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내 심장을 쏴라 - 2009년 제5회 세계문학상 수상작
정유정 지음 / 은행나무 / 2009년 5월
평점 :
품절
작가는 전작의 서문에 스릴러 또는 모험담을 쓰고 싶은 소망을 피력했다. 이후 작가의 여정을 보면 소망을 충실히 따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 소설은 화자인 이수명의 삶과 정신의 원점을 찾기 위한 과정, 그리고 류승민이 빼앗긴 삶의 의미를 되찾기 위한 분투를 통쾌하고 치열하게 그려나간다. 정신병원이라는 사회적으로 격리된 공간으로부터.
정신병원은 신체의 훼손을 치료하는 일반 병원과는 기원과 목적에서 차이를 보인다. 미셸 푸코가 지적하였듯이 언명된 목적은 정신병자들을 보호하고 치료하는 것이지만 그들을 사회로부터 격리하여 정상인의 안전을 확보하는 묵언적 목적도 중시한다. 사람들은 신체적 장애인에 대해서는 동정과 위로를 아끼지 않는 반면, 정신적 장애인에 대해서는 공포와 멸시의 감정을 품는다. 이른바 미쳤다는 의미로서의 광기는 정상과 경계가 명확하지 않다. 누구나 광기적 요소는 지닌다. 사회적, 문화적 기준에서 한 곳에서는 정상으로 인정받는 경우가 다른 곳에서는 광기로 판정받기도 한다. 정상인이지만 다수가 광인이라고 지칭해버리면 졸지에 광인이 되어버린다. 정상인인 내가 광인이 아님을 주장하고 입증 받는 길은 요원하다. 갇혀서 서서히 미쳐가게 된다. 이런 점에서 정신병원이 자칫 악용되는 사례로 쓰일지 모른다는 우려는 전혀 근거 없는 게 아니다.
‘운명이 내 삶을 침몰시킬 때, 나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라는 질문에서 소설이 시작되었다고 작가는 밝히고 있다. 화자인 수명은 정신병을 앓고 있는 어머니를 실제로 죽인 것은 아버지였다고 굳게 믿는다. 어머니가 죽게 된 그날의 기억은 그에게 상기조차 해서되는 안 될 금단의 영역이다. 그는 아버지로부터, 세상으로부터 도망친다. 그의 내면에는 낯선 목소리가 공생한다. 승민은 재벌가의 숨겨진 사생아 신분이다. 억눌린 자아는 그에게 방화의 통쾌한 기분을 유혹한다. 부친의 사망과 귀국은 그의 여생의 방향을 송두리째 흔들어 놓았다.
수리 희망병원에서 환자들은 절대적 을의 처지에 놓인다. 병원의 규칙과 치료에 순응하지 않으면 벌점과 무력제재, 독방이 기다린다. 최종적으로는 끔찍한 전기 요법이 대기하고 있다. 대개의 환자는 보호자의 도움을 구할 수 없다. 보호자는 병원의 치료라는 명목 하에 그들을 외면하고 안도한다. 순응과 자포자기의 반복 속에서 서서히 병원에서의 생활에 익숙해진다. 그들이 사는 사회로의 복귀라는 무리한 꿈을 꾸지 않는다면. 그 꿈을 꾸는 환자는 극소수에 불과하지만 그네들을 통해 우리는 병원에서조차 삶의 희로애락이 끊어지지 않음을 알게 된다.
“이렇게 사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 인생이 별건가. 이래저래 살다 가는 거지. 경보 선수의 끝없는 경주도 그런 관점에서 이해했다. 견디고 잊어야 할 일이 나보다 더 많은 사람이라고.” (P.181)
“목젖이 묵직해져 왔다. 서글픈 것을 본 탓이리라. 그가 책장과 함께 붙인 것, 다리미로 눌러 없앤 것. 그건 알코올 중독자이자 노숙자였던 한 남자의 희망과 절망이었다.” (P.167)
소설의 초반은 화자 수명 자신의 이야기가 주를 이룬다. 이윽고 기묘한 동료인 승민의 모습과 행동을 관찰하는 단계로 이어지고, 승민의 눈빛을 보게 되는 순간 수명은 승민에게로 몰입하고 진짜로 짝꿍이 되고 만다. 성격 면에서 양자는 극단적 대조를 보인다. 수명이 순음(純陰)이라면, 승민은 순양(純陽)의 기운이라고 할 정도로. ‘어슬렁거리는 표범’을 연상시킬 정도로 위험한 냄새를 풍기는 승민의 영향으로 ‘인생의 유령’이었던 수명은 서서히 변화하게 된다.
정신병원을 배경으로 하고, 정신병자를 주인공으로 내세운 만큼 작품의 분위기와 전개가 어둡고 삭막하고 황량하기 그지없을 것으로 예상된다. 하지만 앞뒤 표지의 삽화를 보면 달리기를 하고 재주를 넘는 듯한 인물들의 동작이 코믹하다. 전작에서 유머와 해학적 요소의 의도적 사용을 빈번하게 구사함으로써 작품 전개상 과도한 진지함과 무게를 경감시키려고 노력했던 작가는 여기서도 마찬가지를 시도하고 있다. 비일상적인 인물들, 특히 환자들의 행동을 통한 희극적 성격과 화자인 수명의 입을 통한 언어적 해학과 유희가 그러하다. 다만 전작과는 달리 조금 더 절제하는 모습을 엿볼 수 있다.
“‘안 돼’와 ‘안 해’ 사이의 괴리가 한 인간의 성미를 어떤 식으로 건드리는가에 대해 설명하라면, 열 시간짜리 강의도 할 수 있다. 그냥 한마디로 하라고? 열 받았다.” (P.165)
작품의 결말은 파격적일 정도로 대조적이다. 수명은 비로소 세상에 나설 각오를 다진다. 그는 그날의 기억을 분명히 떠올린다. 실은 무의식적 내면에 어머니의 죽음을 바라는 소망이 잠재되었음을, 그래서 어머니의 자살을 유발한 당사자는 바로 자신이었음을. 승민은 죽음은 선택한다. 시력을 상실하게 되는 그에게 마지막 비행은 삶인 동시에 죽음이다. 두 사람에게 삶과 죽음은 이중적 의미를 지닌다. 죽음과도 같은 삶, 삶에 이르는 죽음의 길.
작가의 최신작을 제외한 주요 장편 세 편을 모두 읽으면서 새삼 유사성과 차이성을 발견하게 되었다. 먼저 작가가 언급한 운명과 삶에 대한 질문은 이 작품에서 끝나지 않는다. 작가는 다시 후작에서 이를 더욱 처절하고 철저하게 파헤친다(‘운명이 난데없이 변화구를 던진 밤’). 아픈 속살을 고통스러울 정도로 헤집으면서. 삶과 운명의 치열한 맞짱이 심화되고 응축될수록 유머와 해학적 요소는 감소하고 있다. 이 작품은 그나마 나은 편이다. 후작에서는 유머러스한 분위기는 눈을 씻어도 찾아보기 어렵다.
배경을 살펴보면, 작가의 이력과도 일정부분 관련된 사항인데 주요 등장인물은 정신 병력을 지니고 있다. 전작의 할아버지와 후작의 야구선수 출신 아버지가 그러하다. 이 작품은 말할 나위도 없고. 작가가 유독 정신병 환자를 중시하는 연유가 궁금하다. 이성적으로 판단할 수 없는 엉뚱하고 난데없는 언행을 자연스럽게 끌어내기 위함일까? 인간 내면에 잠재되고 은폐된 비이성과 야성의 본능적 몸부림을 풀어헤치기 위한 치밀한 장치일까?
기후와 날씨의 작용도 만만치 않다. 중요한 사건이 일어나는 때는 언제나 어둡고 천둥과 번개가 난무한다. 안개조차 자욱하여 한치 앞을 내다보기도 어려울 정도다. 스릴러와 공포 영화에서 분위기를 돋우기에는 최고의 장면이 아닐 수 없다. 광포한 일기는 흉악한 범죄를 은폐하며 원인모를 두려움과 공포를 독자와 인물들이 품도록 한다.
“밤이 깊어지자 마침내 하늘이 포문을 열었다. 빗줄기가 억센 힘으로 유리창을 들이받기 시작했다. 흡사 물빛 뱀들이 날아와 부딪치는 것 같았다. 천둥 번개는 간단없이 번쩍이고 으르렁댔다. 바람이 숲을 울렸다. 방문과 창문이 엇박자로 뒤흔들렸다.” (P.201)
수명과 승민이 그렇게 기를 쓰고 병원을 탈출하려고 시도할 수밖에 없게 한 불가피성을 생각해 본다. 승민은 첫 단독 비행을 하게 되었을 때의 심경을 이렇게 표현한다.
“너절하던 내 인생이 한순간에 눈부셔지더라.” (P.237)
우리는 누구나 눈부신 인생을 꿈꾼다. 스스로 한없이 비참해지기를 바라는 사람은 없다. 현실적 장애요인과 심리적 나약함과 주저는 우리를 대지에 가두어 놓는다. 나약하고 무기력한 현대인은 수명과 다를 바 없다.
“가끔 궁금했어. 진짜 네가 누군지. 숨는 놈 말고, 견디는 놈 말고, 네 인생을 상대하는 놈. 있기는 하냐? (P.240)
“세상에서 도망치는 병이야. 자기한테서도 도망치는 병이고. 그렇지?” (P.291)
승민이 수명에게 말하고 보여주는 행동은 체제와 현실에 나약하게 순응하고 온순하게 길들여져 참다운 본성과 삶에 대한 열정을 잃어버린 우리 자신들을 향한 외침이자 일침이다.
“자신을 조준하고 있는 세상의 총구들을 향해 외치고 있었다. 내 심장을 쏘라고. 그래야만 나를 가둘 수 있을 것이라고.” (P.264)
“나는 팔을 벌렸다. 총구를 향해 가슴을 열었다. 그리고 언덕 아래로 질주하기 시작했다. 나야. 내 인생을 상대하러 나선 놈, 바로 나.” (P.338)
이것이 두 명의 정신병자가 독자에게 던지는 메시지가 아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