이미 1권에서도 수차 나왔지만 2권에서도 돈키호테의 역사와 고전, 문학에 대한 방대한 지식(작가의 자기과시?)과 방랑기사와 관련되지 않은 사항에 대한 사려 깊은 이성적 사고는 탄복할 정도다. 16장에서 돈키호테가 푸른 외투의 신사에게 들려주는 교육론은 오늘날에도 유효하다. 요즘 부모는 자녀가 하고 싶은 공부를 허용하기 보다는 자신들이 아이에게 바라는 공부를 요구하고 있는 형편이다. 학교와 학원을 뺑뺑이 돌려야 세상에 뒤처지지 않을 것이라는 논리로 자기 위안을 삼는다. 하기야 교육시스템 자체가 이를 조장하고 있는 판국이다.
그나저나 돈키호테가 산초를 데리고 방랑하는 목적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광기에 휩싸여 기사 복장을 하고 중세의 방랑기사처럼 모험을 겪고자 하는 것이라면 잠시 동안이면 충분하다. 하물며 돈키호테는 수차에 걸친 고난과 고초를 겪으면서도 굴하지 않고 굳세게 여정을 이어나간다. 단순한 광기로는 설명이 부족하다.
“오직 내가 애써서 세상에 이해시키고자 하는 건 사람들이 방랑기사가 성행했을 때의 그 행복한 시절을 부활시키지 못하는 그 잘못을 지적하려고 하는 것이오. 그러나 타락한 우리 시대는 그런 행복을 누릴 만한 자격이 없지요.” (P.44)
돈키호테도 알고 있다. 자신의 행위가 남들 눈에 기이하게 비칠 것이라는 점을. 그럼에도 그는 중단할 수 없다. 스페인의 황금세기라고 칭해질 정도로 왕정과 귀족사회가 번성을 누리던 시절, 그러나 도덕적 타락은 바닥없이 추락하고 있다. 중세의 방랑기사는 정의와 자비의 실현을 위해 스스로의 고초를 자초하는 상징적 인물로 전형화 된다. 돈키호테는 선인들의 험난한 길을 따라가기로 결심한 것이다. 난세에는 세상을 질타하는 예언자나 도인들이 불현 듯 출현한 역사적 기록들이 남아 있다.
2권에서 이채로운 점은 돈키호테와 산초를 자신의 성에 머무르게 하는 공작 부부이다. 돈키호테 모험담의 열렬한 독자이기도 한 그들의 돈키호테와 산초에 대한 태도는 별로 기분 좋지 않다. 그들은 마치 장난감이나 애완동물을 다루고 좋아하듯이 돈키호테 일행을 대우한다. 기상천외한 즐거움을 얻기 위해 지속적으로 돈키호테를 속이고 광기를 부추기기 위해 온갖 노력을 다 기울인다. 더구나 산초에게 저지른 가혹한 장난에 대해서도 후회의 상념 없이 적잖은 즐거움을 맛보았을 뿐이다. 이것은 그들이 막강한 권력과 재력을 가졌기에 가능한 것으로서 이른바 가진 자들의 무분별하고 비도덕적인 처사가 당대에 얼마나 널리 퍼져있으며 무감각하게 받아들여졌는지를 역설적으로 폭로한다.
이 점은 산초가 총독이 되어 섬을 통치하는 에피소드와 대조되어 두드러진다. 순박하고 어수룩한 산초의 껍데기는 가라! 왕정이나 귀족정이 아닌 평민들의 정치체제도 충분히 올바른 자생력을 가지고 있음을 우리의 ‘위대한 산초’(45장의 표제에 나오듯이)는 보여준다. 산초가 생각하는 바람직한 통치관을 들어보자.
“좋은 통치자는 다리를 부러뜨려 집에 둬야지요. 일이 있는 사람들이 안타깝게 통치자를 찾는데 자기는 산에서 한가하게 놀고나 있으면 꼴좋겠수다! 그렇게 되면 정부 꼴이 망해가는 거지요! 나리, 제가 진심으로 말씀드리는데, 사냥과 심심풀이 오락은 통치자들에게 맞는다기보다는 노라리들에게 맞는 거지요.” (P.417)
“우리 다 함께 삽시다, 그리고 평화롭게 함께 어울려 먹고삽시다요......난 법을 침범하지도, 뇌물을 받지도 않고 이 섬을 통치할 것이며, 모든 사람이 눈을 똑바로 뜨고 자기 일만 잘하게 하도록 하리다.” (P.575)
돈키호테가 산초에게 들려주는 충고의 고귀함도 빛난다.
“싼초 이 사람아, 자네 혈통이 그다지 보잘것없음을 떳떳이 내보이고, 자네가 농부 출신이라고 말하는 걸 부끄럽게 생각하지 말게. 자네가 부끄러워하지 않으면 아무도 자네를 함부로 모독하지 않을 걸세. 죄 많은 고관대작보다 덕 많은 보통 사람이 되는 걸 더욱 자랑으로 여기게......자네가 늘 덕을 무기로 삼고, 덕있는 행동을 하는 걸 좋아하면 왕이나 영주의 자손들이 가진 지체를 부러워할 필요도 없을 걸세. 왜냐하면 피는 이어받지만 덕은 습득해야 하고 핏줄이 가치가 없을 때도 덕은 스스로 혼자서도 빛나니까.” (P.497)
“상대방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한도 안에서 자네가 할 수 있는 모든 역량을 다해 그를 자비롭고 관대한 마음으로 대해주게. 왜냐하면 하느님께서 주신 속성이나 덕은 모두 다 같지만 우리 생각에는 정의로운 마음보다 자비로운 마음이 훨씬 더 낫고 빛이 나는 것 같아.” (P.499)
산초가 짧은 재임기간 동안에 훌륭한 통치를 위해 제정한 법령을 살펴보면 당대인들이 통치자에게 바라는 올바르지만 시행되지 않았던 조치들이 무엇인지를 알 수 있다. 공작 부부와 수하들은 산초를 장난거리로 삼으려고 온갖 장치와 전쟁 소동마저 일으켰지만, 독자들의 눈에는 산초의 인간적 모습에 연민과 공감을 느낄 뿐이다. 후세에 영원토록 웃음거리가 된 것은 기실 그들 자신이었다. 순진하고 순박한 산초가 이러한 비인간적 행태가 횡행하는 섬을 떠나는 것은 당연한 귀결이다.
거울의 기사이자 하얀 달의 기사인 학사 싼손 까라스꼬에게 패배하여 돈키호테는 고향으로 돌아간다. 그로서는 고향사람에 대한 연민과 동정으로 제정신을 찾게 해주어야겠다는 신념, 그리고 고향의 명성을 떨어뜨리는 데 대한 모종의 조치에 대한 의무감으로서 당연히 해야 할 일이었다. 반면 돈키호테 자신과 그의 모험담을 좋아하는 이들에게 미치는 영향은 응당 같지 않다.
“어이구, 나리, 세상에서 가장 재미있는 미치광이 한분의 정신을 제대로 되돌아오게 하기 위해 세상 사람에게 끼친 피해를 하느님께서 용서해주시길 바랍니다! 나리, 돈 끼호떼가 그의 허튼짓으로 우리 모두를 재미있게 한 그 즐거움에 비하면 그가 정신이 말짱해져서 얻는 이득은 그에 못 미칠 거라는 것을 모르세요?” (P.769)
세인들에게 돈키호테의 존재는 지칠 줄 모르는 소소한 즐거움을 안겨주는 재미거리였다. 그들은 돈키호테라는 인간 자체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다. 그저 개그콘서트를 쳐다보며 낄낄거리듯 돈키호테도 단지 웃음을 제공하는 장치로 인식한다.
돈키호테의 삶의 원동력은 방랑기사 생활에 있다. 그에게 더 이상 방랑하지 말라는 것은 생명의 불꽃을 줄이라는 말과 동의어다. 학사 까라스꼬 덕택에 그는 고향으로 돌아와 제정신을 차렸지만 꿈과 열정을 상실한 늙은 돈키호테에게 남은 것은 오직 죽음뿐이다.
“미쳐서 살고 정신 들어 죽다.” (P.857)
임종의 순간에 그는 행복하였을지 궁금하다. 거인을 향해 거침없이 돌진하는 기사의 환상이 망막 저 멀리 투영되지는 않았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