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카쿠가 남긴 선물 - 사이카쿠의 마지막 작품
이하라 사이카쿠 지음, 김임숙 옮김 / 제이앤씨 / 201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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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근세의 대표적인 우키요조시(浮世草紙) 작가인 이하라 사이카쿠의 유작으로 <호색일대남>과 같은 유의 호색물이다.

 

일본 근세는 독특한 시대적 문화를 낳았다. 상업의 발달로 경제적 부를 축적한 상인 계급이지만 정치적으로는 피지배층에 속하여 자신들의 점증하는 활력을 분출할 여지를 갖지 못하였다. 정치적으로 평온한 시기에 그들은 사회적으로 공인되고 암암리에 장려된 유곽 문화에 빠져들고 이것은 당대의 특징적인 문화로 자리 잡았으니 유곽 출입은 더 이상 숨기고 부끄러운 일이 아니었다. 유곽에서 호탕하고 질펀하게 놀면서 돈을 방탕하게 흩뿌리는 사람을 다이진(大尽)이라고 부르며 스이(), 즉 풍류를 아는 멋쟁이로 칭송받을 정도였다. 어디 여색뿐이겠는가 당대는 남색도 보편화되다시피 한 사회였으니.

 

서문에서 작가는 이렇게 말한다.

 

세상의 거짓이 한데 모여 스이라는 아름다운 놀이가 되었다.” (P.8)

 

스이는 거짓이다. 화류계에서는 손님이나 유녀나 아게야의 사람들 모두가 거짓을 말하고 행동한다. 모두가 거짓임을 알면서 모르는 체, 진심인 체 행동하는 게 유곽의 특징이다. 스이는 아름답다. 도덕적 가치를 배제한 채 다이진은 유녀의 미색과 자태를 탐한다. 색욕이 즐겁고 아름답지 않다면 많은 사람들이 여기에 탐닉하고 헤어 나오지 않는 일이 생기겠는가. 스이는 놀이다. 놀이의 즐거움은 길게 이어지지 않는다. 영원할 것 같은 쾌락과 행복의 꿈은 가진 재화가 바닥나는 순간 차디찬 현실로 내동댕이쳐진다.

 

사이카쿠는 총 515편의 짤막한 이야기를 통해 유녀놀음에 빠져서 자제할 줄 모르고 끝내 신세를 망쳐버린 사람들의 신상을 보여준다. 대개의 이야기는 비슷한 패턴을 반복한다. 부유한 신세였던 다이진이 다유같은 최상위의 유녀에게 빠져 흥청망청 돈을 뿌려대고 한껏 기분을 내며 꿈같은 시절을 보낸다. 빈털터리가 된 다이진에게는 두 개의 운명이 갈림길에서 기다리고 있다. 날품팔이 처지에도 여전히 미몽을 잊지 못하고 옛날의 화려한 시절을 되새긴다. 또는 거금을 주고 기적에서 빼준 다유와 함께 궁핍한 삶을 꾸려나간다.

 

여하튼 일상화된 유곽 출입은 사회와 가족 질서 유지 차원에서는 바람직하지 못하다. 가산을 탕진하기 일쑤며, 자식이 또는 아비가 다이진이 되면 신분과 가족 질서도 혼란스럽게 된다. 엄정한 도덕률의 차원에서 보면 문제는 더 심각해진다.

 

응당 교훈적이고 씁쓸한 뒷맛을 남겨야 하지만 의외로 각 이야기는 흥겹고 산뜻하다. 다이진들의 영락한 말년을 들려주면서 작가는 이렇게 말하는 듯하다. 그래, 이들은 지금 몰락해서 힘든 삶을 살아가고 있어. 하지만 그들은 아름다움에 탐닉했던 유쾌했던 호시절을 후회하지 않지. 다시 기회만 주어진다면 그들은 다시금 에도와 나라, 교토의 유곽들을 신나게 순례할 것이야.

 

그런 탓일까? 내게는 역자의 설명과는 달리 인간 욕망의 파멸적 결과에 대한 주의를 담은 메시지로 이해되지 않는다. 이왕 경고하려면 좀 더 따끔하게 신랄하게 해야 옷깃을 여미고 자신을 돌아보지 않겠는가. 사이카쿠는 전혀 그렇지 않다. 예전의 멋있고 감탄스러웠던 스이가 당대에서는 퇴색하고 변질되어 더 이상 멋을 찾기 어렵다는 탄식을 하고 있다. 때에 따라서는 옛 시절을 그리워하는 듯한 뉘앙스마저 글에서 묻어나온다. 그렇다면 사이카쿠의 이 작품은 지금은 사라져버린 스이의 아름다움을 기리는 송가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지금의 유녀는 세련된 마음을 가지고는 있으나 품위가 없지요.”

 

요사이 노는 방법을 보면 한심한 손님이 많다......차야온나와도 놀 수 없을 것 같은 남자가 한껏 멋을 부리고 덴진을 사러 온다.” (P.142)

 

여하튼 지금은 진짜 다이진을 찾아볼 수 없다......호탕했던 예전의 유녀놀음이 그립기만 하다.” (P.146)

 

유난히 기억에 남는 다이진과 유녀 이야기가 있다. 4-2섣달 그믐밤의 이세신궁 참배, 와라야의 금이 그것이다. 나가사키의 시카라는 다이진은 시마바라의 다유 요시노를 기적에서 빼낸 후 초가집에서 오붓한 생활을 즐긴다. 비록 넉넉한 삶은 아니지만 물욕을 버리고 자연을 벗 삼아 느긋하게 풍류를 즐기며 소박하면서도 아름다운 삶을 누리고 있다(P.135).

 

사이카쿠의 작품은 지극히 사실적이며 고상한 체하지 않는다. 스스로 대중작가임을 인정하고 호색과 관련된 인물들의 언행과 사건을 경쾌하고 치밀하게 묘사하여 일본 근세의 사회상을 살아있는 듯 독자에게 보여준다. <호색일대남>과 이 작품을 통해서 당대의 유곽 문화와 용어, 화폐 단위 및 기타 풍습 및 유흥 문화 등에 대해 고고한 역사서를 통해 알 수 없는 서민층의 생활 습속을 상세히 알 수 있게 된 점이 유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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