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이를 위한 오래된 미래
헬레나 노르베리-호지 원작자, 박희은 지은이, 원유미 그림 / 중앙books(중앙북스) / 2008년 10월
평점 :
품절


<오래된 미래>를 읽은 후 같은 저자의 어린이용 책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내가 느낀 감정의 울림과 파장을 아이도 같이 느끼기를 바랬다. 한편으로 궁금과 우려가 교차되기도 하였다. 이러한 저작을 어린이용으로 변용하기는 쉽지 않을 텐데. 일단 노르베리 호지가 직접 어린이용으로 쓴 책은 아니라는 점은 분명하다. 원작과는 체제와 구성, 형식 등에서 상당한 차이점이 보였다. 출판사 측에서 원작의 이름을 빌려 어린이용으로 책을 내고 저자에게 인정받은 게 아닐까 싶다. 즉 저자의 직접적인 손길과 호흡을 원해서는 안 된다는 뜻이다.

 

반쯤은 실망한 채로 펼쳐든 책은 첫 부분에서 당혹의 연속이다. 노르베리 호지의 라다크 체험기는 아동용 소설 형식으로 탈바꿈하였다. 주인공의 이름은 헬레나, 나이는 열두 살. 헬레나는 아빠와 이혼하고 라다크에 푹 빠져버린 엄마 제니를 만나 따지려고 스웨덴에서 라다크 행을 감행한다. 헬레나는 소남과 데스키트 가족과 함께 생활하면서 동갑내기인 돌마와 친구가 된다...잠깐만, 내가 고대했던 원작은 어디로 가버렸는가?

 

아이들에게 원작의 폭넓으면서도 깊이 있는 지식과 사고를 모두 이해시키기란 거의 불가능하다. 저자가 주장하는 핵심적 내용만이라도 깨닫고 자기 것으로 할 수 있다면 대성공이다. 중요한 것은 절대 따분하고 지루해서는 안 된다는 점이다. 주인공으로 독자들과 비슷한 또래를 설정하고 재밌는 이야기 형식을 채택하여 나 또는 우리와 멀리 떨어진 현실이 아니라는 점을 각인시킬 필요도 있다. 앞선 실망은 원작을 읽어본 소위 성인의 시각에서 비롯된 것이다. <오래된 미래>가 무슨 책인지, 저자가 누군지 전혀 알지 못하는 어린이들로서는 원작에 얽매일 필요가 없는 법이다. 오직 자신이 읽는 책이 어떤 내용인지 충분히 알며, 재밌게 가슴에 다가올 수 있다면 그것으로 대성공이리라.

 

이런 관점에서 내용을 찬찬히 훑어가면 제법 충실하게 원작의 사상과 주장을 담고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가축의 똥을 말려서 땔감으로 쓰고, 가장 심한 욕이 숀 찬’(화를 잘 내는 사람)이라는 것 하며, 무엇보다 사람들 상호간의 배려와 양보의 미덕이 그러하다. 이웃의 보리밭에 들어가서 보리를 망친 쪼를 이웃사람이 다치게 한 경우의 고바의 판결, 방을 추가로 빌리기 위해서는 원래 묵고 있던 집인 데스키트의 동의를 받아야 하는 점 등.

 

우린, 모두 함께 살잖아. 그게 다야. 서로 조금만 양보하면 다 행복할 수 있으니까.” (P.63)

 

라다크 사람들에겐 다른 사람들의 마음이 상하지 않도록 배려하는 게 무엇보다 중요한 일이거든.” (P.66)

 

전통 점성가인 온포가 헬레나와 돌마를 보고 라다크 하늘의 두 개의 별이라고 알려주는 대목은 유치하지 않고 오히려 가슴 찡하게 다가온다.

 

원작과 마찬가지로 소남네 가족은 라다크의 중심지인 레로 이사를 간다. 소남은 가족을 위하여 많은 돈을 벌고 싶어 한다. 그의 소망은 가족을 행복하게 만드는 데 있다. 시골인 헤미스 마을에서는 돈을 벌 기회가 거의 없다. 경제개발 초기에 수많은 농어촌 사람들이 서울로, 서울로 몰려들던 현상을 복기하면 충분하다. 그네들은 어떻게든 서울로 상경하여 서울특별시민으로 편입하고 싶어 하였다. 무수한 판잣집과 달동네가 그렇게 하여 만들어졌던 것이다. 레의 뒷골목처럼, 열악하고 꾀죄죄한 처지를 무릅쓰고. 레의 학교에서는 전통을 부정하고 서구식 문물에 절대적 우위를 둔다. 그것이 뒤쳐진 라다크를 개발시키기 위한 비법으로 알고 있다. 농약은 아무런 위험과 사용주의 안내도 없이 무작위로 남용하여 사람과 경작지를 오염시키며, 생활의 주체성을 빼앗긴 여성들은 소극적이고 무능력한 존재로 퇴락하게 된다. 이 모든 게 소녀 헬레나의 눈에는 이상하게 보일 뿐이다. 라다크 사람들이 닮고 싶어 하는 서구 문명과 문화는 완벽하지 않으며 무수한 사회적, 심리적 문제점을 양산하고 있다. 라다크 사람들이 자기들의 고유의 미덕과 문화를 존중하고 유지하면 기쁘겠다.

 

라다크 프로젝트는 에끄니끄 박사의 마법 쇼를 통해 데스키트와 소남을 변모시키고 신축 호텔을 라다크 전통식으로 짓기로 한다. 호텔 이름이 헬로 라다크에서 줄레 라다크로 바뀌는 점도 시사적이다. 라다크 사람들은 서서히 자신들의 장점과 미덕을 깨닫게 된다. 많은 서구인들이 라다크를 여행하고 부러워하는 이유는 자신들에게 없는 것이 그들에게 있음을 알고 있음에서이다.

 

라다크 사람들은 마음 깊은 곳에 행복이 있다는 걸 알기 때문입니다.” (P.199)

 

그것은 돌마가 말한 대로이다. 야크 털신 대신 운동화를 부러워하고, 할머니가 구워주시는 빵보다 레의 빵집에서 파는 빵이 더 맛있다고 여기지 않게 된다면, 라다크 전통 옷을 입고 라다크 노래를 부르는 것을 창피하게 여기지 않게 된다면 라다크는 더욱 건강하고 행복해질 것이다.

 

우리는 라다크보다 훨씬 멀리 지나쳤다. 서구식 주택과 아파트가 익숙해졌고 한복은 평생 특별한 날에만 어쩌다 입는 의상으로 전락하고 청바지와 운동화, 양복과 구두가 옷장과 신발장에 가득하다. 안락과 편리를 무한정 추구하다 보니 정작 귀하고 소중한 것이 거의 소멸되어 버렸다. 무엇보다 무서운 점은 소멸되고 있다는 사실조차도 인식 못하는 데 있다. 그것이 우리네 현실이다. 이런 점에서 라다크는 오히려 운이 좋은 사례이다.

 

선입견을 담은 실망에서 출발하였지만, 어린이들에게 매우 좋은 책임을 인정해야겠다. 흥미를 잃지 않도록 노력하면서도 핵심적 주장을 빼놓지 않고 담아내는 데 성공하였다. 비단 어린이뿐만 아니라 원작을 읽어보지 못했거나 재미를 느끼지 못한 성인 독자들에게도 충분히 권할만한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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